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위병(1) >
앨런이 알뜰하게 챙겨온 마석은 생각보다 거금이 되었고, 덕분에 원래 거주지에서 더 큰 건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보금자리도 창고였다. 넓고, 장비 들여놓기 좋고, 막 다뤄도 괜찮고. 마법공학을 연마하는 앨런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치안도 그나마 괜찮은 동네라 값 좀 나가는 마법공학용 장비를 들여놨다. 그 이름은 룬프린트. 룬펜보다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룬문자나 회로 마법을 그릴 수 있는 장비였다.
룬문자가 방출하는 마력장 간섭만 해결할 능력이 된다면, 같은 면적에 몇 배나 많은 룬문자를 그릴 수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크기 때문에 휴대할 수 없어서, 창고에 두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장점이 워낙 커서 단점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다음 이득은 새로운 지식의 획득. 별문자 입문서, 초급 해석본을 닳도록 보던 앨런은 드디어 새로운 책을 손에 넣었다.
테일러는 앨런에게 맡긴 의수가 실시간으로 분해되는 모습을 보다가, 근처에 놓인 책 표지를 힐끔 쳐다봤다.
“‘별문자 중급 해석본1’. 뒤에 붙어있는 숫자는 뭐니?”
“당연히 1권이란 뜻이죠.”
“1천만 코인짜리 책이? 몇 권까지 있는데?”
“10권이요.”
“이런 ㅆ···. 네가 아니라 출판사에게 욕한 거다. 알지? 무슨 책이 그리 비싸? 차라리 중고 서적을 사지.”
테일러도 하는 생각을 앨런이 안 해봤을까.
“애초에 중고가가 높게 책정되어 있어요. 새로운 이론이 정립되면 개정판이 나와서 내용이 조금씩 바뀌기도 하니, 그냥 새 제품으로 샀어요. 그리고 중고 서적에 장난쳐놨으면 확인할 방법도 없고요.”
단적인 예를 들면, 별문자는 각도나 위치가 조금만 틀어져도 상징하는 의미가 바뀐다. 그래서 어려운 학문이기도 하고.
어쨌든 책을 샀는데 누가 손을 댔다면? ‘보호’를 뜻하는 별문자를 ‘공격’으로 바꿔놨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중의적인 의미로 혼동을 준다면?
“어차피 앨런, 너라면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니? 그냥 신품이 좋다고 해라.”
“그런 이유도 있어요. 어릴 때 쓰레기장을 뒤지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온전한 나의 물건을 가지고 싶다고. 그리고 책의 가격도 합당하다고 생각해요.”
마법공학은 일반인도 마법을 다루게 만드는 학문이다. 신비가 시작과 끝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식 중 하나기에 고가는 어느 정도 참작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살 사람은 아무리 비싸도 산다. 특히 앨런처럼 탐구욕이 강하다면.
테일러는 앨런의 진지한 모습에 흐뭇해하다가도, 벽돌보다 두꺼운 책을 보며 진저리치기도 했다.
“넌 라면보다 책이 좋지?”
“당연한 말을 너무 당연하게 하시네요.”
“걱정이다.”
“뭐가요?”
“나중에 애인이랑 데이트할 때 마법공학 지식 늘어놓을까 봐. 가로등이 정말 예쁘네요. 그렇죠? 저 가로등은 이번에 어디 어디 회사에서 나온 물건인데 기존의 회로를 덜어내고 대신 [발광]을 중첩해서···.”
“그럴싸하네요.”
“아니. 이러면 안 된다는 예를 설명한 거잖니.”
다음 탐험 준비는 순조로웠다. 테일러의 매직웨어를 점검하고, 마탄을 제조하고, 경호원이자 전위인 표범을 강화했다.
소파에 반쯤 누워있던 시바는 앨런의 작업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앨런 형제님은 쉽게 쉽게 내려가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각고의 노력이 그 안에 녹아있었군요. 역시 세상은 단면만 봐서는 전부를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멋지고 신기합니다.”
“나는 네가 여기 있는 게 더 미스터리하다. 모신교 성직자들이 모여 사는 좋은 집 놔두고, 왜 여기에 눌러앉았냐? 심지어 부유한 지역이라 살기도 좋을 텐데.”
