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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76화 (76/193)

< 근위병 (4) >

근위병은 옥좌로 향하는 높은 단상 중간쯤에 대기했다. 내려올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지하인은 근위병 혼자고 나머지는 전부 오토마톤이었는데, 그 수는 수문장이 둘, 그에 버금가는 덩치의 거미가 둘, 호랑이 크기의 늑대가 넷이었다.

마나소드를 아래로 늘어트린 테일러가 짧게 읊조렸다.

“매번 등장하는 종류는 달라도 숫자는 여전하군.”

“10층은 비교도 안 되네요.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보니 차이가 어마어마해요.”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아뇨. 빨리 끝내고 파워슈트나 연구하고 싶어요.”

테일러는 앨런의 대답에 피식 웃고, 시바의 뒤에 섰다.

“형제님? 왜 제 뒤에?”

“어머니의 은총으로 보호해달라고. 얼른 방어막이나 펼쳐.”

거미 등에 매달린 포신이 불길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단순한 발광을 넘어 스파크도 함께 튀었다.

시바는 바로 성법 주문을 외웠다. 전처럼 약식으로 성법을 펼치면 위력이 감소하지만, 지금은 여유롭게 경전을 외울 시간이 없었다.

하얀 방어막이 앞을 막음과 동시에 거미의 포신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포탄은 시차로 도달해서, 첫 발에는 방어막을 흔들고, 두 발째에 부숴버렸다.

푸르고 하얀 에너지가 어우러져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순간, 늑대 네 마리가 빠르게 접근했다. 전투 알고리즘을 잘 짜놨는지 돌기둥을 이용해서 몸을 숨겼다.

콰앙!

앨런이 쏘아낸 마탄이 늑대 대신 애꿎은 돌기둥을 가격했다. 미궁의 구조물답게 살짝 흠집만 생기며 돌가루를 뿌려댔다. 그마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금방 원상태로 돌아갔다.

앨런은 그 장면을 보고도 낙담하지 않았다. 강기를 사용하는 전사가 돌기둥을 공격해도 똑같은 결과만 나타날 테니까.

대신 돌진하는 늑대의 속도와 접근패턴을 파악하고, 돌기둥의 위치까지 계산에 넣은 후, 다시금 마탄 발사기를 조준했다.

이번에 발사한 마탄은 [관통], [나선], [가속]의 효과를 담은 철갑탄.

처음에는 그냥 허공에 뿌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돌기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정도로 비행한 마탄은 그곳을 막 지나가는 늑대의 머리를 꿰뚫어버렸다.

열심히 달리던 늑대는 그 속도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고, 바짝 따라붙은 늑대는 피하고자 위로 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공중에서 자세를 잡은 늑대의 카메라 아이에 포착된 또 다른 마탄 하나. 별문자로 주입된 지성은 저걸 피해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영혼석이 신호를 온몸 구석구석으로 보냈다. 먼저 마력로가 평소보다 맹렬히 돌아가고, 마력 펌프질을 받은 인공 근육과 기계 관절이 빠르게 가동했다.

쩡!

마탄은 몸을 한껏 비튼 늑대를 지나쳐 돌기둥을 강타했다. 망치로 강하게 때린듯한 소리가 대전을 찌르르 울렸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늑대는 피한 보람도 없이, 착지하기 전에 화염에 휩싸였다.

마무리 사격을 날린 상자가 앨런의 옆에서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늑대 하나를 잡고도 부족한지 다음 대상을 물색했다.

빙글빙글 돌던 카메라가 망가진 늑대에게 고정되었다. 잠시 쭈뼛쭈뼛하더니 그쪽으로 움직이려다가 앨런에게 제지당했다.

“공격 우선.”

삐―

앨런은 상자를 힐끔 쳐다봤다. 별문자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는지, 오토마톤이 쓰러지면 수거를 우선시하곤 했다.

포착을 잘한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앨런은 왠지 모르게 파밍에 강박증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적이 남았어도, 저도 모르게 손이 간다고 해야 할까.

한편, 테일러의 발밑에는 몸통에 큰 구멍이 뚫린 늑대와 반절로 쪼개진 늑대가 있었다. 시바는 그 앞에 서서 [자애의 포옹]으로 거미의 포격을 막아냈다.

그러다가 시야 외곽에 붉은빛이 문득 들어왔다. 이번이 탐험 두 번째인 시바도 저게 무슨 현상인지는 알고 있었다. 수문장의 안구 광선이었다.

“형제님!”

“괜찮으니 앨런 앞이나 잘 막아줘.”

말을 마친 테일러가 기둥으로 몸을 가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수문장들도 그 모습을 포착했으나, 한 명보다는 둘이 있는 곳을 우선시했다. 대신 거미의 포신이 테일러를 노렸다.

시바는 점점 강렬해지는 빛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상상한 미궁 탐험은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리 험난한지···.”

“엄살이 심하시군요.”

“형제님, 너무하십니다. 이제 두 번째인데 20층에서 대장을 상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시바 씨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겠죠.”

