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유적(4)
불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아름답다.
마력을 제2의 불이라고 부를 만큼, 불은 사람의 삶과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옛날에는 얼마나 쓸모가 많았는지 신이 내려준 선물 혹은 신 그 자체로 여기기도 했다.
또한, 파괴와 정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테일러는 운동장 크기의 방을 뜨겁게 달구는 초대형 모닥불과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앨런을 번갈아 쳐다봤다.
‘방화범? 폭파광? 마법사가 됐으면 분명 화염 계열을 주로 사용했겠지.’
테일러는 앨런이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솔도스의 경제적 종속국인 랑카,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자랐고, 그 후에는 해적에게 붙잡혀서 팔리고, 이상한 놈에게 걸려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다면 거짓이리라. 평소에는 티를 안 내도 약간의 계기만 있으면 그동안 쌓아왔던 장작이 단숨에 타오를 수도 있었다.
‘무덤덤한 태도를 보여도 세상에 불만이 많겠지. 내가 잘 인도해야겠어. 착한 앨런이 수집가 같은 국제현상범이 되게 둘 순 없지.’
똑똑하고 재능도 출중한 앨런이 파괴자로 인생을 낭비하긴 너무 아까웠다. 문명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편이 훨씬 보람차고 성향에도 맞을 것이다.
‘마법공학자니 기왕이면 카탄 같은 위인이 돼야지.’
테일러가 남몰래 결심하는 그때, 앨런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려 부수거나 태우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유형화된 흑마력이 불과 빛에 정화되는 광경을 보며, 자연의 순수한 마력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그게 가능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아졌다. 상성을 분석해서 역으로 뒤집거나, 룬문자를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그리거나, 흐름을 읽어 적의 노림수를 파악하거나.
어쨌든 지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마지막 불거미가 화염에 몸을 던지는 순간에 일어나는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폈다.
‘흑마법은 불과 빛에 특히 취약함.’
원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눈앞에서 보니 확실히 달랐다. 막연히 아는 것과 경험의 차이는 그 정도로 컸다.
불거미가 사라지니 화염이 다시 줄어들고, 본능적인 적대심만 남은 흑마법사가 천천히 몸을 수복했다.
“저, 저, 저. 징그러운 새끼.”
앨런은 테일러의 꿍얼거림을 추임새 삼아 마탄을 조작했다. 원래는 마탄 발사기로 사출하는 과정에서 활성화하지만, 지금은 부서져서 손수 나서야 했다.
마탄을 꽉 쥐고 그려진 회로를 따라 마력을 주입했다.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을 붙인 것처럼 마력이 회로를 따라 움직였다.
상황을 보고 있던 테일러가 직접 던지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제가 할게요.”
“왜?”
“강화외골격이 있으니 투척도 문제없습니다.”
앨런은 테일러에게 건네려다가 직접 던졌다. 강화외골격의 힘이 더해져서 빠르게 날아간 마탄은 엉뚱한 곳에 착지했다.
카드를 날릴 때는 좁은 통로라서 대충해도 상관이 없었는데 여기는 넓은 방이라 문제가 많았다.
“큭큭···.”
테일러가 낮게 웃고, 앨런은 다음 마탄부터 군말 없이 건넸다.
신체 대부분을 매직웨어로 바꾼 노련한 탐험가는 투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대충 던지는 것 같아도 정확히 흑마법사의 몸에만 맞았다.
“머리, 가슴, 머리, 또 머리. 역시 녹슬지 않았어.”
마탄의 재고가 줄어들수록, 흑마법사의 덩치도 줄어들었다. 대략 50발 정도 던지자 놈의 재생력도 한계에 봉착했다.
정확히 말하면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기둥이 전부 녹아내려서 흑마력을 끌어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앨런은 눈으로 살피고도 확인 사살을 위해 10발을 더 건넸다. 그리고 화염과 연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바퀴벌레 같은 놈.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그래도 예전에 만났던 흑마법사보다 화력은 약했습니다. 대신에 재생력이 굉장했죠.”
“자기가 수집가의 제자라고 했던 놈? 그 새끼한테 제자가 어디 있어, 전부 노예지.”
마침내 해충을 불태웠던 열기가 가시고, 앨런과 테일러는 방 중앙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는 광선을 발사해도 멀쩡한 표범이 먼저 가서 재를 발로 건드렸다. 그 모습은 볼일 보고 흙으로 덮는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연속적인 폭발에도 석관은 멀쩡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니 그 안에 무언가가 있다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으리란 기대가 부풀어 올랐지만.
“깨끗하네요. 수집가가 철수하면서 챙겨갔나 봐요.”
“나가리네.”
석관은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텅 비어있었다.
