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토(2) >
앨런의 물음에 비토의 말이 끊겼다.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 수 있었다.
“통화만 하지 말고 직접 만나죠. 장소는 브레이커 본사 뒤편에 있는 공원입니다. 택시를 타든, 모노레일을 타든 해서 지금 바로 오세요.”
[그래, 바로 갈게.]
약속이 잡히자, 테일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같이 행동했다던 아이지? 만나도 괜찮을까?”
“그래서 장소를 공원으로 정했습니다.”
준비를 마친 앨런이 창고를 빠져나가고, 테일러가 뒤를 바짝 따랐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머리를 굴리던 시바도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브레이커 본사 뒤편에 있는 공원은 시청에서 만들었지만, 브레이커의 건물들이 주변에 들어서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소유처럼 되어버린 장소였다.
창고가 아니라 여기에서 만나는 이유는.
“카르텔 조직원이 아무리 뇌세포가 모자라도 이곳에서 일을 만들지 않겠죠.”
여기에서 분쟁을 벌이면 브레이커에게 선전포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쟁도 아니고 일방적인 학살에 불과할 테지만. 아니면 본사 근처니 회장실에 머무는 마셜 회장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심도 7이면 50층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하겠죠?”
“너무 기대는 마라. 원정대 꾸려서 들어갔으니 적어도 두 달 후에나 올라올 거다.”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공원 입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노박에게서 해방된 덕분인지 날카로운 인상이 많이 유해진 비토였다.
앨런이 앞으로 나서고, 테일러와 시바는 뒤에 병풍처럼 섰다. 앨런의 몸 때문에 비토를 볼 수 없는 시바는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반가워요.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더 기뻤을 텐데.”
“카르텔이 정말로 나를 미끼로 썼을까?”
불안한 표정의 비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앨런은 직접 말하지 않고 물음만 던졌지만, 비토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눈치챘다.
마법공학자는 머리가 똑똑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그들이 무엇을 할 때 어벙해 보인다면 그건 낯설기 때문이고, 익숙해지면 금방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키키처럼 매직웨어를 이것저것 때려 박아서 억지로 조건을 맞춘 사람은 제외하고.
“나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는데,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아. 진짜로 노박이 살아있을까? 뒤통수에 뚫린 구멍은 너도, 나도 확인했잖아.”
비토는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어릴 때부터 노박의 밑에서 자랐기에 그의 그림자가 마음속에 짙게 드리운 까닭이었다.
유년기 시절부터 각인된 두려움은 쉽게 지우기 어려웠다. 성인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려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쌓인 압박감과 세뇌가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앨런은 평소처럼 무감각한 얼굴로 비토를 바라봤고,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비토도 안정을 찾은 듯했다.
“살아있다면 기적이겠죠. 저는 그런 단어보다 확률의 승리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요.”
앨런의 눈이 비토의 위아래를 훑었다. 투시 능력으로 매직웨어를 쭉 살핀 결과, 추적 장치로 의심되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뇌 확장 장치에 뭔가를 심어놨나.’
앨런이 뒤를 향해 손짓하니, 함께 온 상자가 삐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집을 지키는 표범에게 전투적인 능력만 부여했다면, 상자에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을 담았다.
“꺼내.”
삐!
굵은 원통, 마탄 발사기가 삐죽 튀어나왔다. 총구가 자신을 향하니 비토의 표정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거 말고 접속 케이블.”
삐···.
상자는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소리를 냈다. 앨런은 공원의 벤치를 가리켰다.
“저기에 잠시 누워보세요.”
비토는 얼른 요구에 따랐고, 앨런은 상자의 케이블을 귀 뒤의 포트에 꽂았다.
앨런의 왼쪽 눈에만 보이는 은하수가 펼쳐졌다. 입력창을 가득 수놓은 별문자는 뇌 확장 장치가 어떻게 구동하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때 누워있던 비토가 입을 열었다.
“아, 방화벽 해제 안 했구나.”
“이미 뚫었습니다.”
“빠르네···.”
“누군가가 이미 약화해놨네요.”
앨런은 은하수 구석에 숨겨진, 어두컴컴한 구역을 쓸어냈다. 그곳이 밝아지며 누군가가 감춰놨던 별문자 무리가 나타났다.
그 별문자들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멀웨어, 바이러스 등으로 불렸다. 멀웨어를 구성하는 별문자들은 앨런의 시선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사라졌다.
“누가 방화벽을 얇게 만드는 동시에 추적 프로그램을 심어놨어요. 이제는 제거했으니 안심하세요.”
“미안하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여기까지 놈들을 끌고 왔어.”
앨런은 깊은 생각에 빠진 상태여서 비토의 사과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복수? 아니면 눈?’
