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60화 (60/193)

그린블러드(3)

사람도 기계도 전부 사라지고 텅 비어버린 폐공장. 밝은 햇살이 깨진 유리창과 부서진 벽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빛으로 이루어진 얇은 커튼이 모여 장막을 이루는 장소, 가장 밝은 곳에서 방독마스크를 착용한 앨런이 장비를 점검했다.

‘마탄 발사기, 지팡이 양호.’

발사기는 허벅지에 착용하고, 지팡이는 수평으로 한 번 휘둘러본다. 태양광 때문에 유독 잘 보이는 먼지들이 풍압에 휩쓸려 이리저리 나부꼈다.

이곳에 온 목표는 두 가지.

잡힌 사람들의 해방, 그린블러드의 처리.

‘클리닉도 이랬지.’

클리닉의 아이들은 시궁창 속에서 그나마 나은 미래를 위해 참았다. 노박이 만든 안전한 울타리는 사실 냄비고, 자신들은 천천히 삶아지는 신세라는 걸 모른 채.

차이점이 있다면 납치당한 인물들은 미래를 직감하고 공포에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이다.

‘겸사겸사 해결하면 좋지.’

놈들의 목표가 마법공학자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가만히 놔둘 수가 없다.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있는데 뒤가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미궁 탐험을 하겠는가.

앨런이 손짓하니 엎드려 있던 표범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풍경에 어찌나 자연스럽게 녹아있는지, 주인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표범의 무늬, 그러니까 룬문자들은 예전보다 화려하게 동체를 수놓았다.

[강화], [가속], [강력]

사람으로 따지면 내구, 속도, 근력.

그동안 앨런의 경지는 앞으로 나아갔고, 룬문자 3개의 연계 혜택을 받은 표범은 성능이 향상되었다.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수문장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앨런은 품속에서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지트를 스캔한 테일러가 대략적인 내부 인원수를 보냈다.

[25]

많아야 25명이라는 뜻. 놈들도 나쁜 일을 해야 먹고사는데 어떻게 아지트에만 옹기종기 모여있겠는가.

폐공장을 나서는 앨런의 앞으로는 표범이, 뒤로는 무한궤도가 달린 네모난 금속 상자가 움직였다. 수레와 달리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소모품이나 작은 기계를 운반하는 오토마톤이었다.

저벅저벅, 드르륵.

워커와 무한궤도가 보도블록에서 내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갱단의 아지트 근처에서 누가 공장을 운영하고 싶겠는가. 인적이 없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저 앞 코너에서 돌면 아지트 정문이 보인다. 잠시 멈춰선 앨런이 지팡이로 상자의 윗부분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시락통처럼 층층이 쌓인 구조로 된 상자의 제일 위, 옆 부분이 스르륵 열리더니 거미를 닮은 로봇들이 우르르 기어 나왔다. 알에서 막 깨어난 듯한 새끼거미들이 앨런의 명령을 기다렸다.

“움직여.”

아지트로 이어지는 전깃줄의 위치는 모두 확인해뒀다. 각 좌표를 지정하니 거미들이 무리를 나눠서 이동했다.

잠시 기다리니 무사히 도착했다는 반응이 돌아오고, 앨런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신호를 보냈다. 아지트로 연결되는 선만 끊을 테니 다른 공장은 괜찮으리라.

펑!

어딘가에서 들리는 폭발을 배경음 삼아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광경은 고개를 푹 숙인 자동 포탑과 갑작스러운 사태에 으르렁거리는 오크 갱단원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자, 가장 말단으로 보이는 갱단원이 아지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기술자를 부르려고 하나? 비상 동력원은 없나 보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긴 광경이다.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세금도 제대로 안 내는 족속들이면서, 규칙으로 세워진 사회의 인프라는 잘만 사용하고 있으니.

물론 앨런이 웃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차가운 눈빛과 냉정한 마음으로 적들의 동태를 분석했다.

‘포탑과 감시카메라 무력화. 수리 인원 없음.’

갱단이기에 완벽한 대처를 바랄 수 없었고, 그건 앨런에게는 호재였다. 동력을 복구해도 상관없었다.

‘그때쯤이면 끝날 테니까.’

마침 저쪽에서도 앨런을 포착, 고참의 지시로 앞에 나선 갱단원 셋이 불청객을 향해 돌진했다.

