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3) >
무엇을 준비하든 시간이 걸린다. 그게 전투라면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까지 달려 있다면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핫산과 접촉 후 겨우 하루, 시온은 몸이 근질근질한지 자꾸 앨런을 보챘다.
“하자.”
“안 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고 있으니 참으세요.”
어릴 때부터 조직의 무력으로 키워진 사람이라 그런지 무기를 맞대는 일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다.
저 순수한 얼굴로 검을 휘두른다고 생각하니, 더 살벌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무나 썰고 다니진 않는다는 것. 테일러에게 확인받은 내용이니 사실이 맞았다.
어쨌든 안 되는 건 안 된다. 부딪쳤다가 위기에 몰리면 앨런 일행이야 몸을 뺄 수 있으나, 광부들은 불가능했으니까. 그러니 치밀한 설계가 필요했다.
“폭탄···.”
“안 한다니까요. 걱정이 너무 과해요. 아···.”
익숙한 단어가 들리기에 또 테일러인 줄 알았는데 시온이었다.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던 앨런은 다시 차분하게 설명했다.
“단번에 쓸어버리면 편한데, 제약이 있어요.”
“광부?”
“네, 만에 하나 마석이 반응해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면 끔찍한 결과로 돌아올 겁니다. 가공을 안 해서 반응성이 낮을 텐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마석은 안정된 상태여서 돌의 형태로 존재했다. 아니었으면 벌써 공기 중에 녹아버렸을 테니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앨런은 감은 왼쪽 눈으로는 거미를 조종하고, 뜬 오른쪽 눈으로는 마도구를 정비했다. 시무룩한 시온이 텐트 구석으로 가고, 시바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광부 형제님들이 들고 일어나도 우리가 바로 도와줄 형편이 안 될 텐데 괜찮겠습니까?”
“불만 표출은 한두 번이 아니겠죠. 그럴 때마다 전부 죽일 순 없으니, 노역 감시자는 주로 비살상 무기를 사용합니다.”
“살상 무기가 없지는 않다는 뜻이군요.”
“광산에 가끔 튀어나오는 지하인을 정리하려면 필요하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소란을 만들어서 광산 내부에 있는 병력을 캠프로 유인해야 합니다.”
“성공하면 붙잡힌 형제님들이 거병하기 쉽겠습니다.”
분위기도 중요한데, 그건 핫산을 중심으로 포섭한 광부 몇이 들고 일어나면 됐다.
처음에는 시큰둥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각인된 공포 때문에 숨죽이고 있거나.
그런데 곡괭이로 감독관이자 방어병력을 때려잡는다면? 억압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면?
당연히 생각은 달라지리라.
“곡괭이로 가능하겠습니까?”
“네, 채굴을 위해 [분쇄]가 새겨져 있더군요. 마석으로 출력을 일시적으로 높일 방법도 알려줬습니다. 금방 부서지겠지만 내부를 정리하긴 충분할 겁니다.”
“협조적인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그들에겐 선택지가 없습니다.”
앨런은 배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도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거기에서 평생 썩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망가지는 몸 상태 역시 결정을 부추겼을 터.
마침내 준비가 끝나고, 텐트를 나가기 전에 시바가 얼굴을 가리켰다.
“아, 그러고 보니 모습을 들켰는데 어떻게 합니까?”
“앨런은 마스크를 쓰고 있고, 표범은 처음부터 전리품처럼 수레에 숨겨놨지. 나야 이런 몸이니.”
테일러는 딱 봐도 개조를 많이 한 육체라 진짜 얼굴이라 믿지도 않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노인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전에 브레이커에서 일했거든. 설령 얼굴을 알아본다고 해도 그쪽에 항의하겠지.”
“그럼 저는요?”
“안타깝게 됐구만. 그래도 성직자니 모신교 윗선에 책임을 물을지언정 암살 시도는 안 하겠지.”
“형제님···.”
“장난이야, 장난. 긴장 좀 풀어. 이곳은 미궁이니까.”
테일러가 웃음기를 머금고, 시온이 앞으로 나섰다.
“맞아. 이곳은 미궁.”
단순한 지하가 아니라 다른 차원이기에 땅을 파서 도망칠 수도, 공간문을 열고 탈출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목격자가 없으면 돼.”