의수를 다시 착용한 테일러의 핀잔에 시바가 웃었다.
“몸이 너무 편하면 정신 또한 그 안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적당한 고행은 수련에 도움이 되죠.”
“그만큼 여기 환경이 안 좋다는 뜻?”
“또 곡해하시는군요. 그냥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어머님의 품 안에만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그 병이나 놓고 말해.”
“성수가 어때서요? 투명하고 맑고 영롱한 색채가 안 보이십니까?”
“라벨만 떼면 모를 줄 알아? 나도 좀 줘라. 냉장고에 있지?”
테일러는 냉장고까지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라벨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리병이 그 안에 가득했다.
언제 말싸움을 했냐는 듯, 둘은 유리병을 살짝 부딪치고 병을 기울였다. 테일러는 소파에 엉덩이를 묻고, TV를 틀었다.
테일러의 인공 안구가 보내는 신호에 맞춰 바뀌던 채널이 고정되었다. 무뚝뚝하게 생긴 아나운서가 뉴스를 보도하는 중이었다.
[미궁에서 벌어진 마석 광산 사태에 대해 저번에 말씀드렸는데요.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에 분노한 시 정부가 드디어 칼을 들었습니다. 한편, 록하트 측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미궁에서 벌어진 사건은 개인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벌였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미 사건을 주도한 이사를 구속했고, 언제든지 넘길 준비가 됐다는···.]
뉴스를 보던 테일러가 혀를 찼다.
“개인의 일탈? 발표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벌써 꼬리 자르기 시작하는 것 같네.”
“그래도 시 정부가 나섰다니 믿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말했잖아. 지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니까. 사실 록하트는 그냥 얼굴마담이야. 보아하니 이사 하나 처리하고, 이곳저곳에 돈 좀 먹여서 무마하겠지. 항상 그래서 놀랍지도 않다.”
앨런은 표범을 정비하다가 떠드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집중하는데 너무 하시네요. 집 옮기면서 거실도 나름 갖췄는데 왜 공방에 와서 떠드세요?”
표범이 일어나더니 앨런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비볐다. 테일러와 시바를 보고 이를 드러내기도 했다.
“감정이 풍부해졌다?”
“그건 아니고, 이번에 산 책에 적힌 내용대로 행동 패턴을 다양화했어요. 쓸모없는 기능이라고 생각했는데 괜찮네요. 더 발전시키면 전투 상황 변화에 따라 조건부 판단도 가능해지겠죠. 나중에는 자율 판단,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 내리는 강 인공지능이 목표긴 합니다. 기왕이면 외장갑도 최상급으로 달아주고 싶은데 아직 그럴 여유는 없···.”
달칵!
갑자기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창고가 조용해졌다. 뒹굴뒹굴하던 시바, 냉장고에서 성수를 꺼내던 테일러 둘 다 사라졌다.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고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
“이번이 두 번째인데, 탐험가가 정말 많습니다.”
“어휴, 촌놈.”
테일러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시바는 구경에 집중했다. 가끔 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만물의 어머니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네.”
“사정이 있으니 미궁에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상에서는 일을 찾기 힘드니, 그 대안으로 미궁을 선택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게 맞아. 미궁 일은 위험하고, 애들은 어른 짐꾼의 반절만 받아. 그래도 며칠은 넉넉히 먹을 수 있으니 이곳을 찾지. 여기에 올 정도면 이미 알 것 다 아는 애들이라 사실 성인이나 마찬가지야.”
“그건 좀···.”
“고블린이랑 비교하면 어때?”
“오히려 저 애들이 강할 것 같군요.”
미궁의 문을 통과하며 발생한 기묘한 느낌에 수레에 앉아있던 앨런이 고개를 들었다. 작업을 마친 마탄을 따라오는 상자에 수납하고,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근위병을 처치하고 원시림을 살짝 구경하는 겁니다.”
목표의 되새김. 이때만큼은 테일러와 시바도 진지하게 들었다.
