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토(1) >
기억수정을 꽂은 단말기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 직전, 앨런은 손으로 홀로그램 영사기를 덮었다.
시온이 건네준 실험데이터는 다르게 말하면 인체실험의 기록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겪어봤기에 심리적 저항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앨런이 머뭇거리니, 소파 뒤에 서 있던 테일러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왜 그러니?”
“사람을 갈아서 얻은 정보라고 생각하니 좀 꺼림칙해서요.”
대답을 들은 테일러가 피식 웃으며 앨런의 머리를 헤집었다.
“매드사이언티스트인 줄 알았는데 가끔 보면 묘하게 인간적이란 말이야.”
“형제님, 가끔이라는 뜻은 평소엔 그렇게 느낀다는···.”
테일러가 목소리를 높여서 시바의 말을 뚝 잘랐다.
“실험데이터는 지식의 집합체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겠니?”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람이겠죠. 질소가 비료가 되냐, 폭탄으로 변하냐는 사람이 결정하니까요.”
“그래, 잘 알고 있네. 정 찝찝하면 죽은 마법공학자들의 복수를 해준 대가라고 생각해. 우리가 그곳에 갔기에 추가 피해자도 없고, 원념을 덜 수도 있었잖아.”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처럼, 때로는 고충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진다. 한결 괜찮아진 앨런은 단말기에서 손을 뗐다.
홀로그램 영사기가 허공에 빛을 쏘아 보냈다. 환영과 빛 속성 마법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은 기억수정에 담긴 데이터를 3차원으로 시각화했다.
먼저 투명한 인체모형이 나타나고, 파이프나 케이블이 모형과 연결되었다. 파이프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졌는데, 각각 입력과 출력이라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그림이라서 아직은 봐줄 만하네.”
테일러의 입술이 앨런의 귓가 근처에서 열렸지만, 홀로그램에 눈길을 빼앗긴 앨런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림의 부분마다 하얀 선이 연결되더니, 주석이 주르륵 달리기 시작했다. 그 양이 어찌나 많은지 4m 넘는 창고의 천장까지 글과 수식으로 가득해졌다.
“음···.”
테일러는 눈과 뇌가 아찔해졌음에도 버텼다. 어른으로서 좋은 말을 해줬는데 바로 달아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눈 초점을 흐리고 있다가 앨런에게 3줄 요약으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앨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한 줄을 읽으면 다시 읽는 법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가 핵심만 뽑혀서 뇌세포 사이사이에 꽂혔다.
‘마법공학자를 납치까지 하며 모은 이유···.’
핵심만 말하면 마법사는 구하기 힘들어서였다. 이들이 원하는 마법사의 수준은 높았는데, 그런 사람을 납치하려고 하면 전투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당연히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해결사 노릇을 하는 마법사도 있으나,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수준이 정말 낮았다. 그러니 마법사에 가장 근접한 존재인 마법공학자를 대거 납치했다.
록하트 사가 하려던 실험은 마정석 제작이었다. 사람을 재료로 삼아서, 혹은 여과기로 사용해서.
결과만 말하면 실험은 실패였다. 제작이 불가능한 대신, 원래 존재하는 마정석의 급은 높일 수 있었다. 그마저도 투입대비 산출이 엉망이라 상부에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을 납치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큰 실험이었을 테니까.
거기까지 이해한 앨런이 요약한 내용을 테일러에게 알려줬다.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은 있었군요.”
“그게 아냐. 놈들이 세간의 시선을 걱정하긴 하는데, 궁극적인 이유는 주가 때문이다. 누군가가 체포됐다거나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면 가격이 폭락할 테니까.”
“시작도 돈, 끝도 돈이군요.”
“그런데 진짜 기업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새끼들은 신경도 안 쓸걸.”
“주인이요?”
“영화나 소설 보면 흑막 나오고 그러잖아. 나도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는 몰라.”
“요원으로 활동했는데 만나본 적도 없으세요?”
“나는 네가 말하는 요원과 근본적으로 달랐···.”
꾹 닫히는 입. 테일러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주 겪는 일이라 앨런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마정석 분야는 허탕만 쳤는데 마석은 성과가 있었네요. 체내의 마력회로를 이용한 새로운 마석 합성 기술을 개발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앨런은 테일러의 물음에 상자를 불렀다. 무한궤도를 돌돌 굴리며 다가온 녀석은 서랍 중 하나를 내밀었다. 앨런은 그 안의 마석을 꺼내서 탁자에 올려놨다.