앨런은 표범을 다그쳐서 재를 좀 더 조심스럽게 다루라고 명령했고, 테일러는 비스듬하게 열린 석관 뚜껑에 엉덩이를 걸쳤다.
“무언가를 찾은 걸까요? 아니면 만들고 있었다거나.”
“너도 비밀공장이나 위의 도서관을 경험했지? 미궁은 항상성을 띠고 있지만, 가끔 법칙을 위반한 장소도 있지. 내 생각엔 이곳도 마찬가지다. 석관을 아래를 잘 보면 먼지가 엄청 얇게 쌓여있지?”
앨런이 고개를 집어넣을 듯이 숙였다. 동시에 헤드 랜턴의 빛이 내부를 강하게 비췄다.
“뭔가 있었다면 그 형태를 피해서 먼지가 쌓였을 텐데, 자세히 보니 균일한 두께네요.”
“무언가를 꺼내 가긴 했는데, 시기상으로 수집가가 도착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몇 년? 혹은 몇십 년? 대충 그 정도는 지났겠지.”
“누굴까요?”
“브레이커와 몇몇 대기업이 이 유적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그들 중 하나겠지.”
“그것도 결국은 확률의 문제군요. 그들만 알고 있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이래서 악착같이 아래로 내려가려는 거야. 하강할수록 층은 계속 넓어지고 탐험가의 수도 점점 줄어드니, 새로운 발견을 할 가능성이 커지잖아. 가장 큰 이유는 이것 때문이겠지만.”
테일러가 검지와 엄지를 동글게 말며 징그럽게 웃었다. 가치 있는 지식일수록 비싼 법. 앨런이 어느 정도 동의하려는 순간, 표범이 다가와서 머리를 비볐다.
“애교도 부릴 줄 아냐?”
“무언가를 가져왔다는 신호입니다.”
앨런이 손을 내밀자, 표범이 입을 벌렸다. 조심스럽게 물고 있던 투명하고 동그란 수정이 툭 떨어졌다. 가운데에는 바늘이 무중력 상태처럼 둥둥 떠 있었다.
층에 출몰하는 괴물의 마석을 먹이다 보면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나침반이었다.
“두 번째 보는 물건이네요.”
“잘 됐다. 어차피 원시림으로 내려가면 필요한 물건이니 팔지 말고 가지고 있자.”
“흑마법사 때문에 이번 탐험은 적자가 날 뻔했는데 다행이에요. 저번에 보니 그거 하나에 2천만 코인이나 하더라고요.”
“나침반이 잘 나오는 편이긴 한데, 오파츠 중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리고 원시림을 왔다 갔다 할 실력자면 그 정도 돈은 조금만 빡세게 구르면 벌 수 있기도 하고.”
앨런은 나침반을 손에서 이리저리 굴리다가 테일러에게 물었다.
“이것 좀 보세요. 바늘이 미약하지만, 황금빛을 띠고 있어요. 저번에 오로스 교수님이 보여준 건 은색이었는데.”
“은색이 맞아. 황금색은 소문으로도 못 들어봤는데···.”
나침반을 건네받은 테일러가 헤드 랜턴의 빛을 비췄다. 자세히 살피니 금광이 약하게 번뜩였다.
“나도 네가 알려줘서 알았지, 대충 보면 모르겠다.”
테일러는 돌돌 굴러온 상자에게 나침반을 내밀었다. 입력된 대로 물건을 수납하려던 상자는 테일러가 손을 거두자 바로 멈췄다.
다시 내밀고, 상자는 접근하고. 테일러가 마치 반려동물과 놀아주는 모양새를 보이는 한편, 앨런은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에 본 풍경은···.’
석관 옆에 엎드린 흑마법사 그리고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기둥들. 어쩌면 흑마법사는 석관이 아니라 기둥에 절을 하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기둥은···.’
석관 밑과 옆에 살점을 붙이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기 전 감옥에서 봤던, 살덩이에 덮인 지하인과 묘하게 유사했다.
“석관이 지하인, 기둥이 살점.”
“뭐라고? 혼자만 알지 말고 나도 알아듣게 말해주겠니?”
“기둥이 석관을 덮은 모습이 마치 뿌리내린 나무와 비슷했어요. 마치 무언가를 흡수하려는 것처럼요.”
“털린 물건에 담긴 기운이 석관에도 묻어 있다고 생각했나?”
베테랑인 테일러는 바로 핵심을 짚었다. 경험이 워낙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상된 것이다.
“그 물건이 뭔지 모르지만, 오래 안치되어 있었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물건의 정체를 모른다는 점이 문제야. 그것만 알면 나침반의 역할도 바로 알 텐데.”
