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5) >
앨런은 시온을 따라 통로로 들어갔다. 캠프가 있는 공터와 달리 검은 안개가 다시 짙어졌는데, 그 광경이 오히려 공터보다 익숙했다.
헤드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자 안개가 물러나고 동굴 특유의 거칠거칠하고 울퉁불퉁한 벽이 보였다.
어떤 장소에 도착한 시온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몸을 돌렸다.
“자, 여기야.”
“깨끗한데요.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아, 맞다···.”
시온이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궁은 근처에 탐험가가 없으면 외부 물질이나 괴물의 시체를 흡수한다. 그 과정까지 30분~1시간이 걸리니, 적어도 30분은 지났다는 의미였다.
다르게 말하면, 앨런이 캠프에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시온은 벌써 지원병력을 정리했다는 뜻이었다.
테일러가 그걸 보며 히죽 웃었다.
“내가 말했지? 검술 말고는 폐급이라고.”
“···.”
시온은 반박하지 않았으나, 살짝 튀어나온 입술이 불만족스러움을 잘 표현해줬다. 괜히 발끝으로 살짝 튀어나온 돌부리를 걷어차기도 했다.
이곳에서 벌어졌을 전투를 상상하고, 얼마나 빨리 끝났을지 대충 계산한 앨런이 입을 열었다.
“강하군요.”
“훗.”
“저, 어깨 올라가는 모습 봐라. 제이크나 프랑수아가 평소에 우쭈쭈 안 해주데?”
테일러의 물음에 시온이 뾰족한 눈으로 힐긋 쳐다봤다.
“고래도 칭찬을 춤추게 해.”
“그게 무슨 말이야? 순서가 바뀐 것 같은데.”
“잠깐 올라갔다가 돌아올게.”
가만히 서 있던 시온의 몸이 길게 늘어졌다. 잔상이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전력 질주한 것이다.
앨런의 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속도였다. 시온이 사라진 자리와 경로를 한참 동안 보고 있으니 테일러가 물었다.
“부럽냐?”
“뭐가요?”
“시온이 쌓아온 무력 그리고 빛나는 재능이.”
“아뇨. 어떻게 하면 저런 움직임을 재현할 수 있는지 룬문자와 회로 마법으로 상상하고 있었어요.”
“그럼 됐고.”
앨런과 테일러는 캠프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까와 달리 급할 필요가 없었다. 테일러가 다시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시온은 너랑 나이가 같아.”
“오···. 더 대단하네요.”
“그게 감탄할 부분이야?”
“18살에 저 정도면 엄청 뛰어나단 뜻이잖아요. 브레이커의 최상위 유망주겠네요. 마셜 회장님이 전력으로 키우는 요원일까요?”
“어쨌든 내가 하려던 말이 뭐냐면, 시온은 걸음마 할 때부터 검을 잡았고, 8살에 미궁을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는 거였다. 너보다 훨씬 긴 세월을, 잘 깔린 레일에서 내달렸으니까. 지금 보니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지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저 멀리 캠프의 장벽이 보이니 테일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제일 신기해.”
“왜요?”
“그런 게 있어.”
앨런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쏘아대도, 테일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메이즈시티는 불구덩이다. 천재라고 적힌 씨앗도 보호자가 없으면 금방 타버리거나, 그곳에 적응한 괴물들에게 먹혔다.
그런데 혼자서 무섭게 자라나는 씨앗이 있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정착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으나,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봐도 싹이 대충 보였다.
그렇다고 보호자가 있어서 살아남았다기엔, 테일러 스스로가 보호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료 혹은 선배면 모를까. 사실 처음에는 약간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시 캠프로 돌아오니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미궁에 있으면서도 묘하게 법칙을 벗어난 장소. 광부들은 캠프 중앙에 모여서 보급품으로 음식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어느새 깨어나서 그 틈에 어울리던 시바가 앨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제님들이 오셨군요. 눈을 떴는데 안 보여서 걱정했습니다.”
“아까 지원병력이 있던 장소를 확인하고 왔습니다.”
“걱정은 무슨.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컵은 뭔데?”
테일러의 말에 시바가 잔을 살짝 흔들었다.
“이건 상처 소독용 술입니다. 일단 병을 열었는데 아뿔싸. 상처는 저의 성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독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서 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 위장에 버리는···.”
“저놈의 혓바닥. 변명도 궁색해서는.”
“그럼 다음에는 다른 레퍼토리를 준비하겠습니다.”
시바는 능청을 한껏 부리다가 다시 광부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잠깐 구경하다가 앨런을 불렀다.