“잠깐 발을 디뎠다고 도달계층이 바뀌진 않겠지만, 반복하면 입장 줄도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다. 지금은 입장에만 몇 시간 걸리는데, 줄을 바꾸면 확 단축할 수 있었다.
묘하게 습하고, 쇠 비린내 나고, 기름 냄새까지 섞인 미로의 공기를 만끽하던 시바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매번 내려가려면 귀찮겠군요. 미궁에서 통용되는 공간문은 없습니까?”
“현실 세계와 미궁이 다른 차원이듯, 미궁의 층과 층도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평범한 공간 주머니는 미궁에서 무용지물인데, 오파츠는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공간문을 여는 오파츠도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있으면 벌써 널리 알려졌겠지. 미궁 탐험 역사가 백 년이 넘어가는데. 뭐, 더 깊은 곳에는 있을 수도 있지만.”
평소와 같이 작업장이 차려진 1~3층은 전투 없이 빠르게 지나갈 수 있었다. 4층에 발을 디딘 시바는 갑자기 텅 빈 미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한 층인데 차이가 심합니다.”
“이래서 초짜들은···. 앨런.”
“1~3층에서는 오토마톤이 튀어나오는 맨홀의 위치가 고정되어있습니다. 4층부터는 무작위로 변하고요. 등장하는 적들이 강해지기도 해서 효율이 떨어집니다.”
“아, 저기에 맨홀···.”
시바가 천장을 가리켰다. 맨홀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암석 속으로 파고들었다.
시바는 돌이 푸딩처럼 갈라졌다가 붙는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다시 봐도 신기하군요. 게다가 사람을 속이기까지···. 미궁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말도 틀리진 않아 보입니다.”
다음 맨홀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오토마톤은 사슴 두 기. 칼날 같은 뿔을 회전시켜서 탐험가의 살점을 갈아버리는 놈들이었다.
시바가 괴물의 영혼을 해방해주겠다고 나서려 했지만, 앨런이 말렸다.
“저건 이 아이가 처리하게 놔두세요.”
“표범은···.”
표범을 보려던 시바는 앨런의 손가락이 돌돌 따라오는 상자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외형이?”
그제야 상자의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럼통 정도 되던 몸체가 더 커지고, 가장 위에는 게 눈처럼 생긴 카메라도 달려있었다.
앨런의 부름을 받은 상자는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달려오는 사슴에게 고정했다. 카메라가 붉게 변하고, 몸통 중간이 열리더니 발사기가 삐죽 튀어나왔다.
퐁!
한 번의 발사음과 한 번의 폭발. 사슴들은 접근조차 못 하고 폭사했다.
근처까지 돌돌 굴러간 상자는 이번에는 기계 팔을 꺼냈다. 집게발을 연상케 하는 팔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슴을 해체하고, 전리품을 수거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수거까지 자동화하려고? 지금 보니 집게랑 똑같이 생겼네.”
“영감을 얻었죠. 그래도 수거가 정밀하진 않아서, 수문장 같은 적을 쓰러트리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그래도 귀찮음을 꽤 덜었다고 좋아하는 테일러와 달리 시바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앨런 형제님.”
“네. 말하세요.”
“테일러 형제님은 그나마 샷건이라도 있지만, 저는 근접으로만 적을 처치합니다. 혹시 마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런 일 없게 잘 조절할 겁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안심하는 시바의 귀에 앨런의 목소리가 추가로 꽂혔다.
“설령 폭발 범위에 휩쓸려도 크게 다치진 않을 거란 계산도 있습니다.”
“네?”
“저번에 광산에서 보니까 엄청 튼튼하시던데요. 마탄을 정면으로 맞았는데 기절만 하시고.”
“설마, 그 마탄의 주인이 앨런 형제님이었습니까?”
“제가 만들긴 했는데, 발사한 마탄을 관리자가 쳐냈으니 소유권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죠. 축구도 마지막에 터치한 사람의 득점이잖아요.”
“···.”
어머니를 향해 기도를 올린 시바는 수레를 뒤지며 성수를 찾았다.
앨런과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찾는다고 했는데, 저건 가요?”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네가 잘못했어.”
“위력이 문제였을까요?”
“그게 아냐···.”
< 근위병(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