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블러드(4)
물류창고의 오버헤드 도어가 올라가고, 앨런이 처리한 오크들이 바닥에 붉은 자국을 남기며 질질 끌려왔다.
앨런이 표범과 오크들을 연결하는 줄을 푸는 사이, 키키가 촐랑거리는 몸짓으로 다가왔다.
“왜 이리 많아? 정말 혼자 처리했어?”
“아뇨.”
“그럴 줄 알았어. 아무리 네가 남달라도 녹색 떡대들을 단숨에 처리하긴 무리겠지. 조력자가 누군지 얼굴 좀 보자.”
“이 아이들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아이? 으앗!”
키키는 갑자기 머리를 훅 들이미는 표범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한궤도를 돌돌 굴리며 움직이는 상자에게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재빨리 근처의 사물함 위로 올라갔던 키키가 슬그머니 내려왔다. 고블린 특유의 겁쟁이 속성은 작은 자극에도 과한 도망을 요구했다.
자존심 상한 키키가 멀찍이 떨어져서 오토마톤을 살폈다.
“표범은···.”
철판도 뚫게 생긴 드릴 송곳니, 붉게 물든 앞발, 전신에 새겨진 룬문자. 부담스러운 외형에 키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자로 움직였다.
바퀴, 도시락통처럼 층층이 쌓인 구조. 딱 봐도 만만한 모습이어서 주먹으로 외부를 툭 건드렸다.
“넌 좀 약해 보인···. 억!”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 상자가 건방진 고블린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키키는 뒤통수를 움켜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면서도 파이프를 꼭 감싼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수는 안 돼! 앨런, 나 좀 살려줘!”
야속하게도 앨런과 테일러는 소란을 무시하고, 근처에 쌓인 오크들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중이었다.
“마탄 발사기 없이 여기 누워있는 것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
“네.”
“메이즈시티에 입성한 지 정확히 얼마나 지났지?”
“7월 초쯤에 왔으니 넉 달 정도요.”
“대미궁이 존재하는 초거대 도시에 들어온 기념비적인 날짜는 기억해야지. 아니지, 너답다. 이러면 계획을 바꿔도 되겠는걸.”
도달계층이 11~20층이면 동일하게 심도 2라고 표현하니, 같은 급이라도 강함은 천차만별이었다.
게다가 사람의 특성이나 능력은 전부 다르기에 가끔 대중이 정해놓은 틀을 깨는 존재는 있었다.
테일러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앨런의 요모조모를 뜯어봤다. 일단 자신의 앞에도 한 명 있었다. 마력과다증이라 몸이 약한데도 홀로 미궁을 내려갔고, 비대한 마나하트로 다수의 오토마톤을 운용해서 단점을 가렸다.
궁금증을 못 참는 앨런은 테일러의 대답을 재촉했다.
“계획을 어떻게 바꾸시게요?”
“동굴 중층에서 한동안 머물 생각이었는데, 바로 하층으로 내려가도 되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여기 정리부터 하자.”
앨런은 바로 강화외골격부터 벗겼다. 각자의 체형에 맞춤 제작한 장비라서 바로 사용하기엔 무리였다.
그래도 외골격을 만지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평생 고물이나 만질 줄 알았던 시절이 이제는 멀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인생을 주도한다는 사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앨런은 외골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 착용하실래요?”
“뒷골목에서 만든 이런 싸구려를 쓰느니 지금 장착하고 있는 인공 근육이 훨씬 좋다.”
“달리가 사용하던 물건은요? 그건 풀문이라는 칠성의 자회사에서 제작해서 아저씨도 만족할 거예요.”
“그건 네가 써야지. 양보도 좋은데, 우선은 네가 챙기고 나서 다른 사람을 생각해라. 계속 퍼주다 보면, 은혜를 받는 놈들도 널 호구 잡을 거다.”
“그렇게 하실 거예요?”
“난 당연히 아니지. 잠자는 감옥의 인질들이 슬슬 깨어날 시간이군.”
테일러의 말대로 수면 마법에 취해있던 마법공학자들이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기는···.”
“내 팔? 팔 어디 갔어?”
“드르렁.”
온갖 반응이 튀어나왔다.
앨런이 그들 셋 앞으로 다가가자, 무심한 눈빛과 마스크를 보고 악당이라 생각했는지 싹싹 빌었다.
“누구? 사, 살려줘! 평생 입 다물고 있을게!”