“일단 캠프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하자. 시온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이미 켰습니다.”
“어···, 그래.”
푸른 물결이 장벽을 덮었다가 사라졌다. 평소에는 절약 상태로 있다가 누군가가 접근하거나 충격이 전해지면 방어막을 펼치는 구조였다.
이래서 내부의 적이 무섭다. 밖에서 들이박았으면 아직도 방어막이나 깨고 있을 텐데, 위장 잠입한 결과, 벌써 안쪽을 정리했으니까.
“벌써 지겹네. 그냥 시온 따라서 같이 올라갈 걸 그랬나?”
“위험하잖아요.”
“너도 시온 따라 하니? 그래, 광부들이 위험하지.”
광부 100명이 함께 올라가면 통제하기 힘들고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캠프의 방어시설을 되살렸으니, 시온이 사람들을 데려오기까지의 며칠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실험을 위해 보낸 호송대는 시온이 치웠고, 다음 마석 수송대도 오려면 멀었으니 의외의 사태만 아니라면 여기 머무는 편이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전리품도 확인해야 하고요.”
“너도 훌륭한 탐험가가 다 됐네. 탐욕이 참 보기 좋다.”
“처음부터이랬는데요.”
“아님 말고.”
동물을 본떠 만든 오토마톤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드래곤터틀을 닮은 DT-10을 조사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 외에 할 일이 많기도 했고.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곳은 록하트가 사업권을 따낸 광산이기에 당연했다.
시온이 사라지고 5일째. 그녀는 일단의 무리와 함께 장벽 너머에서 나타났다. 그중에는 앨런이 만나본 사람도 있었다.
오마르, 양아치처럼 껄렁거리는 마법사가 테일러를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야. 안 죽고 살아 있었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싸가지 없는 새끼. 죽긴 누가 죽어? 주둥아리를 돌바닥에 더 갈았어야 했는데.”
“지금은 못 하겠쥬? 오랜만에 구수한 입담 들으니 좋네. 노망났다고 알았는데 아니었나.”
“···.”
테일러는 앨런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오마르도 특별한 용건은 없었는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쟤랑 이야기하면 나만 피곤해. 그냥 무시가 답이다.”
“오마르 씨도 가르치셨나요?”
“그때도 지금이랑 똑같았지. 훈련소에 있는···.”
테일러의 입술이 오랜만에 발동한 금제로 인해 강제로 닫혔다. 요원을 기르는 훈련소는 충분히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테일러는 재채기하려다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찝찝해도 어쩌겠는가, 말을 못 하는데.
브레이커 말고 다른 조직의 사람들도 꽤 있었다. 복장이 달라서 구분은 명확했으나, 누가 어디 소속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느새 다가온 시온이 앨런의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저긴 시청 감찰관.”
“저쪽 사람은요.”
“나도 몰라.”
테일러가 웃으며 한마디 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시온이 선수를 쳤다.
“실험실 구경 갈래?”
“빨리 가죠.”
앨런은 마석보다는 연구 결과에 관심이 많았다. 시온이 없는 동안 들어가려고 했는데, 방비가 철저하고, 연구자들이 데이터로 협박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광산 내부에 숨겨진 실험실에도 사람들이 붐볐다. 입구를 막고 있던 남자 하나가 앨런의 앞을 막았다.
“탐험가? 어디 소속이고, 들어오려는 이유는 뭐지?”
“그럴 자격 있어.”
“네, 알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시온의 한마디에 말투와 태도가 휙휙 바뀌는 걸 보면 브레이커 소속이 분명했다.
농성하던 연구자들은 굉장히 협조적이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형량, 참작 등의 단어가 들려왔다. 사법 거래가 분명했다.
말 그대로 실험실 구경은 구경이었다. 마력 케이블이나 컴퓨터의 기억수정을 살펴보려고 하면 따가운 눈빛이 날아왔다.
시온도 거기까지는 어떻게 못 해주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 좋은 정보 있으면 나중에 알려줄게.”
연구실을 보면 두드러기가 생긴다고 한사코 거절했던 테일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였다.
“록하트의 이름이 걸려있지만, 온전히 록하트의 소유가 아니니까. 마석 광산이라는 거대한 먹거리를 정말로 기업 하나가 독점할 수 있을까?”
“지분이 나뉘어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눈에 띄는 전리품은 챙기지 말라고 했던 거고요.”
여기는 야생이 아니라 문명사회였다. 적자생존, 강자독식은 여전히 통용되지만, 그걸 주장하려면 걸맞은 힘이 있어야 했다.