“앞에 놓인 마석은 1급 마석 10개와 2급 마석이에요. 마나의 양만 따지면 둘이 비슷한데, 2급 마석의 순도가 높아서 가치는 그쪽이 우월합니다.”
“그런데 1급 마석이 10만 코인, 2급 마석이 100만 코인 언저리에 거래되는 이유는 무엇이지? 지금까지 설명한 바로는 2급 마석이 100만 이상에 팔려야 하는데 실상은 아니잖아.”
“마석 합성 기술과 기업 간 치킨 게임 그리고 미궁에서 나오는 마석 덕분입니다. 어쨌든 소비자에겐 좋은 현상이죠.”
물론 같은 1급, 2급 마석이라도 생산지나 크기 차이 때문에 가격이 살짝 바뀌긴 했다.
“그럼 그냥 사면 되잖아. 귀찮게 시간 들여가며 만들 필요가 있을까?”
“네. 록하트의 데이터를 살펴보니 합성 과정에서 자연의 마나를 끌어들여서 마나 수용량이 커져요.”
“얼마나?”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제작자가 초보일 때 2% 이하, 능숙하면 10%까지요. 다른 합성 기술은 최고치가 5%라고 하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2배네요.”
“그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급이 낮은 마석이야 유의미한 차이가 없겠죠. 4급 마석이 얼마죠?”
“1억. 아, 맞구나. 비율로 증가하니 훨씬 좋네. 그럼 대출 풀로 땡겨서 마석 제작이나 할까?”
테일러의 쾌활한 물음에 앨런이 잠시 말을 멈췄다.
“···.”
“형제님. 끄윽···. 제가 들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성수를 숨이 막히도록 마셨는지 얼굴이 빨개진 시바도 나무랐다. 순식간에 못난 어른이 된 테일러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10%라고.”
“앨런 형제님이 숙련자여야 그렇다고 했잖습니까.”
“아니, 앨런을 못 믿어? 분명 처음부터 해낼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
“신뢰가 땅에 떨어졌단 말이야? 앨런 못 믿어?”
“자꾸 교묘하게 몰아서 입을 막으시는군요.”
결국, 앨런이 중재를 했다.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테일러가 설명을 차분하게 들었다.
“록하트의 기술은 제작자를 갈아 넣습니다. 급이 높은 마석을 합성할수록 몸져눕는 기간도 길어지죠.”
“그럼 하지 말자.”
테일러는 바로 포기했다. 안 그래도 마력과다증이 몸을 해치고 있는데, 아무리 돈이 좋아도 거기에 기름을 들이부을 순 없었다.
건강을 위해 돈을 포기한 테일러는 마석을 모아놓고 무언가를 하는 앨런에게 물었다.
“지금 하는 건 뭐고?”
“마석 합성 중입니다.”
“조금 전에 위험하다면서.”
“탐험에 쓸 만큼은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정 의심되면 나중에 요화 사장님에게 물어보세요.”
“그래? 지금 갔다 올 테니 넌 쉬고 있어라.”
비장한 얼굴의 테일러가 신속하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시바가 실실 웃었다.
“그냥 통화로 물어보면 되는데 직접 가시는군요. 그럼 저녁은 2인분만 챙기겠습니다.”
“오늘은 웨스턴스카이 휴일이라 금방 돌아오실걸요.”
시바가 앨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껄껄 웃으며 성수를 들이켰다.
*
앨런은 파워슈트를 미궁에 가져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룬문자로 무게를 줄이거나, 마석 합성을 통해 마력로의 마석을 교체하거나.
‘아예 크기를 줄일까.’
파워슈트 자체가 근위병의 체형에 맞춰져 있기에 앨런에게는 좀 컸다. 이 상태로 착용하고 조금만 빠르게 움직여도 몸이 흔들려서 이리저리 부딪히다 골병도 얻으리라.
‘탑승부를 축소하면서 부품을 좀 덜어내면 효율이 그럭저럭 나올 것 같은데.’
주요 부품은 남겨두고 외장갑이나 골격을 줄이고, 고급 소재를 사용해서 무게를 덜어내면 충분히 실용성 있었다.
“생각보다 복잡하네. 골격은 어떻게 구성하게?”
