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위병(5) >
미궁은 불가해한 현상의 집합이며, 동시에 수많은 학자의 탐구욕을 자극했다. 어쩌면 현대문명이 밝힌 부분은 겨우 손가락 하나일 수도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앨런의 열광선이 만들어낸 수증기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꽉 막힌 대전에 마치 환기장치가 있는 것처럼.
흥건한 물 위에 엎어진 근위병의 등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반쯤 익어버린 장소에서 핏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어머님의 품에서 평안하길.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니 전리품을 어서 옮깁시다.”
시바의 목소리에서 기도할 때의 경건함이 빠르게 사라지고, 기대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앨런은 오토마톤의 잔해를 구석으로 운반하며 물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눈앞에 있는데 당연히 기쁩니다. 수도원은 공동소유라 개인물품이라 할만한 게 없었으니까요.”
“공동소유인데 술은 어디서 구하냐?”
테일러의 물음에 시바가 고개를 흔들었다.
“성수 제조법과 유통 루트는 기밀이라 아무리 테일러 형제님이라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지랄.”
“형제님,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기밀은 무슨. 분명 담 넘거나, 어디 개구멍 파서 드나들었겠지. 아니면 땅굴을 만들어서 간첩처럼 드나들었거나.”
‘땅굴’에서 시바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오토마톤을 수거하며 자연스럽게 발생한 흔들림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앨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옥좌로 향하는 중앙 통로 근처에 누워있던 오토마톤을 옮기고 나니, 이젠 근위병이 사용하던 파워슈트만 남았다.
앨런의 무감각한 눈이 살짝 반짝였다. 고개를 조금 숙인 자세로 서 있는 녀석은 상처 하나 없기에 만족감이 솟아올랐다.
테일러가 파워슈트 주위를 한 바퀴 돌며 휘파람을 불었다.
“깔끔하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니?”
“파워슈트가 한계 이상의 피해를 받거나, 속박의 정도가 심하면 근위병이 탈출한다는 정보에서 착안했습니다.”
“이렇게 깜짝쇼도 좋은데, 그런 그림을 그렸으면 우리에게도 알려줘라. 함께 탐험하는 동료잖아. 맞지?”
“네.”
“나쁜 마음은 없었겠지.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까먹었을 뿐.”
테일러의 말대로 생각이 너무 많아서 뒷전으로 밀어놨다가 잊은 것이다. 테일러가 앨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나이 되면 다 보인다.”
“형제님,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세월을 찌꺼기 배출구로 드신 분도···.”
“수도승답게 단어도 참 고상해라.”
대화하던 둘이 대전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앨런 역시 그들을 따라 눈을 돌리니, 잠시 후에 문이 살짝 열렸다.
그 틈으로 나타난 눈동자가 대전을 훑고, 짧은 탄식이 들렸다.
“이미 잡았네. 그것도 조금 전에.”
“그러니까 다른 데 돌지 말고 빨리 오자고 했잖아.”
“변비 걸려서 한 시간 동안 실종됐던 놈이 말은···.”
탐험가 여덟 명이 있는 무리였다. 그들은 옥좌를 정면에 놓고 봤을 때, 대전 오른쪽 벽에 붙어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냥 지나갈 테니 볼일 보슈.”
미궁의 불문율 중 하나는 ‘함부로 접근하지 말 것’이지만, 원시림으로 가려면 옥좌를 통과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특수성을 잘 아는 테일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도 긴장의 끈을 풀진 않았다.
그들이 옥좌에 다가가서 무언가를 누르니 검은 문이 허공에 생겼다. 탐험가들은 물결처럼 일렁이는 문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때? 신기하지?”
테일러가 앨런을 향해 물었지만, 정작 앨런의 관심은 온통 파워슈트에 쏠려있었다.
“네?”
“아니다, 하던 일 마저 해라.”
테일러와 시바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앨런은 상자를 쫓아냈다. 반짝이는 물체를 좋아하는 까마귀처럼 자꾸 파워슈트 근처를 기웃거리는 상자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불안했던 탓이다.
“저리 가.”
삐――
주인에게 혼난 상자는 망가진 늑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집게발로 마석과 영혼석이 장착된 부위를 통째로 뜯어내서 몸 안에 집어넣었다.
그 사이, 파워슈트를 분해한 앨런은 수레에 차곡차곡 담았다. 강화외골격 덕분에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세 대까지 늘어난 수레는 앨런에 의해 징집당한 오토마톤이 운반했다. 거미와 늑대는 전투능력을 상실했을 뿐, 무언가를 끌 순 있었다.