모두 그럴싸한 근거가 됐다. 가축에게 죽을 뻔했으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을 테고, 자연스럽게 분노에 눈이 멀었으리라.
그다음은 눈. 별문자 입력창이 굉장히 넓었다. 넓을수록 별문자를 많이 새길 수 있고, 별이 많을수록 기능이 다양해지고 위력이 상승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눈의 가치는 높았다. 심지어 마법공학자용 인공 안구에나 들어가는 고급 투시나 계측 능력도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앨런이 모은 돈보다 눈 하나가 비쌀 수도 있었다.
물론 노박이 연구도 못 끝냈고, 폭발에 휩쓸리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앨런이 강제로 착용했기에 배드섹터라는 문제가 있긴 했다.
‘그것도 마정석을 흡수시키면 해결될 일이야. 노박이 정말 살아있다면, 그에게서 눈이 정확히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지.’
앨런이 고민하는 사이, 대충 사태를 파악한 테일러가 으르렁거렸다.
“노박? 노망난 새끼가 감히 누구를. 아로마아? 어디에 박혀있는 시골인지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꾸역꾸역 기어왔으니 매운맛을 보여줘야겠어. 메이즈시티가 좆으로 보이나.”
“형제님, 단어 선택이 너무 거치십니다.”
“땡중이 이럴 때만 수도승인 척하네. 아, 넌 못 들었지?”
테일러가 앨런이 당한 일을 짧게 요약해서 설명하자 시바의 수염도 파르르 떨렸다.
“허, 그런 일이···. 다시 한번 살계를 어겨야겠군요.”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럴 리가요. 그저 삐뚤어진 형제들을 훈육할 생각이 충만할 뿐입니다. 어머님을 저보다 먼저 뵙는다고 생각하니 질투심도 조금 생깁니다.”
테일러가 시바를 보며 손가락을 관자놀이 근처에서 빙빙 돌렸다. 유일한 정상인인 자신이 앨런과 시바 같은 비정상인을 이끌어줄 필요를 느꼈다.
테일러는 어느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앨런에게 말했다.
“경찰은 신경 쓰지 말자고. 메이즈시티 내에 자생하는 갱단도 안 거드는데 외부에서 들어온 폭력조직에 관심 있을 리도 없지. 놈들 이름이 뭐냐? 카르텔이 진짜 이름은 아닐 테고.”
“코로나입니다.”
“이름부터 똥냄새가 나는데.”
“그쪽 말로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하는 짓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요.”
과거의 악연이 여기까지 따라왔으니, 메이즈시티의 방식을 보여줄 차례였다.
단말기를 꺼낸 앨런은 정보원이자 다이버인 키리를 호출했다. 그녀라면 삼라만상이라는 바다에 파묻힌 정보를 찾아줄 수 있었다.
마침 한가했는지 키리가 바로 통화를 받았다.
[앨런, 안녕.]
“의뢰하고 싶은데, 사람들 좀 찾아줄 수 있습니까?”
[사람‘들’? 범위가 너무 넓은데.]
“잠시만요. 남쪽 검문소를 통해 들어왔죠?”
고개 끄덕인 비토가 언제 통과했는지도 말했다.
“7일 전부터 훑어주세요. 억양이나 생김새가 베가 사람들과 똑같을 겁니다. 코로나라고 아로마아에 정착한 카르텔의 조직원이기도 합니다.”
[검문소를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하루에만 몇 명인 줄 아니? 고된 작업이 되겠네. 바쁘니 이만 끊을게.]
*
앨런을 따라 창고까지 온 비토는 우울한 기색을 마구 뿜어댔다. 테일러가 그를 보며 눈짓했다.
“계속 데리고 있을 거냐?”
“쓸만하고 믿을 수 있는 인력이 제 발로 들어왔는데 그냥 보내긴 아쉽죠. 실력보다는 신뢰 점수가 더 높지만요.”
“실력이 약간 떨어지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쪽이 훨씬 낫지. 왜, 파티에 영입이라도 하려고?”
“아뇨. 지인 가산점을 부여해도 기준에 한창 못 미칩니다.”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비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터덜거리며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혹한 면은 여전하네. 물 좀 마셔도 되지? 음료 라벨은 왜 떼어놨어. 켁! 술이잖아.”
비토가 기침하자 테일러가 못 미더운 시선을 보냈다.
“흠.”
“사심 빼고 들어보세요. 동굴 하층까지 탐험하면 10일이 넘게 걸립니다. 더 깊이 내려가는 만큼 여정도 길어질 텐데, 그동안 창고는 텅텅 비어있죠.”
“파수꾼 겸 관리자로 고용하겠다?”
