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74화 (74/193)

< 근위병(2) >

길잡이 역할을 맡은 테일러 덕분에 여정은 순조로웠다. 수십 년 경력을 자랑하듯 최단 경로와 휴식 시간을 선정해서 쭉쭉 나아갔다.

다만, 시온과 달리 기감이 약하기에 적들을 마주치는 빈도는 좀 높았다. 사실 이게 정상이었다.

테일러는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싸워야 돈을 벌지. 내 말이 틀려?”

“형제님. 뻔뻔하면서도 맞는 말입니다.”

“그것보다 가장 중요한 게 있어. 바로 합 맞추기. 광산 캠프에서 함께 싸우긴 했는데 그거론 한참 부족해. 마탄 팀킬이 왜 발생했겠어?”

“팀킬이라뇨? 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어쨌든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각자의 능력, 의도, 버릇을 알면 삐걱대는 부분도 사라질 겁니다.”

앨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화력은 충만한데 오인사격 때문에 망설이기만 하면 무슨 쓸모겠는가.

다른 방법도 있긴 했다. 마탄을 굳이 난전에 사용하지 않고 항공기 공습처럼 선제타격에 사용하거나, 특수한 효과를 지닌 마탄을 장전하거나.

[침투], [혼란], [차단]의 룬문자가 새겨진 무효화 마탄이 그런 종류였다. 범위 폭발 대신 마나 펄스를 방출해서 오토마톤 자체를 무력화했다.

나중에 사람과 싸울 일이 있어도 유용한 마탄이었다. 마도구를 침묵시키거나, 허공에 새겨지는 마법에 간섭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폭발의 방향을 정해주거나.’

그러려면 룬문자를 더 새겨야 해서 아직은 무리였다. 다른 룬문자를 빼도 되지만, 그러면 위력이 낮아지니까.

사실 시바는 몇 대 맞아도 상관없긴 했다. 드워프의 선천적인 육체 특성과 성법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래도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 가슴 아파할 테니 앨런은 그냥 조용히 있었다. 전의 말실수는 여러 생각을 동시에 하다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니까.

‘앞으로 대화할 때는 수식 계산은 하지 말자.’

그런 결심을 하며 도착한 10층. 이번에도 수문장을 못 만나고 내려가나 싶었는데, 갑자기 유독 커다란 맨홀이 툭 튀어나왔다.

“수문장입니다.”

“경쟁 상대가 많아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군요. 또 다른 영혼을 어머님 곁으로 보낼 기회입니다.”

앨런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시바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저 혼자 나서도 될까요?”

“혼자서요?”

시바의 눈동자가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법공학자가 전면에 나서서 뭐 하려고?’라는 생각이 엿보이는 몸짓이었다.

“제가 아니라 이 아이가 상대할 겁니다.”

앨런의 손짓에 표범이 앞으로 움직였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며 팔짱을 꼈다.

“예전부터 붙여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마침 기회가 생겼구나. 잘됐네.”

테일러가 아예 손을 떼니, 엉거주춤하던 시바도 자세를 풀었다.

그 사이 표범은 몸을 낮추고 수문장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위에서 찍어오는 망치를 유연하게 피하며 수문장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카드득!

[예리]한 발톱이 무릎 안쪽의 외장갑을 파고들었다. 장갑이 워낙 두꺼워서 인공 근육이나 파이프 등을 단번에 끊어내진 못했다.

수문장이 허리를 숙이며 손으로 표범의 몸통을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손아귀에는 공기만 남고, 뒤로 완전히 빠져나간 표범은 수문장의 등에 매달렸다.

기이잉! 드드득!

드릴 송곳니가 목덜미를 단숨에 파고들었다. 생명체였다면 벌써 대량의 피를 뿜었을 테지만, 수문장은 고통을 모르는 오토마톤.

망치를 아예 내려놓고 등 뒤로 두 손을 움직였다. 외장갑에 송곳니가 박힌 표범은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수문장의 양손에 붙잡혔다.

수문장은 표범을 벽에 강하게 내동댕이쳤다. 암석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통로를 요란하게 울렸다.

표범을 던짐과 동시에 수문장이 어깨를 앞세워서 돌진했다. 이제 막 몸을 일으킨 표범을 거대한 덩치가 덮쳤다.

콰앙!

