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회(4) >
테일러의 인공 안구가 사무실에 고정되었다. 마력을 감지하든지, 아니면 투시를 사용해서 노박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리라.
“아직 살아는 있네. 그래도 움찔움찔하는 모습을 보니 일어날 걱정은 없겠어.”
“인공 마나하트를 터트리며 마력회로 전체에 타격을 줬으니, 차라리 시체가 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마력이 주는 전능감과 중독성은 마약보다 강하기도 했다. 심지어 부작용도 없는, 영혼의 고양 수단을 잃어버리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상실감에 빠졌다.
대치의 시간 동안 앨런의 거미들은 공장 안으로 진입했고, 옥상에서 힘들게 내려온 상자는 포격하기 좋은 위치를 다시 찾아갔다.
주요 전력인 노박을 단숨에 잃은 카카가 위협적으로 으르릉댔으나, 겁먹고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노박? 정신 차려라. 네놈들, 산드라 님이 알게 되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겠지.”
“마력의 흐트러짐, 호흡 불안정, 동공의 변화···.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 다수 관측되는군요.”
앨런의 뚜렷한 목소리가 고요한 공장을 울렸다. 테일러는 안절부절못하는 카카를 보며 슬쩍 웃었다.
“그럼 그렇지. 진짜 산드라의 물건이었으면 깡패 새끼들만 보냈겠어?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제자나 부하들을 붙여줬겠지.”
“연관은 있어 보입니다.”
“그래 봐야 제자겠지. 어차피 산드라 같은 것들은 제자도 소모품 취급해서 우리에게 죽었다 한들 아무런 감흥도 없을걸.”
“아니다! 그분은 산드라 님이 총애하는···.”
“봐봐, 혓바닥이 길어지잖아. 어, 저 새끼 튀려고 한다.”
사무실 창문에서 카카의 모습이 사라지자, 테일러가 뛰쳐나가려다가 앨런에게 제지당했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지금 계단을 내려옵니다.”
카카가 노박의 한쪽 팔을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왔다. 노박의 머리통이 몇 번이나 철제 계단에 부딪히며 텅텅 소리를 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크만큼 덩치 큰 카카는 위기가 닥치니 고블린 특유의 비굴한 본성을 표출했다. 사실 인간도 마찬가지라 굳이 스테레오타입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목숨만은 살려주면 안 될까?”
앨런은 무릎 꿇은 카카보다 노박에게 관심을 뒀다. 인공 마나하트 과부하로 내부 회로가 몽땅 탔는지, 목 뒤의 포트에서 연기 줄줄 흘러나왔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거나 의미 없이 움찔거리기도 했다.
“나도 이랬니?”
“행동은 비슷한데, 내부 상태까지 비교하면 이쪽이 심합니다. 노박의 꼬인 마력이 뇌에 영향을 끼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망가트렸을 테니까요. 이리 와.”
앨런이 표범을 불렀다. 주인과 연결된 금속의 맹수는 어떤 의도로 자신을 불렀는지 잘 알았다.
“잠깐.”
앨런의 지팡이가 표범의 앞발을 깡깡 두드렸다. 그러자 빛을 잃었던 발톱이 다시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휘감겼다.
“지금 때려서 고친 거니?”
“아까 지면에 부딪히면서 내부 부품이 어긋났습니다. 그러니 수리보다는 재정렬 쪽이 맞아요.”
“그게 그거지. 역시 기계는 때려야 고쳐져. 물론 사람도···.”
무서운 논리를 펼친 테일러가 카카를 노려봤다. 시바가 카카와 부하들을 모아놓고 모신교 경전을 인용하며 질타하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조직원은 앨런의 거미가 막아섰다. 천장에서 뛰어내려 머리를 다리로 감싸고, 쾅! 2명이 사라지니 도주의 의지가 아예 꺾여버렸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일도 자신에게 때가 묻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형제님들은 폭력으로 삶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그럼···, 수도승 님은 왜 주먹을 사용하시는지···.”
“저는 여러분을 일깨우기 위해 각오를 했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침을 어겨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테일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표범의 앞발 근처에 피 묻은 장치가 굴러다녔다.
“으···.”
“왜 그러세요?”
“저 모습을 보니 징그러워서.”
“마나소드를 사용하면서 많이 보는 장면이잖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좀 다르지···. 어쨌든 저게 소뇌 근처에 붙어있는 뇌 확장 장치 맞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박의 장치를 뜯어낸 까닭은 블랙박스 역할도 어느 정도 담당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카카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가릴 수 있고, 눈에 대한 정보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앨런은 불타는 공장을 바라봤다. 확인사살의 중요성을 알려준 노박은 이번에는 진짜로 먼 곳을 향해 떠났다. 영혼이 있다면 저 연기 속에 섞여 있으리라.
“어머님 곁으로 가는군요. 부럽습니다.”
“정 부러우면 같이 손잡고 가든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자해하는 꼴을 보면 어머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여간 말은···.”
테일러는 담벼락에 기대서 불구경을 시작했고, 앨런은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시바가 꽉 쥐고 있는 줄에는 살아남은 카르텔 조직원 10명이 생선처럼 묶여있었다.
“살려두신 이유라도 있나요? 탈출해서 입을 뻥긋하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카카 형제님은 입 좀 다무시죠. 저희 교단에 참회 과정이 있어서 거기에 참여시키려 합니다.”