옛날엔 대단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작아질 대로 작아진 갱단. 그래도 오크들은 종족 자체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심지어 강화외골격으로 무장했으니 더더욱.

쿵쿵쿵!

제조사는 뒷골목 공방으로 추정되나, 외골격 자체의 무게와 오크의 돌진력이 더해지면 충분한 위력을 뽑아냈다.

발걸음 하나하나마다 보도블록이 움푹 파이며 사방으로 시멘트 조각을 뿌려댔다.

옛사람들이 괜히 오크 중갑 보병을 무서워한 게 아니다. 그 시절에도 평균 신장 1.9m에 달하는 덩치들이 갑옷을 입고 돌진하면 공포 그 자체였다.

다만, 앨런은 침착했다.

“2층, 앞으로.”

미궁식 셈법에 익숙해진 앨런은 가장 위에서 두 번째를 2층이라 표현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미들이 또 우르르 튀어나왔다.

덩치는 손바닥보다 작고, 다리는 긴 거미 9마리가 바닥과 담을 빠르게 기어갔다.

“작아서 파괴력이 형편없을 거다. 그냥 짓밟아버려!”

좋게 말하면 야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한 오크다운 판단이었다. 강화외골격이 자체적으로 제공하는 마법저항력도 판단의 근거이리라.

마침내 접근한 거미가 폴짝 뛰어올라 오크의 가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이루어진 폭발!

퐁!

마치 병뚜껑을 따는 듯한 귀여운 소리였다. 푸르스름한 방어막은 우릴 지켜줄 거다, 오크들은 잠깐이지만 그리 믿었다.

“이런 시발!”

“안으로 기어들어 오잖아!”

방어막에 작게 뚫린 구멍으로 거미가 2마리씩 들어갔다. 외골격과 오크의 몸을 거침없이 타오른 거미는 등 쪽으로 움직였다.

노리는 목표는 등에 부착된 마나배터리와 마력로 같은 동력 저장소.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은 거미들이 다시 한번 폭음을 연주했다.

퐁!!

이번에도 들리는 가벼운 소리. 강화외골격이 갑자기 뻣뻣해지고, 다음 다리를 앞으로 딛지 못한 오크들이 그대로 나자빠졌다.

‘괜찮네.’

앨런의 짧은 평이었다. [쇠약], [폭발], [집중]의 룬문자는 마법저항력이나 방어막을 뚫기 좋았다. 게다가 앨런은 마법공학자라 마도구의 구조나 취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무식하게 전부 때려 부술 필요 없이, 똑똑하게 핵심 부품 몇 개만 망가트려서 무력화할 수 있었다.

“빨리 일어나!”

“거의 다 벗었···끅!”

“뭐야?!”

쓰러진 오크들이 외골격을 벗고 일어나기도 전에 네발 달린 맹수가 그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표범의 날카로운 발톱에는 붉은 피 소량이 묻어있었다.

고참이 입을 떡 벌렸다. 약골로 보이는 불청객을 단숨에 찢어버리리란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씨발, 접근도 못 했는데···.”

고참은 마침 정문으로 합류한 갱단원에게 대응 사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담 위에 설치된 자동 포탑 옆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포탑에 달린 기관포에 가까운 총의 연결부를 양손으로 덥석 움켜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잡아당겼다.

끼이익!

강화외골격과 오크의 근력이 더해지자, 기관총이 단숨에 뽑혔다. 그대로 건방진 침입자를 겨누려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고참을 덮쳤다. 무게를 못 이긴 고참은 그림자와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떼어내!”

지원 온 오크들이 고참의 목을 노리는 표범을 포위하며 소리쳤다. 표범은 영악하게도 끝까지 발톱을 휘두르다가 붙잡히기 전에 유유히 빠져나갔다.

“저, 저···.”

표범이 훌쩍 뛰어넘은 담벼락 너머에서 오크들의 비명이 쉴새 없이 터져 나오고, 얼굴과 팔뚝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고참이 외부를 확인했을 때는 멀쩡한 오크가 없었다.

앨런은 줄줄이 누워있는 오크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쉬운데?’

뒤가 의문으로 끝나는 이유는 이럴 줄 몰랐기 때문이다. 지하에서처럼 마탄 발사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적들을 정리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표범과 거미의 힘이라기보다는.

‘룬문자 덕분이겠지.’