“혹시 유적을 찾을 수 있는 나침반이 아닐까요?”
“그럼 대박이지. 저 밑에 남들 모르는 꿀통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만 했는데, 벌써 침이 고이네.”
테일러는 요즘 묘하게 적극적이었다. 몸을 치료했을 때만 해도 속세에 초탈한 모습을 보였는데, 최근에는 혈기 넘치는 젊은이보다 더할 때도 있었다.
오히려 좋은 변화였다. 극한의 재활로 신경을 수복하는 환자처럼,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육체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테니까.
유적에서 얻은 전리품은 나침반 그리고 수집가가 남기고 간 실험도구.
“나침반이 아니었다면 탐험가 경력 처음으로 손해를 볼 뻔했네요.”
“아이고, 몇 달 했다고 벌써 경력이야. 이제 훈련소를 막 수료한 이등병이나 훈련병이나 똑같지.”
“군대는 안 가봐서 모르겠네요.”
“뒷다리 생긴 올챙이나 알 까고 나온 녀석이나 개구리한테는 똑같이 보인다고.”
테일러는 입매를 살짝 올리며 앞장섰다. 그 미소도 유적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자취를 감추고, 노련한 탐험가만 남았다.
요새는 조용했다. 앨런은 성벽 밑에 숨겨뒀던 정찰 거미를 가동, 내부를 관찰하게 했다. 테일러 역시 중계 거미의 케이블을 귀 뒤에 꽂았다.
성벽 위에 올라간 거미의 카메라 아이가 바삐 움직였다. 내부는 처음과 달리 어둡고, 지하인의 숫자도 굉장히 줄어들었다. 광장에서 계속 생성되던 지하인 중갑병도 사라졌다.
변화를 느낀 아이벡스 용병단이 아예 요새 내부로 들어와서 안쪽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미니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속성별 마법으로 건물 입구를 틀어막고, 앨런처럼 마탄 발사기를 사용해서 무너트렸다. 중갑병을 닮은 파워슈트를 입고 양 떼 속의 늑대처럼 굴기도 했다.
“화려하네요.”
“요새를 사냥터 삼아서 돈도 많이 벌었잖아. 탄약이나 무기를 가지고 복귀하면 귀찮으니 전부 소모할 생각인가 보다.”
“아까운데 왜 그러죠?”
“지들 돈이 아니라 회삿돈이라 가능한 거지. 그리고 저럴 때 아니면 언제 신나게 쏴 재끼겠어? 어이쿠, 드론이 이쪽으로 온다. 우리도 빨리 돌아가자.”
저렇게 망가진 요새도 미궁의 항상성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구된다. 적어도 한 달 안에는 지하인이 다시 저곳을 거닌다.
“그때도 내려올까요?”
“아닐 거다. 수집가 때문에 중갑병이 늘어나서 사냥터의 가치가 있었지, 내가 기억하는 요새라면 그렇게 빵빵 쏴대다가 적자만 본다.”
*
창고 구석, 오늘도 무언가를 매만지는 앨런.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며 살금살금 다가가서 소리쳤다.
“빅 뉴스! 빅 뉴스!”
“···이번에는 거짓말 아니죠?”
“미궁 내려가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끼니를 거르면 되겠어? 그만 내려놓고 식탁으로 가자.”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7시. 분명 점심 먹고 바로 앉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은 몰랐다.
“책은 또 언제 가져왔어? 밥 먹을 때는 밥에만 집중.”
“네.”
앨런은 테일러의 말대로 책을 상자 위에 얹었다. 소파 근처까지 돌돌 굴러간 녀석은 몸을 기울여서 책을 떨어트렸다.
발사믹 식초가 뿌려진 샐러드를 음미하고 있으니, 벌써 그릇을 비운 테일러가 말을 걸었다.
“뉴스 말인데.”
“일어나게 하려고 그냥 해본 말 아니었어요?”
“사람을 구라쟁이로 만들면 쓰나.”
테일러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앨런은 거짓이 뭔지도 모르는 순수한 청년이다. 어쨌든 밥을 먹으며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 모신교(母神敎)의 성직자들이 메이즈시티에 대거 자리를 잡는다고 하더구나.”
모신교는 예전에 카크다가 입원했던 병원을 운용하는 종교단체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이 마력의 일종이라고 샅샅이 파헤쳐져서 성직자가 아니라 치료 마법사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뒤에서 욕하는 탐험가조차 앞에서는 그들을 영입하고자 노력했다. 미궁에서 회복술이 지니는 의미는 추가적인 목숨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수는 적기에 영입 경쟁이 굉장히 험난했다. 성직자가 많았다면 제약 공방이 이토록 활성화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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