땀과 물에 젖은 수염을 말리던 시바가 흥미를 느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형제님. 방금 마나를 주입한 거로 보이는데, 지금 다루는 오토마톤만 표범, 상자를 합쳐서 다섯입니다. 무리하시면 몸이 상합니다.”
“어차피 마력과다증이라 괜찮습니다.”
“아, 그렇군요. 마력과다···.”
앨런이 말한 단어를 그대로 따라 읊던 시바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다수의 오토마톤을 운용하는데 마석의 숫자는 그대로인 이유가 있었군요. 형제님이 특이체질이셨다니.”
“비밀로 해주세요.”
“당연합니다. 제 수염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보통 성직자들은 어머니를 걸고 맹세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긴 한데 어머니를 건다는 말 자체가 좀 그렇군요···. 다른 형제님들이야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저는 좀 다릅니다. 제 일인데 어머니를 들먹이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화를 마치고, 수레 정리를 끝낸 앨런이 고개를 돌리니 테일러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나보다 2주 빨리 말해줬구나.”
“형제님, 무슨 그런 일로 삐지십니까.”
“어른한테 삐진다니!”
“다투는 건 위에서 하시고, 지금은 원시림만 살짝 보고 가죠.”
앨런의 말에 테일러가 눈썹을 가라앉혔다.
“앨런을 봐서 참는다.”
“아니, 앨런 형제님 때문에 화나셨으면서 도대체···.”
테일러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행은 옥좌까지 계단으로 올라가고, 수레는 양 측면의 경사를 이용했다.
테일러가 옥좌 뒤 편에 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만지니, 빛마저 빨아들일 듯한 어두운 문이 나타났다.
고민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테일러와 시바가 훌쩍 안으로 몸을 날렸고, 앨런이 가장 마지막에 발을 들였다.
층과 층을 통과할 때와 비슷했다. 검은 안개가 몸을 감싸고, 감각을 잠시 잃었다. 그래도 익숙한 일이라 앨런은 앞으로만 걸었다.
이제 몇 초 후면 원시림의 녹음이 앨런을 반기리라. 마침내 시야가 밝아졌지만, 새로이 나타난 풍경은 예상과 달랐다.
‘이건?’
앨런은 그제야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키가 갑자기 큰 것처럼 시선도 높았다.
‘여긴 지하도시잖아.’
정확히 말하면 새까만 호수와 비슷하게 생겼다. 물도 매우 깨끗하고, 중앙에는 인공섬도 있지만, 본능적으로 같은 장소임을 알았다.
지하도시에서 ‘지하’는 빼도 될 듯했다. 밝은 해, 맑은 구름이 하늘에 걸려있고 정체 모를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녔다.
앨런의 시선이 인공섬, 하늘, 대전이 있는 궁전 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앨런의 의지가 아니었다.
‘빙의?’
고민하던 도중, 시야의 외곽에 금속으로 뒤덮인 팔이 보였다. 앨런이 오늘 상대한 파워슈트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지금 근위병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구나.’
근위병도 병사이기에 혼자가 아니었다. 똑같이 생긴 파워슈트를 입은 자들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공기 좋지?”
“콘크리트 정글과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입니다. 나중에 이런 장소에 별장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수도승이 별장? 속세에 찌든 녀석.”
“비약이 너무 심하십니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앨런의 앞에서 테일러와 시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앨런은 조금 전의 경험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기억이 희미해졌다. 그래도 남아있는 파편들이 있긴 했다.
지이잉 거리는 미약한 진동이 허리춤에서 느껴졌다. 앨런은 공구 벨트에 끼워뒀던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이 녀석이 원인인가.’
바늘은 거의 은색으로 변했다. 황금색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엄청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었다.
생각을 대충 정리한 앨런의 귓가에 테일러와 시바의 대화가 들렸다.
“더 깊이 들어갑니까?”
“아니.”
“앨런 형제님 덕분에 여력이 꽤 남았습니다. 동물 몇 마리는 정화할 수 있습니다. 어머님도 주변에서 동물이 뛰어놀면 기뻐하시겠죠.”
“나도 앨런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 그런데 식량이 없다.”
“원시림을 배회하는 동물들이 기쁜 마음으로 기부할 겁니다.”
“기부는 무슨···. 야생동물은 생각 이상으로 질기고 누린내가 심한데 조미료 준비는 안 했어.”