“그것도 좀···.”
딜레마에 고민하던 시바는 결국 텐트를 나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려는 마음이 제일 큰 까닭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살계에 손을 대야겠군요. 하산한 지 겨우 한 달, 이런 일을 접하게 되어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하루에 짐승 한 마리씩 잡아먹게 생겨서 무슨 소리야?”
“너무 하십니다. 테일러 형제님은 저의 순수한 눈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꼭 도살자처럼 생겨서는···. 부담스러우니까 치워.”
네 명 그리고 앨런 뒤를 바짝 쫓는 상자까지 합쳐서 다섯이 텐트 밖으로 나오니 주변을 돌아다니던 병력의 이목이 잠시 집중되었다.
마침 엘프 하나가 팔꿈치를 붙잡고 다가왔다.
“치료사님, 혹시 떠나십니까?”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있어서···. 환부가 어디입니까?”
“오토마톤을 주먹질로 처리해보려고 하다가 팔꿈치를 다쳤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엘프가 신장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으며 팔을 내밀었다. 시바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며 잠시 동작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부상이 심합니까?”
“순하게 생겨서 왜 이런 장소에서 근무하는지···. 역시 사람은 얼굴로 판단하면 안 되겠군요.”
“네?”
“그리고 주먹은 이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시바는 엘프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을 빼고 있던 엘프는 쉽게 끌려왔고, 마침 자세를 낮춘 상태라 턱도 때리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쩍!
시바의 팔이 흐릿해지며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닥에 털썩 쓰러진 엘프.
이곳을 지켜보던 몇몇은 벌어진 사태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렸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앨런의 말이 떨어지자 일행이 자세를 잡았다. 보란 듯이 소란을 일으킨 이유는 광부들을 위해서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리와.”
삑!
상자가 짧고 높은 소리를 내더니 몸통 중앙에서 길쭉한 포신을 뽑아냈다. 어차피 마탄을 담고 다니는 몸이라 이동형 마탄 발사기로 개조한 것이다.
앨런이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자마자, 몸 안에 품고 있던 마탄을 사방으로 분출했다.
퐁!퐁!퐁!
바람 빠지는 귀여운 소리와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캠프 사방에 떨어진 마탄이 불꽃을 피워올리고, 캠프 관리자의 텐트를 노린 마탄은 강력한 폭발로 지축을 흔들었다.
갑작스레 불어온 열풍과 붉은빛이 테일러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폭탄 안 쓴다며?”
“이건 마탄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니?”
“단어는 비슷한데, 서로 떠올린 뜻이 달랐나 봐요. 마탄은 상대적으로 좁은 살상반경 그리고 폭탄은 공터를 전부 날릴 위력으로 생각했어요.”
“···.”
테일러는 마탄을 쓱 쳐다보더니 다시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 증거로 관리자의 텐트 잔해가 들썩거렸다. 마나로 이루어진 날붙이가 천을 가르고, 그 안에서 관리자가 튀어나왔다.
약간의 그을음 말고는 멀쩡해 보이는 관리자가 이를 갈았다.
“습격? 내가 감시 똑바로 하라고 몇 번을···.”
그의 음성이 뚝 끊겼다. 부하들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니, 얼마 전에 받아줬던 탐험가 파티가 보였다.
딱 봐도 놈들이 범인이었다. 무기고 관리 소홀로 벌어진 사고여도 저들이 벌인 일이어야 했다. 문제가 발생한 이상 책임을 피할 수 없고, 부담을 줄이려면 희생양이 필요했으니까.
빠르게 판단을 마친 관리자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어디 소속이냐? 알브레? 엠엠코?”
전부 에너지기업으로 고갈 걱정 없는 마석광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경쟁자들이었다.
“분명 놈들의 동태는 주시하고 있었는데···. 해결사든 외부 용병이든 상관없다. 이게 있는 줄은 몰랐겠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부하들의 기세가 한풀 꺾인 상태였다. 그럴 때 든든한 아군이 등장한다면 금이 생긴 전의도 쉽게 아물었다.
관리자의 눈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근처 천막이 들썩거렸다. 그 안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쿵!쿵!