“지금 사용하는 강화외골격을 중심으로 만들면 되겠죠.”
“그게 되니? 하긴 그러니까 마법공학자겠지.”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바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미궁에 들어가기 전에는 마법공학자가 편하게 앉아서 작업하는 줄 알았는데, 앨런 형제님을 보니 고충이 매우 많군요. 역시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입니다.”
“원래 생각이 맞을걸. 내가 볼 때 앨런은 고생을 사서 하는 경향이 있어. 결과물이 뛰어나니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지만.”
둘의 대화를 음악 삼아서 빈 종이에 개략적인 설계도를 그리는 도중, 무음으로 놔둔 통화 단말기의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발신자의 이름은 롤프. 해결사들의 일을 알선하는 브로커이자 술집 주인이었다. 앨런이 화면을 만지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돌이. 잘 있었나?]
“네, 롤프는 어떠세요?”
[나야 매일 비슷하지. 술 팔고, 토하는 놈 쫓아내고, 일감 던져주고. 그런데 요즘은 얼굴 보기 힘드네.]
“앨런한테 자릿세 장사하게? 귀한 몸을 어디서 함부로 부려먹으려고.”
[영감님도 옆에 계셨네. 통화 단말기로 연락하니 뭔가 어색해서···. 나중에 오면 서비스 충분히 해드릴 테니 언제 한 번 오셔.]
“마침 여기에도 드워프가 있는데 말이야.”
[그 친구도 당연히 해드려야지.]
“수도승인데?”
[발효 음료도 충분하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음료가 싫으면 독한 성수도 있으니 괜찮고.]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답게 테일러를 달랜 롤프가 다시 앨런을 불렀다.
[앨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나요?”
[본론? 그래, 그래야지. 혹시 비토라는 사람 알아? 마법공학자라고 하던데. 내가 볼 때는 실력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우리 앨런 때문에 눈이 높아져서 그런가?]
“아부해도 빵조각 안 돌아가니까 정신 차려.”
[영감님, 지금 앨런이랑 통화 중이잖습니까. 내가 누구한테 전화 걸었는지 헷갈리려고 하네.]
앨런은 잠시 침묵했다. 함께 클리닉을 탈출했으며, 베가에서 가족을 찾겠다는 사람의 이름이 왜 롤프의 입에서 나올까.
생각을 마친 앨런은 롤프의 물음에 수긍했다.
“네, 아는 사람입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사람 찾는 의뢰가 들어왔는데, 인상착의를 곰곰이 생각하니 너 같단 말이지. 덕분에 이번 일은 정보원 품삯을 안 챙겨줘도 되겠어. 하하하.]
웃음소리가 한동안 터져 나왔다. 의뢰도 빠르게 처리하고 돈도 아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사업용 번호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 내가 의뢰인에게···.]
“번호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쪽에서 남긴 연락처 있죠? 아니면 숙소 위치라든지.”
[연락처는 있어. 딱 보니 대포폰이구만.]
“그럼 알려주세요.”
비토의 연락처를 받은 앨런은 그 자리에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루루 거리는 익숙한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롤프 씨?]
“앨런입니다.”
[오, 앨런. 반가워. 잘 지냈지? 목소리는 좋아 보이네.]
“비토는 하려던 일이 잘됐습니까?”
[가족은 어딘가로 이사해서 찾을 수가 없더라.]
“영화는 아직도 그런 종류만 보십니까?”
[첩보물? 너 설마 내가 진짜인지 의심하는 거야? 갑자기 연락했으니 어쩔 수 없긴 하네.]
헤어진 지 반년이 훌쩍 넘었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그것도 브로커를 통해 소식을 알게 되었는데 의혹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진짜 비토라면 괜찮지만, 누군가가 비토의 뇌 확장 장치를 뜯어서 기억을 읽어냈다면, 필시 좋은 의도는 아니리라.
[그러면 내가 여기엔 온 이유부터 말할게. 가족이 떠난 도시에서 마도구를 수리하며 한동안 머물고 있는데, 누가 나를 찾으려 하더라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항구도시 아로마아의 카르텔과 비슷해서 얼른 도망쳤지.]
“저한테 그걸 알려주려고 왔다는 말이군요.”
비토에게는 메이즈시티로 간다고 했으니 이렇게 찾아온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카르텔의 일 처리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왜 비토의 귀에 들리게 접근했을까요?”
< 비토(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