테일러는 전성기에 심도 4의 탐험가였다. 늙고 병든 육신을 매직웨어로 대체하며 지금은 심도 2.5로 추락했으나, 뻔질나게 드나든 경험이 사라지진 않았다.

“아저씨의 계산에 따르면 충분하다는 뜻이겠죠. 할 만하다고도 했고요.”

지상과 미궁은 할 만함의 기준이 달랐다. 미궁은 전투에 승리했다고 끝이 아니라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힘이 남아있어야 했다.

그러니 할 만하다는 말은 힘의 소모는 있더라도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진 않다는 뜻이었다.

앨런의 설명에도 시바는 계속 중얼거렸다. 방어막을 펼친 상태에서 정식으로 성법을 외웠다.

“자애로우신 어머니, 모진 풍파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보호하소서. 나, 당신의 온기를 기억하며 전진할지니, 북풍의 매서움도 지옥의 열기도 마음을 꺾지 못하리라. 나,그대를따라약한이들을보호할지니,설령목숨을거둬가더라도그들을지킬수있길.”

마지막에는 거의 랩 하듯이 쏘아낸 덕분인지 튼튼한 방어막이 추가로 생겼다. 약식 방어막보다 훨씬 투명하고, 맑은 하얀색이었다.

그리고 수문장의 준비도 끝났다. 두 놈이 동시에 머리를 앞으로 내밀더니 강렬한 섬광을 뿜어냈다.

지이잉!

어찌나 강력한 공격인지, 빛줄기가 닿은 늑대의 몸통 부분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철을 녹일 온도는 아닐 텐데. 마력이 분해의 성질도 지니고 있나?”

“형제님, 왜 이리 태평하십니까.”

처음과 똑같이 차분한 기색으로 분석하는 앨런, 땀을 뻘뻘 흘리며 방어막을 유지하는 시바. 그 둘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이제 부담이 좀 덜어질 겁니다.”

“네?”

시바가 반문함과 동시에 수문장 하나의 등이 크게 꺾였다. 방어막을 강타하던 광선이 돌기둥을 따라 올라가서 천장을 지졌다.

원인은 등에 달라붙은 표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은밀히 이동한 녀석은 수문장의 등에 매달렸다. 묵직한 녀석이 갑자기 달라붙었으니, 허리가 뒤로 꺾일 수밖에.

표범은 자신을 노리는 두 손을 피해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을 낮게 이동하며 수문장이 바닥에 둔 망치 자루를 할퀴었다.

빛을 머금은 발톱이 자루에 깊은 골을 남겼다. 수문장이 아래로 손을 뻗어보지만, 표범이 앞발로 쳐낸 망치는 멀리까지 미끄러졌다.

표범은 수문장보다 빠르게 도달, 발톱을 계속 흠집에 박아넣었다. 어느 정도 깊어지자, 앞발을 높게 들고 체중을 실어서 자루를 짓밟았다.

망치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수문장에게서 마력을 공급받는 회로가 망가진 까닭이었다.

무기를 없앤 표범은 수문장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마치 표범과 고릴라의 대결을 보는 듯했다.

선공은 표범이었다. 뒷발로 몸을 일으키고, 자유로워진 앞발로 수문장을 후려쳤다. 단타가 아니라 연타였다.

카가각!

발톱에 걸린 외장갑이 찢어졌다. 마찰 때문에 불똥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진짜 고릴라였으면 진즉에 도망갔거나, 죽었을 상처였다.

물론, 고통을 모르는 수문장은 그대로 표범을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수문장의 팔은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만 가르며 서로 충돌했다.

그 사이 표범은 몸을 낮추고 옆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속도 때문에 몸이 튀어 나가려 하니, 바닥에 발톱을 박아 넣어서 움직임을 제어했다.

앞발을 중심으로 표범의 몸이 반원을 그렸다. 빙글 돌아간 녀석의 앞에 보이는 물체는 수문장의 다리 뒤쪽. 삐죽 튀어나온 발톱이 사람으로 치면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부위를 찢어발겼다.

기동성을 위한 얇은 장갑이 독이 되었다. 절단당한 인공 근육이 동그랗게 말리고, 잘린 유압 파이프는 피 같은 기름을 뚝뚝 흘렸다.

다친 고릴라는 맹수의 먹이가 된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다시 등판에 올라탄 표범의 드릴 송곳니가 수문장의 목을 꿰뚫었다. 그 상태로 머리와 몸을 강하게 흔들었다.

끼이이!

한계까지 비틀린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다른 수문장을 향해 달려가는 표범이 카메라 아이에 담긴 마지막 장면이었다.

안구 광선이 끝난 수문장은 마력 집속 상태가 된다. 혹사당한 마력로는 냉각 시간이 필요했고, 그동안 수문장은 몸을 웅크리며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그러나 테일러가 표범의 앞을 막았다. 날카로운 눈이 테일러의 전신을 훑었다.

“살벌해라.”

