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유적(1)
높이 50m, 너비 100m의 크기.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 칠흑의 문.
속에 품고 있는 재화와 비밀로 탐험가들을 유혹하는 미궁은 입구부터 사람의 영혼을 홀리는 재주를 지녔다.
미궁의 문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해 탐험가 신분증을 발급하는 관광객도 있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나 미궁을 자주 드나드는 진짜 탐험가들은 감흥을 느낄 대로 느껴봤기에 최소한의 자극 강도인 역치가 한껏 올라갔다.
브레이커 소속으로 수십 년 동안 미궁에서 살다가 은퇴했던 테일러도 그중 하나였다.
“지루해. 빨리빨리 좀 들여보내지.”
도달계층 1~20층, 21~40층 순으로 모험가를 줄 세우니,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첫 번째는 언제나 입장 대기 시간이 길었다.
철저한 실력지상주의와 보상.
이미 달성한 사람에게는 만족감을, 저 밑에서 구경하는 도전자에게는 열망을 불어넣는 장치였다.
중간에 포기하는 탐험가도 있지만, 경쟁은 궁극적으로 능력 향상을 부추기고 미궁 사업에 계속 깨끗한 피를 수혈했다.
앨런은 바로 옆줄을 바라봤다. 21~40층에 도달한 탐험가들이 거니는 줄은 쾌적했기에, 그쪽을 이용하는 행렬이 나타나면 시선이 쏠렸다.
수레 위에 앉아있던 테일러가 탐험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긴 에셀 마탑, 지금 들어가는 애들은 아이벡스 용병단. 용병이나 해결사나 똑같은 놈들이긴 한데, 쟤들은 선전포고라는 단어가 뭔진 알더라. 그렇다고 신사적이라는 뜻은 아니고.”
“용병도 여길 들어오네요. 훈련 용도로 사용하는 걸까요?”
“돈도 벌고 실전 경험도 쌓는 최고의 훈련장이긴 하지. 저 뒤에 따라가는 애들이 신입인가 보다.”
도달계층을 나누는 줄은 입장 인원 중 반절 이상에게 자격이 있다면 사용 가능했다. 물론 커다란 조직이나 단체에만 주어지는 혜택이었다.
“우리도 저번에는 편하게 들어갔는데, 하필 재발급을 해줘서···.”
“은퇴했으니 어쩔 수 없죠. 그러니 최대한 빨리 20층을 돌파해서 줄을 바꿔요.”
“조급함은 금물. 널 보면 쉽게 떠오르지 않는 단어긴 하지만···. 어디, 심장이 뛰나 확인 좀 해볼까?”
테일러가 앨런의 탐험복 위로 손바닥을 붙였다. 차분한 심장 박동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다행히 골렘은 아니구나.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테일러의 의미 없는 농담은 꽤 효과가 있어서 지루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입장 후에는 오토마톤이 어디에서 나올지 경계하며 계속 걸어야 하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긴 시간의 행군 끝에 7층에 도달한 테일러가 푸슉 소리를 듣고 앞으로 나섰다. 맨홀이 열리는 소리에 축 늘어진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동굴로 내려가기 전에 테스트 좀 해볼까.”
“먼저 하실래요?”
“나야 좋지. 오크보다 오토마톤이 손맛이 짜릿하거든. 왜 그런지 아니? 그것들은 공포를 모르고 달려들어서 끝날 때까지 방심할 수 없거든.”
나타난 오토마톤은 늑대 기수 둘. 침입자를 무조건 적대하는 기계답게 테일러를 인식하자마자 돌진했다.
지금껏 고요하던 미로를 따라 금속과 바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 소리가 커질수록 오토마톤의 기세도 점점 강렬해졌다.
테일러는 왼손으로 샷건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을 매만졌다. 가장 먼저 달려드는 적을 향해 총구가 돌아갔다.
샷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약간 작은 마탄 발사기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위력도 마찬가지. 마법공학으로 탄환을 강화했기에 평범한 납 구슬은 예전에 뛰어넘었다.
콰앙!
인공 근육과 관절로 강화한 왼손이 반동 때문에 살짝 떠올랐다. 그 위력을 온전히 받아낸 기수의 상반신 일부는 사라졌다.
기수가 사라졌어도 늑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새빨간 안광을 빛내며 자세를 한껏 낮췄다. 녀석의 칼날 이빨이 노리는 부위는 테일러의 사타구니였다.
늙은 탐험가는 본능적으로 눈썹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자세를 유지했다. 시선을 끝까지 고정하고, 늑대가 다가오길 기다리다가.
접촉의 순간, 재빠르게 뒷발을 빼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동시에 허리춤에 뒀던 손목에 스냅을 줬다.