연계하는 룬문자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새기는 난도는 치솟고, 부여하는 마력도 급격히 증가했다.

부정적인 면모만 설명했지만, 입력이 많으면 출력도 증가함이 보통이다. 심지어 마법공학의 효능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증가했다.

앨런은 앞에 누워있는 오크 10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강화외골격을 착용한 정예, 그런 것들을 단시간에 쓰러트렸으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마침 이곳을 바라보는 고참과 눈이 마주친 앨런은 외골격 해킹을 시도했다. 마도구가 조금만 복잡해도 영혼석이 중앙처리장치로서 작동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얇은 방화벽을 가볍게 찢고 영혼석 내부를 들여다봤다. 별문자들이 은하수처럼 뭉친 장소에 앨런의 마력이 뛰어들어 질서를 파괴했다.

“끄윽!”

고참의 외골격이 주인을 배신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공처럼 돌돌 말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호흡 말곤 없었다.

그때 강화외골격을 입은 거대한 오크가 나타나서 고참을 발로 굴렸다. 놈이 담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사라지자 오크의 입이 열렸다.

“그만! 해결사냐?”

“그쪽이 더 잘 알겠지.”

“연고가 없는 것들만 노렸는데 실수였나 보군.”

그린블러드의 옛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젊은 두목, 달리였다.

조직을 빨리 키우고자 인신매매처럼 위험하고 원한 사기 쉬운 일에 달려들었으리라. 그러면서도 자신은 남들과 격이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먼저 꺾인 자들의 실패를 단순한 불행이었다고 치부하며.

상황은 명백했고, 더 이어질 대화는 없었다.

달리의 헬멧 바이저가 아래로 내려오고, 부하들처럼 돌진했다. 그들이 입었던 장비보다 두꺼운 외골격은 전신 판금 갑옷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장비도 곧 실력. 표범과 거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부하들과 달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표범의 앞발을 왼손으로 막고, 무릎을 살짝 굽혀서 복부에 오른손바닥을 얹어서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버렸다.

까드득!

던져진 표범은 아스팔트에 발톱을 박으며 미끄러졌다. 장갑 부분이 좀 찌그러졌어도 표범을 완벽히 침묵시키려면 추가 공격이 필요했다.

달리는 뒷일을 부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앨런을 향해 접근했다. 어차피 상대는 혼자니, 그만 쓰러트리면 된다는 판단이었다.

앨런은 마탄 발사기를 꺼내는 대신, 왼쪽 눈을 크게 떴다. 공이 된 고참처럼 제압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시간이 조금만 더 주어지면 몰라도, 그때까지 기다리면 앨런의 몸은 휴지처럼 찢어지리라.

앨런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다. 접근전은 절대 허용하면 안 되는 영역이었다.

“해킹? 혐오스러운 새끼가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이게 방화벽이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달리. 앨런은 승기를 잡았다고 여기는 놈을 보며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뒤에 대기 중인 상자가 전부 열리고, 이번에는 20마리가 넘는 거미가 뛰쳐나왔다. 군인처럼 오와 열을 맞춘 거미들은 차례대로 달리를 향해 돌진했다.

퐁!

“고작 이따위 수법으로!”

퐁!

“문제없다!”

퐁!

“이건···.”

달리가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크게 들렸지만, 반대로 말은 점점 줄어들었다. 원인은 점점 망가지는 방어막 그리고 내부로 침투해서 몸 위를 기어 다니는 거미들.

아까와는 다르게 가슴과 얼굴에도 매달린 거미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아, 저러면 부품 망가지는데···.”

작은 연기에 휩싸인 달리는 앨런의 앞, 고작 3m 거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진짜 무식하네. 차라리 권총이라도 쓰지.”

앨런은 자신과 테일러가 너무 과민반응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니면 오로스 교수 때문에 오크에 대한 기준이 크게 올라갔든지.

날뛰는 표범을 구경하며 품에서 울리는 전화를 꺼내니, 테일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괜찮니? 내부는 생각보다 인원이 적다. 어디 출장 갔나?]

[이 새끼들 아무것도 아니잖아. 괜히 쫄았네. 너, 멀쩡한 고블린 괜히 겁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겨우 이 정도 근육 돼지로는 날 막을 수 없지.]

상황을 모르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키키의 메시지도 뒤이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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