“적성을 살려서 마도구 수리를 해도 됩니다. 창고를 텅 비워두는 편보다는 낫겠죠.”
성수 사이에 숨겨진 물을 겨우 찾은 비토가 목소리를 냈다.
“난 동의 안 했는데.”
“그럼 베가로 돌아갈 겁니까?”
“아니.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눌러앉아야지.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돼?”
“그냥 평소처럼 하세요.”
소파에서 일어난 앨런은 작업대로 향했다.
“키리의 소식을 기다리며 준비 좀 하죠.”
“미궁 괴물이나 사람이나 똑같지. 쏘면 죽고, 썰면 뒤지고.”
테일러도 장비를 점검했다. 최근에 근위병을 해치웠고, 지하인은 사람과 유사했다. 그러니 탐험 준비가 곧 전쟁 준비였다.
앨런은 작업대에 세워놓은 파워슈트를 쳐다봤다. 목을 올려야 할 정도로 체고가 높았다.
지하인의 신장은 꽤 크며, 현재 평균 신장 2.2m인 남성 오크와 비슷했다. 옥좌를 지켜서 근위병이라 이름 붙여진 지하인은 특히 기골이 장대했는데, 그 몸에 맞추다 보니 파워슈트도 자연스럽게 커졌다.
앨런이 파워슈트를 그냥 착용하기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마력로나 인공 근육 같은 부분은 놔두고 골격과 외장갑의 크기를 줄이는 중이었다.
현대 금속가공은 정말 뛰어나서 앨런의 요구에도 딱딱 맞춰줬다.
앨런은 마치 인체를 해부한듯한 모양새인 파워슈트를 매만졌다.
“제가 이걸 입는다면 대략 2.3m 정도 되겠네요.”
“거의 1m를 줄였네. 문제는 없고?”
“길이를 줄인 만큼 마력회로를 굵게 만들어서 순간 출력은 더 좋아요.”
“그 정도면 수레에 싣고 다녀도 되겠다.”
“여러 방안을 구상 중이니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요.”
아직 운반 방식을 정하지 않았다. 파워슈트 완성도 안 되었으니 성급한 생각이기도 했다.
앨런은 일단 대충 완성한 왼쪽 팔만 장착해봤다. 무게 균형이 심각하게 안 맞아도, 강화외골격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펭귄 같은 걸음으로 창고를 빠져나간 앨런은 콘크리트 벽돌을 세워놓은 공터에 도착했다.
따라 나온 비토가 입을 열었다.
“진짜 노박이 살아있다면, 그래서 우릴 쫓아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당연히 제거해야죠.”
비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앨런을 보며 차이를 느꼈다. 1년도 안 지났는데 앨런의 실력과 정신은 저 멀리에 가 있었다. 대단하고, 부럽고, 질투하게 됐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통증이 비토의 생각을 날려버렸다.
“앗, 따가! 뭐야?”
콘크리트 파편이 온몸을 때렸다. 자세를 낮춘 비토가 앨런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대로 있을 거냐고 물어보니까 고개를 끄덕였잖아요.”
“잠깐 다른 생각하던 중이었어.”
“다시 한번 보여드려요?”
그제야 비토는 벽돌이 박살 났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와 같은 사태를 방지하고자 앨런의 뒤에 숨었다.
앨런이 파워슈트의 왼쪽 손을 앞으로 내밀자 팔뚝 부분에서 포신이 튀어나왔다. 마나를 공급하는 케이블이 부르르 떨리더니, 포구에서 푸른색 마력 구체가 튀어 나갔다.
쾅!
이번에도 벽돌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위력이 좀 강한데. 무슨 룬문자를 썼어?”
“회로 마법도 적용했습니다.”
“잠깐, 너 별문자도 다룰 줄 알잖아. 그런데 회로 마법까지?”
룬문자, 별문자, 회로 마법.
세 명이 나눠서 공부해도 힘든 일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 입만 안 열면 중후한 외모의 테일러, 마찬가지로 경건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는 시바.
비토는 뙤약볕 속에서 그늘을 만난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여기로 도망 오길 잘했다. 그런데 앨런, 넌 뒤에서 화력 지원한다며. 파워슈트가 꼭 필요해? 첩보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위기의 순간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본인의 육체에서 나오잖아.”
“맨날 잠입 영화만 보지 말고 파워슈트 같은 장비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좀 보세요. 그리고 파워슈트가 있으면 착용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입어 봐도 돼?”
“당연히 안 됩니다.”
온몸을 축 늘어트린 비토는 창고 벽에 기댔다. 그러면서도 앨런의 실험을 반짝이는 눈으로 관찰했다.
< 비토(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