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유적(2)
동굴은 보통 축축하거나 건조하다. 험악한 생태계에 적응한, 그 동굴에서만 볼 수 있는 작은 벌레나 동물도 있다. 추가로 산소를 뿜어낼 식물이 없으니 화기는 엄금이다.
그러나 미궁의 동굴은 모든 상식을 부정했다. 적당한 습도, 몸 움직이기 좋은 선선한 기온, 무한정 솟아나는 괴물, 어딘가에서 끝없이 공급되는 산소.
처음에야 지레 겁먹고 산소통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지만, 지금 그렇게 하는 탐험가는 없다.
“불안장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산소 발생 마도구를 지니고 다닌대요. 밝혀진 바로는 벽 자체가 산소를 생성해서 그럴 필요가 없지만요.”
“그래, 유익한 정보 고맙다.”
즐거운 앨런과 지친 테일러는 비밀통로 내부를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움직였다. 속보로 이동해도 서늘한 온도 덕에 땀을 흘리진 않았다.
눈동자를 어디로 돌리든지 우둘투둘한 암석이 가득했다. 매번 비슷한 풍경을 보면 쉽게 질리겠지만, 앨런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랑카의 쓰레기장을 뒤질 때의 두근거림을 여기에서도 똑같이 느꼈다. 괴물이 앞을 막고, 때로는 못된 사람들이 방해하지만 지식 앞에서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자연스레 들뜬 기분은 일방적인 담화로 이어졌고, 테일러는 백과사전이 옆에서 걸어 다니는 기분을 느끼며 얼른 통로의 끝에 도착하길 빌었다.
이번에 발견한 비밀통로는 차원이나 공간을 왜곡하지 않는지, 요새의 면적만큼 빙 둘러서 이동해야 했다.
마침내 막다른 길에 도착했을 때, 테일러가 설명을 곁들였다.
“여길 나가면 요새가 있는 공동이다. 거길 지나야 유적이 나오는데, 지하인을 마주치면 귀찮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자 테일러가 벽을 더듬었다.
“오른손 11시 방향이요.”
“난 비밀통로 찾는 법을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할 때 배웠니?”
“뇌는 이상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도구나 오파츠처럼 주변이 일렁거리거나 흐려 보여서 아는 거예요.”
테일러가 특정 부분을 매만지니, 암석이 자동문처럼 좌우로 열렸다.
축구 경기장 몇 개는 붙여놓은 듯한 공터가 있고, 가운데에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성벽이 보였다. 말만 요새가 아니라 생김새도 진짜 요새였다.
앨런이 모든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이유는 공장처럼 여기에도 안개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나도 진짜 몰라.”
테일러는 앨런의 입이 열릴까 두려워 선수를 쳤다. 꽤 효과적이어서 앨런은 의문을 속으로 삼키고 이동할 준비를 했다.
[동화], [무음], [은밀]
앨런은 3개의 룬문자를 수레에 직접 새기고. 나머지는 금속판에 그려서 표범에게 끼우거나 테일러에게 나눠줬다.
“옛날 생각나네.”
“무슨 일 있었나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탐험은 길어지고, 그럴수록 장비 손질이 중요해져. 그때도 함께 내려가던 공돌이 하나가 다방면으로 활약했지. 처음에는 어리바리해서 쥐어박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말을 끝내자마자, 저 멀리, 정문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장소에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테일러는 성벽이 시야를 가려서 눈살을 찌푸렸고, 앨런은 공동의 벽에 딱 붙어서 천천히 이동하면서도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됐다.”
손바닥 위에 동그랗게 말려있던 정찰용 오토마톤, 거미가 다리를 쫙 펴고 동글동글한 카메라 아이로 앨런을 올려다봤다.
왼쪽 눈과 연결되어 있기에, 앨런은 거미를 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얼굴을 봤다.
지하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경로를 바꾸게 될 수도 있고, 아이벡스 용병단이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거미구나.”
“다리가 많아서 어떤 지형도 쉽게 오가니까요.”
“특별한 이름은 지었니?”
“꼭 필요한 절차인가요?”
“계속 운용할 거면 애칭을 붙이는 편이 좋잖아. 안 그래?”
“···.”
앨런이 영 내켜 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니, 테일러가 은근한 어조로 설득을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 유명한 무구나, 강자들이 지닌 애병에는 이름이 전부 있잖아.”
“어떤 검사가 검은 소모품이라고 했는데요.”
“그 말도 정답이긴 한데, 용광검이나 티르빙 같은 무기가 고장 났다고 버릴 거야? 당연히 거장에게 맡겨서 고쳐 써야지.”