앨런은 테일러의 의견에 찬성했다. 마나는 체질 덕분에 흘러넘치지만, 근위병을 정리하면서 준비한 물자를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
“올라가죠. 탐험심도 좋지만,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첫째도 지식, 둘째도 지식이겠지. 파워슈트 연구하고 싶어서 그렇지?”
앨런은 테일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정곡이라 할 말이 없는 까닭이다.
사실 파워슈트는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니기 곤란했다. 3.2m의 금속 거인을 어떻게 다룰지 연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처분해도 상관없으면 내려가도 되는데, 앨런은 그게 싫을 테니.”
“파워슈트를 여기에서 어떻게 처분합니까?”
“기억수정 줬을 때 정보를 미리미리 훑어봐야지. 뇌 확장 장치도 있으면서 도대체 뭘 하느라.”
“어머님과 면담을 했습니다.”
“핑계는···. 23층에 탐험가조합과 기업들의 기지가 있어. 24층부터 땅 파는 놈들이 나와서 23층에 만들었지.”
일종의 전진기지로, 원시림에서 사냥하는 무리는 전리품을 그곳에 팔고, 탐험물자를 구매하며 오래 머물렀다.
지상에서 기지까지 이동하는 순수 시간만 10일 넘게 걸리니, 수레가 꽉 차거나 물자가 떨어졌다고 계속 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시바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줄이 바뀌니 입장이 빨라지겠군요.”
“아뇨. 원시림의 괴물들을 사냥해서 얻은 전리품을 꾸준히 정산해야 탐험가 신분증이 갱신됩니다.”
“이런···. 혹시 돈 주고 구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줄은 탐험가 사이의 질서였고, 의외로 그 부분은 로만 컴퍼니도 엄격했다. 실력 지상주의인 탐험가의 세계답게 자격 또한 힘을 갖춘 자에게만 돌아갔다.
“로만 컴퍼니는 개성적인 탐험가가 많은 조합이라고 들었습니다.”
“개성? 개 같은 성격을 말하는 거냐?”
“시바 씨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아무나 받아줘서 질이 떨어질 뿐, 그 속에도 정상적인 사람은 있겠죠. 아무리 불량품을 많이 생산하는 회사라도 뽑기만 잘하면 되듯이요.”
“비유가 좀 이상한데. 그럴 때는 진흙 속의 연꽃, 모래 속의 진주 아니니?”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몸을 돌렸다. 문은 어느새 5m 정도 이동했는데, 원시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무와 수풀이 워낙 많아서 눈을 크게 떠야 보였다. 나침반이 필요한 이유였다.
검은 문이 다시 앨런의 몸을 집어삼켰고, 아까와 같은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
파워슈트를 가지고 다닐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입고 다니거나, 수레를 이용하거나, 공간 주머니를 사용하거나.
입고 다니면 마력 낭비가 너무 심했다. 3.2m의 파워슈트를 합친 상태로 옮기려면 수레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분해하면 수레가 작아도 되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착용하다가 끝날 수도 있었다.
‘남은 방법은···.’
앨런의 왼쪽 눈이 삼라만상의 쇼핑 목록을 훑었다. 미궁에서 얻은 오파츠 공간 주머니, 줄여서 차원 주머니 또는 차원 배낭이라고 부르는 물건들이 보였다.
미궁에서 차원 배낭의 이점이 얼마나 클까. 그건 너무 많아서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앨런은 우선 75L 용량을 수납 가능한 손바닥 크기의 차원 배낭을 살폈다. 파워슈트의 팔 한 짝이나 제대로 담을지 의심스러운 용량임에도 ‘억’ 단위부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고, 창고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파워슈트를 바라봤다. 입고 다니는 사람이 극히 적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흥미가 살짝 식은 앨런은 책상 위에 놓인 동그란 나침반을 관찰했다. 테일러에게 그때 겪은 일을 상담했는데, 일단 수집가와 관련된 일이니 조용히 있자는 조언을 들었다.
그 말이 맞았다. 괜히 시선 끌 필요도 없고, 이런 물건은 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우니까.
투명한 수정 너머로 문이 벌컥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성수가 담긴 봉투를 품에 안은 시바가 먼저 들어오고, 테일러가 뒤를 이었다.
“선물이다.”
테일러가 무언가를 휙 던졌다. 당연히 앨런은 반응하지 못했고, 무언가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기억수정이네요.”
“저번에 시온이 실험데이터 보내준다고 약속했잖아. 나간 김에 받아왔지.”
“감사합니다.”
뇌 확장 장치가 없는 앨런은 기억수정을 단말기에 꽂았다.
< 근위병(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