그야말로 폭탄이 터진듯한 위력. 자잘한 돌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린 시바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오. 흥미진진합니다.”

“명색이 성직자가 전투를 보고 좋아해도 되는 거야?”

“그냥 오토마톤이잖습니까. 그리고 기계 괴수들의 혈전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메이즈시티에서도 저런 식으로 싸움을 붙이는 정식 도박판이 있긴 하지. TV 중계도 해줄 정도로 유명하다고. 물론 경마가 제일 재밌긴 하지만.”

원거리에서 표범의 상태를 살피던 앨런이 특정 단어에 반응했다.

“경마요?”

“그게 얼마나 재밌···. 손 뗐다. 진짜야. 그런데 뭐 하는 거냐? 나 말고 표범에 신경 써야지. 저러다 지는 거 아니냐?”

“아직은 괜찮습니다. 소리만 요란하고 파손율은 낮습니다.”

앨런의 말대로 표범은 멀쩡했다. 충돌 직전, 미꾸라지처럼 쏙 빠져나간 탓에 수문장의 어깨는 애꿎은 벽만 짓뭉갰다.

수문장이 충격을 해소하는 순간, 측면을 점유한 표범이 앞발 연타를 날렸다. 3m의 거구가 조금씩 비틀거렸다.

[가속], [강력], [강화] 그리고 회로 마법인 『분쇄』까지 더해진 타격은 깊이 침투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내부 부품은 천천히 망가지고 있으리라.

팔을 크게 휘둘러서 표범을 뿌리친 수문장은 바닥에 있는 망치를 다시 손에 넣었다.

“역시 사람은 도구를 써야지.”

누군가를 응원하는지 모를 테일러의 말이 살짝 들렸다. 그마저도 두 오토마톤의 충돌에 금방 묻혀버렸다.

수문장이 망치를 양손으로 붙잡으니, 망치 머리 부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놈은 빗자루로 먼지 쓸듯이 수평으로 아래를 휩쓸었다.

유연한 고양이처럼 뛰어오른 표범은 망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수문장의 노림수는 끝이 아니었다. 망치의 연기가 더 짙어지더니.

쾅!

폭발하며 주변을 흔들었다. 충격 때문에 밀려난 표범은 거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였다. 배 부분은 시커멓게 그을리기도 했다.

수문장이 아직 떠 있는 적을 망치로 쳐올리려는 순간, 표범이 입을 쩍 벌렸다. 그 안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강력한 열선은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송곳니에 의해 너덜너덜해진 외장갑은 열선의 침투를 쉽게 허락했다.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수문장의 외장갑 틈새로도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쿵!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문장이 두 무릎을 꿇으며 정지했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쳤다.

“아주 흥미진진했어.”

“테일러 형제님.”

“왜?”

“오토마톤도 아군으로 사용하면 쓸만한데 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까?”

“유지비 그리고 수리비. 캠프에 있던 DT-10은 필요할 때만 가동하면 되는데, 탐험가의 오토마톤은 멈추면 안 되니까 동력 소모도 많지.”

“아···. 그렇군요.”

“그렇다고 아예 없진 않아. 원시림부터는 조금씩 보이긴 할 거다. 이제 다 식었을 테니 해체하자고.”

중요한 전리품을 수레에 담은 테일러는 표범을 점검하는 앨런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DT-10의 마력로로 교체하면서 발톱에 마나소드 기능을 달았는데 발동이 안 돼서요. 이게 문제인가···.”

앨런이 표범의 발을 툭툭 건드리니 그제야 파란 칼날이 툭 튀어나왔다. 철판도 그냥 찢어버리는 빛은 아름다우면서도 살벌했다.

“회로가 살짝 꼬였었네요. 이것만 아니었으면 광선을 쓸 필요도 없이 끝냈을 텐데.”

“볼 때마다 업그레이드되네. 이러면 근위병 상대하기 수월해지겠는걸.”

“아직 멀었습니다. 적어도 마셜 회장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어야 만족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적어도’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래, 꿈은 클수록 좋지.”

*

마침내 도착한 20층은 그동안 봐왔던 풍경과는 달랐다. 검은 안개는 여전히 가득했지만, 동굴 특유의 암석 대신 건물이 벽을 이뤘다.