오래되거나 주인이 아끼는 물건에는 영성이 깃든다. 마나와 불가사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 물건들은 이름 자체가 하나의 마법이 되어, 자신이 품은 위력을 세상에 뽐냈다.
“신비가 쌓이려면 하루 이틀로는 힘들어요. 신화적인 업적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수십에서 수백 년이 걸리잖아요.”
“시작이 반이라고 했어. 그러니 내가 이참에 작명을 도와줄게. 거미는 미궁의 깊은 어둠 속을 기어 다닐 테니 딥다크크롤러가 어때?”
“···정찰 시작할게요.”
“별론가?”
앨런의 손바닥에서 뛰어내린 거미가 요새 쪽으로 다각다각 내달렸다. 성벽에 뾰족한 발을 박아넣고 샤샤샥 등반했다.
테일러의 주특기에 정찰이라고 못 박혀있지만, 지금은 장비가 안 좋아서 지하인이 우글대는 요새에서 빛을 발하기 힘들었다.
요새 안에 웅크린 지하인과 오토마톤이 목적이라면 모를까. 만약 들켜서 소란이라도 일으켰다가 아이벡스 용병단이 눈치채면 곤란하기도 했다.
앨런은 중계기 역할을 하는 다른 거미의 등에서 케이블을 쑥 뽑아서 테일러에게 건넸다.
“같이 봐요.”
“이젠 빔프로젝터로 취급하는 거냐?”
“아뇨, 전 원격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럴 필요 없어요.”
앨런이 왼쪽 눈 밑을 톡톡 두드렸다. 그 말대로 동공 안쪽에서 푸른 섬광이 미약하게 번쩍였다.
“인조 안구가 오파츠라고 했나? 볼 때마다 새로운 기능이 생기네. 거기에 별문자를 구겨 담는 너도 참 대단하다. 책을 봐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테일러는 케이블을 귀 뒤 포트에 꽂았고,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미를 조종했다.
성벽 끝까지 올라간 거미는 카메라 아이로 요새 내부의 전경을 담았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건물이 열을 맞춰 있고, 무장한 지하인들이 그 안에서 나왔다.
어딜 봐도 살벌하고 삭막했다. 일상생활을 위한 시설이나 가구는 흉내만 냈을 뿐, 전부 속이 빈 깡통과 똑같았다.
멀쩡한 부분은 오직 전투를 위한 무기와 설비뿐이었다. 당연히 지하인들은 어떠한 의문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꼭 누가 프로그래밍 한 오토마톤 같네요.”
“사실 사람도 똑같지 않을까? 구성 성분의 차이만 빼면 잘 설계된 골렘이랑 비슷하잖아.”
“오···.”
“나도 어디에서 주워들었으니 이걸 가지고 토론은 하지 말자. 잘못하면 뇌에 과부하 오겠어.”
앨런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며 다시 거미에 집중했다. 요새 중앙, 광장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중갑병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더니 요새 정문으로 향했다.
“파워아머, 슈트인가? 어쨌든 용병단 놈들 횡재했네. 정문에 부채꼴로 진을 쳐서 나오는 적들을 하나씩 수확할걸.”
테일러의 말대로 정문을 빠져나간 중갑병은 용병단의 화력에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용병들은 능숙한 솜씨로 슈트를 해체하고, 피떡이 된 지하인은 꺼내서 버렸다.
그렇게 수확한 전리품은 대기 중인 수레에 실리고, 규모가 커지면 수송대가 지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조직원이 많은 단체나 할 방법이었다. 끊임없는 순환을 지속하려면 인력이 많아야 하니까. 일련의 과정은 마치 도살장을 연상케 했다.
중갑병이 전부 살해당하자 요새의 성문이 닫혔다.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이 없는 용병단은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테일러가 케이블을 제거하며 말했다.
“수집가가 동굴 하층에 머물렀다고 했지?”
“네.”
“그때 내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라 확인차 물어봤어.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지랄염병을 떨었나 보다.”
“떠난 후에도 이럴 정도면 미궁이 수집가를 엄청 위협적인 가시로 판단했다는 뜻이겠네요.”
“그러니 요새에서 병력을 끝없이 뽑아내겠지.”
정찰 거미가 성벽 아래의 작은 틈에 몸을 욱여넣고 있을 때, 테일러가 한곳을 가리켰다.
“여긴 걱정할 필요 없는 것 같으니 계속 가자. 유적은 바로 저기에 있어.”
“아이벡스는 모르겠죠?”
“내가 여길 한창 다닐 때는 브레이커랑 몇몇 대기업만 알고 있었어. 아마 지금도 비슷할 거다. 워낙 짠돌이들이라 돈 되는 지식은 꼭꼭 숨기고 있을 테니까.”