푸른 궤적이 오로라처럼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파란 커튼은 늑대의 몸을 빠르게 지나쳤고, 사타구니를 노리던 악당은 코부터 엉덩이까지 수직으로 썰렸다.
“어딜 감히···.”
두 동강 난 늑대가 바닥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전, 테일러가 쓴 헬멧 안쪽에서 파란빛이 명멸했다.
헬멧은 에비 그리고 빛은 마법의 전조.
테일러가 지긋이 쳐다본 늑대 기수가 갑자기 구겨졌다. 바람 계열 마법 [공기 폭발]이 남은 적을 손쉽게 처리했다.
테일러는 마나소드의 손잡이를 휘릭 돌리며 허리춤에 끼웠다. 그제야 잘린 늑대가 쓰러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이상 무. 상태가 아주 좋아. 진즉에 매직웨어로 신체를 갈아 끼울 걸 그랬나?”
“후회하세요?”
“딱 하나 있지. 그때 바꿨으면 회사 보조금 혜택을 받았을 텐데, 괜히 근성론 같은 것을 믿어서···.”
말을 끊은 테일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마침 이쪽으로 오는 기척이 다수 포착됐다. 전투의 소음을 감지하고 접근하는 것이리라.
“발소리를 들으니 오토마톤이네. 4마리 정도 되겠는데. 너도 테스트할래?”
“저는 안 그래도···.”
“빼지 말고 해봐. 장비도 든든하게 맞췄으니 활용을 해야 보람이 있지.”
강화외골격이 예전에는 하반신에만 있었다면, 이제는 온몸을 덮었다. 아무리 앨런이 약골이라도 외골격을 착용했으니, 매직웨어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순수 오크는 주먹으로 때려눕힐 수 있었다.
사실 앨런은 그런 것보다 무거운 재료를 직접 옮길 수 있어서 좋았다. 예전에는 도르래를 사용하고, 수레로 나르며 얼마나 귀찮았던가.
테일러에게 등을 떠밀린 앨런이 앞으로 나섰을 때, 안개 속에서 오토마톤 네 기가 튀어나왔다. 송아지만 한 멧돼지 무리였다.
테일러는 무기를 움켜쥐면서도 앨런이 어떻게 싸울지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다.
“네 차례야.”
앨런의 한 마디에 웅크리고 있던 표범이 달려나갔다. 돌진하는 멧돼지들 덕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충돌의 시간이 빠르게 다가왔다.
표범은 상체를 들었다. 달려가던 몸이 살짝 떠오르며, 자유를 얻은 앞발 두 개가 양옆을 달리는 멧돼지들의 뺨을 후려쳤다.
콰득! 콰득!
맹수의 냥냥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금속이 비틀리는 소리가 미로를 가득 채웠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표범은 발톱을 바닥에 박아 넣어서 미끄러지는 각도를 조절, 멀쩡한 멧돼지를 몸통으로 들이박았다.
꾸드득!
미로의 벽과 표범 사이에 끼인 멧돼지의 카메라 아이가 툭 튀어나왔다. 마치 압착기에 끼인 과일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 앨런에게 접근한 멧돼지는 지팡이에 얻어맞더니, 무릎 꿇은 자세로 바닥을 길게 미끄러졌다.
테일러가 순식간에 끝난 전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은 어떻게 했니?”
“지팡이가 몸통에 닿는 순간 마력 신호를 어그러트렸습니다.”
“뭐라고?”
“자세한 원리는 마력회로를 따라서 마나 펄스···.”
“아냐, 그만.”
테일러는 말이 길어질 듯해서 얼른 끊어냈다. 두뇌를 괴롭히는 마법공학 지식을 어떻게 뇌 확장 장치도 없이 다루는지 참 궁금했다.
혹시라도 앨런이 설명을 이어갈까 싶어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잘하면 표범이 수문장도 혼자서 잡겠는데.”
“사람의 피부와 달리 수문장의 장갑은 너무 두꺼워서 아직은 힘들어요. 제가 보조를 하면 맞상대할 수는 있겠죠.”
“볼 때마다 느끼는데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냐?”
앨런이 멧돼지를 물고 온 표범을 점검하며 말했다.
“랑카의 쓰레기장에서 동방 대륙의 사자성어에 대해 설명한 책을 본 적이 있어요. 거기에 용두사미라는···.”
“그건 나도 안다. 안 좋은 뜻이잖아.”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용을 그리다 실패해서 뱀이 그려진 거예요. 같은 원리로 처음부터 뱀을 목표로 삼다가 어긋나면 지렁이나 튀어나오겠죠.”
“그래서 꿈을 처음부터 크게 꾸겠다?”
“네, 맞아요.”