그린블러드처럼 갱단이라면 몰라도, 이번 전투의 전리품을 몽땅 꿀꺽하기에는 앨런의 덩치가 너무 작았다. 기업이 너무 커다란 이유도 있고.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니 설명하기 참 편해. 그냥 우리는 브레이커의 의뢰를 받고 활동했다고 생각해라.”
“굉장히 아쉽네요.”
“아직은 기업의 입김, 아니지 우리에겐 태풍이겠지. 그걸 버틸만한 능력이 없다.”
“언제쯤 되면 입김으로 느껴질까요?”
“적어도 심도 6에는 도달해야겠지. 그때라면 눈치 볼 필요 없이 기업에 당당히 요구할 수 있을 거다.”
광부들을 지상으로 데려갈 병력이 왔으니, 이젠 앨런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올라갈 준비를 마치고 텐트를 나서려는 순간, 시온이 안으로 쏙 들어와서 무언가를 품에 안겨줬다.
“이건···.”
“거북이의 마력로랑 영혼석. 내가 잡았다고 했어.”
“고맙습···.”
앨런이 감사 인사를 전하기 전에 시온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몰래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테일러가 DT-10의 마력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시온이 자기 거라고 요구했나 본데. 덕분에 횡재했다.”
“굳이 챙겨줄 필요는 없었는데.”
“줄 때 받아야지. 사람이 너무 욕심 없어도 보기 안 좋다.”
앨런은 말없이 수레를 가리켰다. 테일러가 오토마톤의 외장갑을 걷어내니, 안에는 마석이 가득했다.
“설마?”
근처에 서 있는 상자의 서랍을 여니, 그 안에도 마석이 꽉꽉 눌러 담아져 있었다.
“알뜰하게도 모았네. 이게 도대체 얼마야?”
앨런은 어깨만 으쓱거렸다. 노박 클리닉을 탈출하고자 부품을 조금씩 긁어모은 경험을 살린 것이다.
“빼돌리기 전문가가 여기에 있었네. 혹시 내 몸의 매직웨어도 원가절감 했니?”
“···.”
“불안하게 왜 대답을 안 해? 저기, 앨런?”
테일러가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고, 앨런의 마스크 안쪽에 숨어있는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
광부들은 무사히 지상에 도착했다. 그들이 병원으로 가기 전, 앨런은 핫산을 찾아갔다.
“압둘 씨가 예전에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내 아들 녀석이 미궁 근처에서 기웃거리면 제발 두들겨 패서 설득 좀 해주게.”
“어···. 지금 맞으면 죽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앨런은 주먹을 내질렀다. 어설픈 잽이었지만, 강화외골격 덕분에 충분한 타격이 핫산의 코를 강타했다.
“으악!”
시바가 코피를 줄줄 흘리는 핫산을 치료해줬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였다. 인중이 새빨갛게 변한 핫산은 그래도 좋은지 웃으며 구급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앨런, 테일러, 시바. 함께 걷던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멈춰 섰다.
“이젠 헤어질 시간이군요. 테일러 형제님, 질문이 있습니다. 정말 선의로 광산 조사에 따라오셨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쟁이지. 우리는 미궁 깊은 곳을 노리고 있고, 그러려면 함께할 성직자가 필요해.”
“잘 보이려고 그랬다는 뜻입니까?”
시바의 질문에 앨런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이쪽에서 보고 판단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정말 함께할 만한 사람인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성직자라고 모두 선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모신교의 신성력은 특수한 마력수련법으로 인한 마력의 성질 변화다. 성장에는 적성과 노력만 필요할 뿐, 인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잘 받았기에 선인의 비중이 높긴 하지만, 모신교도 결국 사람의 모임이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기 위한 평가하고 생각해주세요.”
“서로가 서로를···. 오만했군요. 성직자는 누구나 원하기에 제가 면접관인 줄 알았습니다. 맞습니다. 역경을 함께 헤쳐나가는 동료 사이에 실력의 차이는 있어도 지위의 우열은 없죠.”
테일러가 앨런을 보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미궁에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들을 정화할 사명이 있습니다. 기왕이면 형제님들과 함께하고 싶군요.”
테일러가 시바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시온과 함께 있던 걸 보면 브레이커에 들어가려는 생각 아니었나?”
“대사제님의 권유 때문에 잠깐 함께했을 뿐, 강제성은 없습니다.”
“기업에 소속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겠지.”
“맞습니다. 기업 사이에는 분쟁이 활발하니까요. 형제님들은 소속이 없으니 사건에 덜 휘말리겠죠.”
< 광산(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