양팔이 없는 사람이 머리를 조아렸다. 절단면을 보니 원래 의수가 있었는데 오크들이 떼어낸 모양이었다. 마법공학자의 팔에는 어떤 장비가 들었을지 모르니 당연한 처사였다.
앨런은 점점 커지는 곡소리를 통제하기 위해 지팡이로 탁자를 때렸다. 울던 두 사람은 입을 막고, 아직도 비몽사몽이던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갱단 소속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납치한 것들은 우리가 정리했으니 진정하세요.”
“정말요?”
“고맙습니다.”
밝음도 잠시, 어두움이 안색 대부분을 차지했다. 납치 과정에서 마법공학자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장비들을 모두 강탈당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사정을 아는 앨런은 마석이 들어있는 주머니 세 개를 각자의 앞에 던져줬다.
“재기의 발판이 되어줄 겁니다. 하나씩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저기···.”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앨런의 물음에 한 명이 혹시라도 더 받을 수 있나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가 전신을 개조한 고블린을 발견했는데, 왠지 심통 가득한 표정이 꺼림칙해서 마음을 접었다.
“아닙니다.”
세 사람이 떠난 자리, 키키가 슬쩍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아깝게 왜 주는 거야? 그냥 쫓아내도, 아니지. 오히려 구조비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장비를 모두 털린 마법공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뇌 확장 장치는 함부로 뜯어내면 죽으니 어쩔 수 없이 놔뒀겠지만, 그게 무사해도 이미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렇지. 내가 저 상황이라 생각하니 좀 막막하네.”
“그러니 사람 세 명 살린 셈 치고 키키도 잊으세요.”
“아이, 씨.”
“문제 있나요?”
“모르겠어. 뭔가 이상해···. 홀가분한 것 같으면서도 찝찝해. 벌레가 들어갔나, 가슴이 간지럽네.”
고블린들이 대개 그렇듯, 키키도 금방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린블러드의 아지트에는 욕심 많은 고블린의 이목을 빼앗을 물건이 정말 많기 때문이었다.
“자고 있던 사람들도 주머니 줬잖아. ···그럼 나도 좀 챙겨도 되냐?”
“저, 저. 고블린 새끼가. 양심은 어디에 두고 다니냐? 몸 개조하면서 시술소에 놓고 왔니?”
“영감님. 저도 근육 돼지 하나 처리했습니다.”
키키가 자랑스럽게 가리키는 장소에는 강화외골격도 없는, 신입으로 보이는 어린 오크 하나가 누워있었다.
근처에 쓰러진 캐비닛의 모서리와 오크의 뒤통수에 움푹 파인 자국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운 좋게 얻어걸렸으면서. 자랑이다, 자식아.”
“그렇죠.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좀 챙겨주세요.”
“아니, 이게 미쳤나. 너 같은 건 열 트럭을 공짜로 줘도 싫어. 저리 가라니까!”
테일러가 징그럽게 달라붙는 키키를 밀어냈다. 앨런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키키.”
“왜? 뭐 주려고?”
“적당히 하세요.”
“음, 알았어···. 그런데 나도 열심히 했는데···.”
무심한 눈동자에 주눅 든 키키가 조용히 정리를 시작했다. 주둥이가 조금만 더 튀어나오면 황새와 친척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입매 한쪽이 살짝 올라간 테일러가 속삭였다.
“웬일이냐? 고블린이 매달리면 퍼줄 것 같더니.”
“적절한 보상은 그에 합당한 일을 완수했을 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 그래. 아주 잘하고 있어. 상벌의 기준이 이상하면 고블린 같이 금방 기어오르는 놈들은 버릇 나빠져.”
한동안 시무룩한 키키였지만, 앨런이 내미는 마석 주머니를 받아들고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창고를 떠났다.
테일러는 쓸만한 물건을 트럭 두 대에 나눠 싣고 시동을 켰다.
투다다다!
거친 엔진음이 들리며, 트럭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 떨렸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런 걸 쓰나. 트럭이면 디젤인가? 운전할 줄 알지?”
“네.”
클리닉을 탈출하고 몇 개월 떠돌아다니는 동안 비토에게 배웠다. 그때는 심심풀이였는데 활용할 순간을 맞닥뜨리니 반가웠다.
“그런데 의뢰인이 누군지 밝히지 못했네요. 생각보다 비밀스럽게 접근했나 봐요.”