이번에도 벽을 매만지자 암석이 스르륵 이동했다. 경사가 약한 내리막길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니, 도서관과 비슷한 장소가 나타났다.
성인보다 두 배는 큰 책꽂이가 도미노처럼 주르르 서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앨런이 시선을 돌리는 곳 전부 텅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금속판이나 서적이 생성되는 구조인데, 깨끗하니 얼마 전에 털었나 보다. 아마 수집가 건으로 여길 조사하면서 겸사겸사 가져갔겠지.”
“아···.”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나는 탄식. 얼마나 애절한지 온갖 난리를 다 경험한 테일러도 잠시 울적해질 정도였다.
“혹시 남아있거나 새로 발생한 게 있을지 모르지 잘 찾아보자.”
“그런데 여긴 원래 이렇게 난장판인가요? 책꽂이가 무질서하게 서 있네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그게 중요한가? 책이 중요하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레에 잠들어 있던 거미들도 주인의 열망에 화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것들은 도서관 전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제발 있어라···.”
“그래, 있으면 좋겠다. 뭔가 있어 보이는 건 네가 먼저 읽고 의뢰를 내건 연구소에 팔자. 아닌 책은 중개인에게 넘기고.”
“연구소는 알겠는데 중개인은 왜죠?”
“미궁의 종이 쪼가리를 서재에 진열하는 게 부자들 사이에 유행이야. 내가 이만큼 상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거지. 내가 볼 땐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바보의 허세에 불과하지만. 겸사겸사 자금 세탁도 하고.”
앨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책은 안의 내용을 탐구해야 가치가 있거늘 그냥 모셔두기만 한다고?
“얼굴 근육이 움직이긴 하는구나. 부자들의 취미를 서민인 내가 어찌 알겠니?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나를 부자로 만들어주면 똑같이 따라 하고 감상을 들려줄게.”
“심심하세요?”
“사실 나는 책이랑 인연이 없는 사람이야. 피부에 뭔가가 오돌토돌하게 일어나잖아. 종이 알레르기 보여?”
“추워서 그래요. 인조 피부가 너무 싸서 수상했는데, 닭살도 구현하는 걸 보니 잘 샀네요. 가격을 등록할 때 실수했나 봐요.”
“가끔 그러더라. 취소하는 판매자도 있고, 그냥 보내주는 천사도 있고.”
도서관 전체를 뒤져서 찾아낸 책은 단 두 권. 안에 적힌 내용은 당연하게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것도 사실은 우리가 아는 문자인데 미궁의 신비가 작용해서 왜곡된 게 아닐까요?”
“···.”
테일러는 못 들은척하며 선반을 뒤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눈만 살짝 돌려서 앨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훔쳐봤다.
앨런은 눈을 감은 채로 이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바로 앞에 놓인 금속판 위에서는 거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상심이 너무 커서 이상행동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된 테일러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금속판에 찍힌 점들을 봤다.
앨런이 하도 별문자에 관해 설명해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점들이 그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별문자 같다.”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난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
앨런도 딱히 대답을 요구한 건 아니어서 지금까지 정리한 생각을 말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왠지 책꽂이의 배치가 익숙하긴 했어요. 하나하나를 별문자로 생각하면 해석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우리도 예전에 비슷한 방법으로 분석을 시도했는데 아무 소득 없었어.”
“그때도 수집가가 왔다 갔나요?”
“그건 아니지.”
“수집가는 미궁에 간섭할 방법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 층의 제약을 넘어서 흑마법을 사용했겠죠. 여기도 다르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앨런은 도서관 전체를 뛰어다니며 책꽂이의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기 시작했다. 강화외골격이 큰 도움이 되었다.
“도와줄까?”
“좀 비틀어졌네요. 2cm만 오른쪽으로요. 다시 왼쪽으로 1cm요. 이번엔 너무 조금 움직였어요.”
“그냥 가만히 있을게.”
오히려 테일러가 손을 떼니 더 빨랐다. 대략 두 시간의 작업을 끝낸 앨런이 그제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다음은?”
“따라오세요.”
앨런은 도서관 구석으로 향했다.
“책꽂이가 별문자라면 여기가 시작점이에요. 해석하면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예요.”
“흑마법사 새끼가 등불은 무슨···. 뭐, 변화는 없네.”
“아직 끝이 아니에요. 제 생각이 맞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친 앨런이 손바닥을 책꽂이 근처 바닥에 댔다. 마력 부여 특유의 빛이 번쩍이고, 잠시 정적.
두 번의 호흡이 끝나기 전에 미약한 진동이 발생했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새로운 통로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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