발을 디딜 때마다 공터의 바닥과 천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천막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나타난 존재는 사족 보행 전차였다.
“일어나라. DT!”
전차의 정확한 명칭은 DT-10. DT는 드래곤 터틀의 약자, 10은 열 번째 버전이라는 뜻이었다. 방어 능력도 좋아서 전쟁터에서는 소형 요새라고 부르기도 했다.
용의 머리에 거북이의 등딱지를 매단 녀석이 사납게 생긴 머리로 앨런을 노려봤다. 동시에 등의 기관포가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공기가 밀리며 먼지가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얍.”
시온이 앨런의 앞을 막아섰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검에는 오러가 맺혀있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포탄이 눈앞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의 검이 수직으로 내려왔다.
잘린 포탄은 시온을 중심으로 양방향으로 튀어 나가서 애꿎은 캠프 방벽만 두들겼다. 폭발로 인해 발생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었다.
“내가 처리해?”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앨런의 오른쪽 눈이 전장을 보고 있다면, 왼쪽 눈은 복잡한 기계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찰 거미가 DT-10의 몸속에 침투해 있었다.
DT-10의 막강한 방어력과 화력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만큼 마력을 소모하기에 동시에 가동할 수는 없는 법. 거미는 마력포 발사로 방어막이 잠시 사라진 순간, 내부로 침투했다.
‘관리자의 명령에 반응한 부품이 신호 수신기겠지.’
니퍼를 닮은 주둥이로 케이블 하나를 뽑아내고, 꽁무니의 연결 단자를 단숨에 꽂아 넣었다.
언제나 내부의 적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앨런 일행이 캠프 안으로 들어와서 방어 결계도 무용지물로 변한 것처럼.
앨런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분명 캠프에 서 있었는데, 순식간에 정체 모를 미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벽은 고개를 위로 꺾어야 할 만큼 높았다.
해커 때문에 방화벽에는 이처럼 환상 마법이 첨가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방화벽을 뚫으면 해커의 승리, 아니라면 타격을 입거나 심하면 정신이 망가진다.
‘출구를 찾으면 끝나는 종류겠지.’
물론 수호자가 있을 테니 편하고 느긋하게 탐색할 수 없다.
카득카득!
괴이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축구공을 닮은 괴물이 이빨 가득한 입을 딱딱 부딪치며 접근하고 있었다. 먹히면 정신이 잘근잘근 씹히리라.
괴물에게 앨런은 한 입 거리보다 작았다.
그러나 앨런은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예전이라면 발에 불이 나게 뛰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마에 뚜렷한 원이 생긴다. 왼쪽 눈을 중심으로 찌그러진 원이 나타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오른쪽 눈을 중심으로도 흐릿한 원이 그려졌다.
테일러는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앨런에게 필요한 시간은 겨우 한 달 남짓. 단순하게 계산하면 무려 20배나 빠른 속도였다.
괴물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동그란 몸을 아래로 살짝 기울이며 앨런의 몸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삼원이 빛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밝은 부위는 원들이 겹치는 미간이었다.
그 빛들은 괴물의 몸을 뚫고 사방으로 뛰쳐나갔고, 앨런의 정신을 삼킨 괴물은 뻥 터졌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콰직!
갑자기 거대한 워커가 나타나서 미로를 짓밟았다. 발의 주인은 어느새 거대해진 앨런.
쿵!
큰 소리와 함께 앨런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에서 흐른 시간은 기껏해야 5초 남짓, 주저앉은 DT-10은 잠을 자는 동물처럼 미동이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관리자가 심상치 않은 소리에 뒤를 슬쩍 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분명 방화벽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가장 큰 문제가 남아있었으니, 마력포를 검으로 가른 여인이었다.
‘왜 하필 내 차례에 저런 사람이···. 다른 셋보다 여성 하나가 제일 문제다.’
근무를 짠 윗선을 욕하고, 저런 검사를 내려준 하늘을 욕하던 그때.
공터와 이어진 통로, 저 멀리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지 통로 전체가 둔중하게 울리기도 했다.
관리자의 안색이 다시 밝아졌다.
“하하하! 때를 잘못 골랐구나!”
< 광산(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