“너무 어설퍼서 우리가 쉽게 알아채면 몰라도, 이런 경우에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괜히 얽혔다가 큰 단체라도 나오면 골치 아파져. 슬슬 출발하자.”
구공업지역을 빠져나가는 트럭과 경찰차들이 엇갈렸다.
*
신규등록 및 초입 탐험가를 응대하는 5층 건물, 통칭 새싹관. 층은 낮아도 면적은 굉장히 넓은 빌딩 1층 로비에 앨런과 테일러가 앉아있었다.
“이 나이에 재발급을 받을 줄이야.”
[미궁탐험가 신분증]
-이 름 : 테일러
-계 층 : 20층
-주특기 : 정찰 및 탐지
-부특기 : 없음
앨런도 옆에서 신분증을 구경했다.
“20층이네요. 저번에 출입할 때 사용했던 건 35층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옛날 신분증은 그만 사용하라는 신호겠지. 재입사했다고 생각하니 뭔가 싱숭생숭하네. 아무래도 죽을 때까지 미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정정하다는 뜻이니 좋죠. 그런데 여기는 다른 이유로 오셨잖아요.”
“아, 맞다.”
테일러의 눈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허공에 네모난 화면을 만들었다.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테일러는 이런 식의 정보전달이 왠지 모르게 정겨웠다.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된 기분이랄까.
“이건 의뢰다. 무작정 아래로 내려가기보다는 해당 구역의 의뢰와 연계하는 편이 효율이 높다. 가끔 마법사나 연구자가 이런 식으로 탐험가조합을 통해 일감을 던져줘.”
“다행히 누굴 보호하며 내려가는 일은 아니네요.”
“그랬으면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내가 물어온 일은 좀 달라. 동굴 중층까지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방어기지만 있지만, 하층에는 고정적인 요새나 유적이 나와.”
“그건 들어봤어요.”
“나 때는 선배들에게 싹싹 빌면서 배웠는데, 요즘은 삼라만상에 전부 있단 말이지. 세상 참 좋아졌어.”
그냥 가벼운 투정이었다. 정작 중요한 정보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다뤄진다는 사실을 테일러는 잘 알았다. 예를 들면 자신이 지난번에 찾았던 비밀통로 같은.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의뢰의 목표가 뭐냐면 요새나 유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금속판이나 서적이다. 새로운 기술은 보통 그런 것에서 발견되지.”
“찾으면 먼저 봐도 문제없겠죠?”
“목소리 데시벨이 좀 높아졌다. 이럴 때만 반응이 좋네. 그런데 너무 기대는 하지 마라. 너도 알다시피 미궁 탐험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고, 동굴은 거쳐 가는 통로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니까.”
“그런데 미궁에서 발견하는 문자는 마법으로도 해독이 안 되잖아요.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아무렇게나 끄적인 것처럼요.”
“설계도는 그림이니 어찌어찌 해석할 수 있잖니.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벌써 골이 아프려고 해.”
의자에서 일어난 앨런은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다.
“새로운 발견을 하면 좋겠어요.”
“어렵다니까. 네 지식욕을 충족시킬 물건을 찾으려면 적어도 원시림은 돌파해야 해.”
“그래도 혹시 모르죠.”
“이 녀석, 고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일러는 흡족했다. 앨런은 탐험가가 지녀야 할 도전정신과 욕구가 충만했다. 그런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미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테일러는 앨런에게 슬쩍 물었다.
“피살이꽃 씨앗은 충분하니?”
“웨스턴스카이요? 갑자기 거기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앨런의 두뇌 속에서 여러 광경이 스쳐 지나갔다. 제일 위로 부상한 기억은 테일러가 요화의 모습에 한동안 시선 빼앗긴 장면이었다.
“요화 사장님 때문이죠?”
“그런 거 아냐. 네 몸이 걱정돼서 그래.”
“적어도 10살 차이가 날 텐데 괜찮겠어요?”
“몸도 갈아 끼우는 시대에 나이가 뭐가 중요···. 험, 험!”
앨런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정작 본인은 못 느꼈고, 테일러도 마스크 때문에 몰랐다.
테일러가 입을 꾹 다물며 둘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모노레일 정거장에 도착해서 차량을 기다리는 도중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차량이 도착한다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마침 웨스턴스카이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열차였다.
“그래서···, 갈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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