건물을 벽으로 삼아서 만들어진 미로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창문이나 문틈으로 랜턴 빛을 쏘아 보내면, 황폐한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마치 시멘트만 발라놓고 오랫동안 버려둔 폐가를 연상케 했다.

안으로 들어간 앨런이 구석구석 둘러보며 말했다.

“공터를 찾을 필요 없이 이 안에서 야영해도 되겠어요.”

“맞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사람들은 전부 그래.”

“여길 동굴이라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단순한 명칭보다는 지하도시가 어울려요.”

“전체 구조를 보면 그 말이 맞는데,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이 있으니 그대로 사용하는 거지. 인식이나 관례는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수레에 몸을 기댄 테일러가 손짓을 곁들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마치 흙더미에 파묻힌 옛 도시를 발굴한 모양새지? 길은 제대로 뚫려있고, 천장도 있긴 하지만.”

“19층은 5m, 여기는 6~7m 정도 되네요.”

“사실 위랑 별 차이는 없어. 외관만 살짝 바뀌었을 뿐, 미로나 마찬가지니까. 대신, 건물에 숨을 수 있으니 기습은 주의해야 해. 그게 지하인이든, 아니면 강도질을 일삼는 구더기든.”

“허···. 이 밑에서도 어머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단 말입니까?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바가 탄식을 흘렸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탐험가들은 장비가 좋아서 그래. 상대하기 위험하지만, 한탕 하려면 이만한 장소가 없지. 수틀리면 원시림에 짱박혀서 잠잠할 때까지 기다려도 괜찮고.”

“원시림은 의외로 살만한 층인가 봅니다.”

“맹수 잡아서 음식 모으고, 강에서 식수 얻고. 힘만 있으면 미로나 동굴보다 훨씬 살만한 장소지. 잠깐, 앨런은 어디···.”

“여기 있습니다.”

테일러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안쪽 방에서 앨런이 나왔다.

“뭐 했어?”

“집 구조가 어떤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상수도와 하수도의 흔적도 있고, 동력원이 움직였으리라 짐작되는 파이프도 보입니다. 집이 그냥 장식은 아니군요.”

“내가 지하도시라고 말했잖아. 학자들이 예전에 계산한 적 있는데, 도시를 정사각형으로 대충 환산하면 가로, 세로 각각 30km라고 하더라고.”

지하도시는 폐허지만 규모를 보면 한때 얼마나 번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문명이라는 가정하에.

“미궁의 창조자는 도대체 누굴까요? 이런 도시를, 그것도 디테일까지 살려가며 숨겨 두다니···.”

“그놈은 변태야.”

“왜요?”

“이만한 면적의 도시를 손수 제작했다고 생각해봐.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겠어?”

“무언가에 매달리는 뚝심과 열정?”

“···.”

테일러의 반응이 어떻든, 앨런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제작설도 있지만, 밖에서 지하인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없어서 다른 차원에서 가져왔다는 가설도 있죠.”

“우리 이 이야기 그만하면 안 될까? 머리가 슬슬 아픈데···.”

시바 역시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앨런은 일행과 함께 통로로 나섰다.

20층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마치 사람처럼 광장을 거닐거나, 건물 안쪽에서 쉬다가 튀어나오는 지하인만 아니라면 텅 빈 장소로 착각할 만했다.

심지어 지하인의 무장도 빈약했다. 아예 무기 자체가 없는 지하인도 있고, 함께 다니는 오토마톤은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애완용에 가까웠다.

“마치 일반 시민 같네요.”

“그런 점 때문에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탐험가도 꽤 있어. 나도 무시하고 싶은데 가만히 놔둬도 공격하니 처리해야지.”

“그건 맞아요.”

얌전히 목덜미를 내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앨런은 잡념을 빨리 털어냈다. 머릿속이 복잡해 봐야 탐험에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마치 멸망 후처럼 보이는 도시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건물의 형태가 달라졌다. 초입이 빈민촌을 연상케 했다면, 지금 걷는 곳은 부촌을 떠올리게 했다.

그 구역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서 사람의 출입을 쉽사리 허용했지만, 멀쩡했다면 엄청난 위용을 뿜어냈으리라.

테일러가 잠시 일행을 멈춰 세웠다.

“우리는 저길 궁전이라고 불러. 저 문을 넘어가면 진짜 시작이다. 과장 좀 보태면 쉴 틈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아.”

< 근위병(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