아군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섬뜩했다. 테일러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표범은 당연히 테일러의 지시에 반응하지 않기에, 이건 앨런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예상대로 표범이 위를 쳐다봤다. 돌기둥 위에는 다리 하나를 잃은 거미가 매달려있었다.

표범의 두툼한 앞발에서 발톱이 삐죽 튀어나오고, 돌기둥의 요철을 이용해서 빠르게 올라갔다. 포신에 마력을 응축하던 거미는 표범을 확인하고, 다른 기둥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훌쩍 뛰어오른 표범이 거미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오토마톤이라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 허공에서 균형을 잡더니, 거미를 쿠션 삼아 바닥에 착지했다.

쿠웅!

당연히 아래에 깔린 거미는 납작하게 변했다.

“휘유.”

테일러는 휘파람을 불며 마나소드를 꺼내 들었다. 10층이나 겨우 전전하는 애송이들은 수문장의 방어태세를 뚫기 버겁겠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탐험가에게는 샌드백이었다.

마지막 수문장이 쓰러지며 오토마톤이 전부 파괴되었다. 그때까지 구경만 하던 근위병이 옥좌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시바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염으로 닦았다.

“진짜가 내려옵니다. 빨리 연옥에서 해방해주고 쉬고 싶습니다.”

“파워슈트가 망가지면, 직접 튀어나와서 싸웁니다. 2차전이죠.”

“앨런 형제님은 잘 아시는군요.”

“저도 처음입니다. 예습의 힘이죠.”

앨런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테일러를 가리켰다.

동굴까지의 정보는 삼라만상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정확할수록 구매 가격이 높아지긴 하지만, 앨런은 테일러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테일러의 지식은 원시림까지 이어졌다. 그 아래도 알고 있으나, 발설을 제한하는 금제 때문에 거기부터는 직접 부딪쳐야 했다.

도착한 테일러가 앞에 서서 근위병을 기다리는 사이, 시바는 묘하게 여유로운 앨런을 보며 물었다.

“형제님, 마탄 안 쏘십니까?”

“기왕이면 근위병의 파워슈트를 멀쩡한 상태로 얻고 싶어서요.”

“진짜로 할 거냐?”

“네.”

테일러의 물음에도 앨런의 태도는 확고했다.

“어차피 싸워야 하는 건 변함없잖아요. 이번 시도가 성공하면 좋고, 아니더라도 원래 하던 것처럼 하면 되죠.”

앨런은 마탄 발사기에 드럼 탄창을 장착하고 목표를 겨눴다. 그러나 마탄의 탄착점은 근위병이 아니라 천장이었다. 상자도 마찬가지로 위를 향해 마탄을 발사했다.

어리둥절한 시바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앨런이 의도한 현상이 발생했다. 굵은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폭우는 근위병과 그 주변만을 적셨다.

“마치 마법 같군요.”

“그러니 마탄이죠. 마법을 담은 탄환.”

사용한 룬문자는 [응결], [침수], [기우]. 진짜 비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양의 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앨런이 쏘아낸 다섯 발의 마탄이 물을 불러오고, 여섯 번째 마탄은 근위병을 향해 날아갔다.

근위병은 마탄에 반응했다. 들고 있는 대검으로 그대로 베어내려 했지만.

펑!

마탄은 허공에서 폭발하며 하얀 가루를 뿌렸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루의 정체는 얼음. 바닥에 흥건한 물에 닿자마자 급격히 덩치를 키워서 근위병을 집어삼켰다.

근위병은 얼어붙는 도중에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직 연약한 감옥이 사방으로 터져나갔지만, 물은 아직도 많았고, 앨런과 상자도 마탄을 계속 쐈다.

결국, 근위병은 꽁꽁 얼어붙었다. 두꺼운 얼음 속에 갇힌 빙하기의 동물처럼.

그래도 바이저의 불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 강렬한 빛은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앨런을 따라다녔다.

곧, 바이저가 어둠에 물들고, 파워슈트에 변화가 생겼다.

푸슉!

얼음에 갇혔어도 장갑 사이사이에서 증기가 뿜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이 쩍쩍 갈라지고, 갑각류 허물 벗듯이 등판이 열리더니 근위병의 본신이 빠져나왔다.

근위병은 다른 지하인보다 우람한 체구였다. 파워슈트 안쪽에서 꺼낸 검으로 침입자를 겨눴다. 칼날을 따라 푸른빛이 흘렀는데, 밀집도와 선명함을 보면, 마나소드가 아니라 오러였다.

“패턴을 스킵했구나. 마법으로 하는 건 봤어도 마탄은 처음이네. 그럼 2차전인가···.”

“아뇨.”

앨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팡이에 장착한 수문장의 안구에서 붉은 섬광이 뿜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표범이 쏘아낸 광선과 굵기 자체가 달랐다. 앨런이 직접 발사한 열선이 당연히 훨씬 위력적이었다.

광선이 뿜어낸 열기에 자욱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앨런의 왼쪽 눈이 내부를 투시하는 사이, 테일러가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

“쓰러트렸나?”

“네.”

수증기 속에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물이 붉게 물들었다.

< 근위병(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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