테일러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앨런이 건네주는 부품을 수레에 옮겨 실으면서 물었다.
“그래도 갑자기 표범이 강해진 이유는 설명이 안 되는데.”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릴게요. [강화], [가속], [강력]. 표범에게 적용한 룬문자예요. 이게 끝이 아니에요. 회로 마법 아시죠? 상형문자와 비슷한 룬문자와 달리 선을 따라 내달리는 마력의 흐름으로 신비한 현상을 구체화하는 건데, 이번에 표범의 무늬 위치를 조금씩 바꾸면서 전체적으로는 회로 마법의 양상을 띠게 했어요. 룬문자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회로의 장점까지 포함하는 거죠. 그렇게 적용한 마법은 『분쇄』. 타격 하나하나마다 신비가 실려서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어요. 듣고 계세요?”
전리품 때문에 설명을 끊는 적절한 시기를 놓친 테일러는 지식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어? 어···.”
혼이 빠진 얼굴의 테일러가 귀를 매만졌다.
“잠깐 청각 기관에 이상이 생겨서 점검하고 있었다.”
“그럼 다시 한번 설명해드릴···.”
“그만. 지식에 대한 열망도 중요하지만, 미궁에서는 집중해야지.”
“그렇죠. 적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니.”
납득한 앨런이 그제야 조용해지고, 설득에 성공한 테일러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가 자신도 서당 개가 될까 봐 두려웠다. 자연스럽게 습득하면 모를까, 강제적인 주입은 사양이었다.
동굴에 진입한 앨런은 하층의 시작, 그러니까 18층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린블러드를 정리하며 테일러가 예상했던 대로 상층과 중층의 적들은 위협적이지 못했다.
앨런은 인공미와 자연미가 공존하는 동굴을 보며 감상을 말했다.
“동굴에 올 때마다 느끼는데, 층 하나하나가 엄청 넓네요. 전투를 빨리 끝내고 휴식도 최소한으로만 취했는데 4일 넘게 걸렸어요.”
“괜히 학자들이 미궁을 설명할 때 ‘지하세계’라는 말을 꺼내는 게 아니야. 그야말로 하나의 세상이고, 훨씬 깊이 내려가면 몇 달이 지나는 경우도 허다해. 자, 이제 저기만 돌아가면 요새로 향하는 길목···.”
말을 하던 테일러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 앞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투는 아니고, 가만히 서 있네요.”
“이 새끼들이 설마?”
테일러는 무언가 아는 눈치였다. 걸어갈수록 검은 안개가 점점 흩어지고, 인기척은 강해졌다. 그리고 통로의 가운데에 탐험가 두 명이 서 있었다.
“여긴 아이벡스 용병단이 훈련을 위해 사용 중이다. 다른 데로 가라.”
구역 통제였다. 이 불법행위는 지상과 가까운 1~3층에서는 덜한 편이나, 밑에서는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그나마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건, 큰 단체 소속의 탐험가뿐. 앨런처럼 무소속 탐험가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위세도 실력도 아직은 모자라니까.
“잘 생각했어, 영감. 손자랑 손잡고 조심히 올라가라고.”
앨런은 천천히 물러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알고는 있었는데, 막상 경험하니 화나네요.”
“길을 막아서? 아니면 금속판이나 책을 못 구해서?”
“당연히 후자죠.”
용병단이 통제하는 구역에서 상당히 멀어지고 나서야 테일러의 입이 다시 열렸다.
“수집가 때문인가?”
“태풍론 말하는 거죠? 사고 발생 혹은 거대한 마력의 충돌로 인한 특이현상의 발생이요.”
“말도 안 끝났는데 어떻게 알아듣니? 그건 누구에게 배웠고?”
“시립대의 오로스 교수님이 알려줬습니다.”
“근육 교수? 누군지 알지. 앨런.”
“왜 부르세요?”
테일러는 계속 앞만 보는 앨런을 또 불렀다.
“앨런.”
“뭔가 있나요?”
“이제야 고개를 돌리는구나.”
“···.”
“장난이 아니니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마라. 태풍론과 유사한 개념이지. 내가 호명하니 네가 돌아봤지?”
“미궁도 자극에 반응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거죠?”
“그래. 내 대사를 다 뺏어가서 고맙다. 덕분에 칼로리 아끼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집가 때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고, 놈들이 신입 훈련을 핑계로 선점했다는 거다. 그야말로 농장이지.”
말을 마친 테일러는 동굴 벽을 더듬었다.
“이 근방에 분명 요새 옆에 붙은 유적으로 향하는 비밀통로가 있을 텐데.”
“브레이커만 아는 길인가요?”
“내가 알기론.”
“찾았어요.”
앨런이 지팡이로 벽 일부를 누르자 시커먼 통로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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