“설명 가능할까요?”
“마나하트를 파괴하고, 뇌 확장 장치를 모신교에서 제공하는 물건으로 바꾼 뒤, 개발도상국에 파견 가는 형제님들에게 나눠 줍···. 아니, 그 밑에 둡니다. 세상에 해악을 끼쳤으니 그만큼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족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나쁜 사람들이요?”
“교구를 담당하는 형제자매님들이요.”
쓸만한 노동력이 생겨서 좋아한다는 의미였다. 몸이 편해지니 자연스럽게 정신도 부드러워지리라.
엔진음이 들리더니 모신교의 상징인 하트가 그려진 검은 밴과 트럭이 공장 앞에 도착했다. 험악한 인상의 수녀가 내리더니 시바와 인사를 나눴다.
“저쪽이 입소 희망자입니까?”
시바가 줄을 당기자 카카의 몸이 흔들거렸다.
“맞습니다···.”
“자진 입소를 환영합니다.”
카카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시바의 팔뚝과 수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조직원들을 트럭 짐칸에 차곡차곡 실은 수녀는 시바와 악수하더니 밴을 타고 사라졌다.
“살계를 깼지만 선행을 했으니 오늘 쌓은 업은 제로가 됐습니다.”
시바의 합리화는 익숙한 광경. 기적의 논리에 콧방귀를 뀐 테일러가 근처에 쌓인 물건들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왜 이리 짐이 많냐? 골렘 의체도 전부 챙겼네.”
앨런이 테일러의 몸과 골렘 의체를 번갈아 쳐다봤다.
“재활용? 그건 조금···.”
“왜요?”
“스캐빈저 같잖아. 그리고 골렘 의체는 신체 비율이 엉망이라 별로야. 너도 그렇지?”
시바는 구원요청을 무시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앨런 형제님, 육체수련자들은 균형을 무시하고 위력만 끌어올린 골렘 의체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신품 매직웨어로 해드릴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장에서 구한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있던 앨런이 스쳐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며 물었다.
“산드라도 수집가처럼 심도 7이죠? 그 사람들은 얼마나 강한 거죠?”
“미궁의 문을 둘러싼 요새 있지?”
높이 50m, 너비 100m의 미궁 출입구를 둘러싼 요새는 온갖 방어마법, 자동 포탑, 타이탄 부대로 보호받았다. 랑카가 직접 소유한 군사력으로는 타이탄 부대를 막지도 못할 것이다.
“제이크와 수집가가 진심으로 싸웠으면, 새로운 요새를 만들어야 했을 거다. 조금만 다퉜어도 그리됐겠지.”
“수집가가 반격도 없이 달아난 이유는요?”
“미궁은 어마어마한 사업이라 국가, 기업, 개인이 모두 연결되어 있지. 그런데 거길 망가트리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아, 수집가도 다수의 힘은 무서워하는군요.”
테일러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놈의 행태를 보면 두려움보다는 귀찮음이 클 거다. 그냥 움직이는 마력분열탄이라고 생각해라.”
크기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긴 하지만, 보통 도시 하나를 초토화하는 무기였다. 사람 하나가 그런 무기와 비견되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란 말이군요.”
“그 뭐냐, 하늘에서 마법 구현하는. 뭐였지? 그것처럼 굉장히 위력적이지.”
“위성 마법이요?”
“맞다. 이제 생각나네.”
동방대륙과 붙어있는, 서대륙에 있는 어떤 나라의 드워프들이 만든 위성 마법은 우주에 띄운 인공위성들을 조합, 거대한 마법진을 만들어서 지상에 폭격을 퍼부었다.
번쩍하는 순간 마법이 내리꽂히니, 평범한 도시라면 대응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 나라의 드워프들은 우주 관찰용 위성이라고 주장하나, 대규모 파괴 실험을 끝내고 위성을 쏘아 올렸기에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런 무기를 함부로 사용했다간 전 세계의 적이 될 테니, 미치지 않았다면 사용할 일은 없었다.
룸미러를 통해 테일러와 시바의 눈이 마주쳤다.
“같은 드워프로서 어떻게 생각해?”
“강한 힘은 언제나 옳습니다.”
“땡중인 걸 깜빡했네.”
집으로 복귀한 앨런이 노박을 완전히 정리했음을 알리자, 소파 위에서 무릎을 안고 있던 비토가 방방 뛰었다.
칙칙했던 피부가 단숨에 말끔해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내일부터 일할까?”
“며칠 쉴 줄 알았는데 바로요?”
“수리해야 돈을 벌지. 가만히 앉아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 급여 체계는 어떻게 돼?”
“성과급입니다. 많이 수리할수록 많이 얻어갈 겁니다.”
“퍼센트는 많이 쳐줄 거지?”
“장비도 제가 빌려줍니다만.”
비토는 반발 없이 바로 수용했다. 부랴부랴 도망치느라 힘들게 마련한 장비를 모조리 두고 온 탓이었다. 베가도 워낙 험악한 나라라 지금 돌아간다고 해서 집이 멀쩡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마법공학자의 능력은 장비에서 나오며, 성능이 좋을수록 평판도 올라갔다. 앨런 같은 예외가 있으나, 비토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저런 별종이 아니었다.
“그래. 내일부터 빨갱이 드워프 가게로 갈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단가 부풀리기나 과잉 수리는 하지 마세요.”
“너무 도덕적인데.”
“비토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만나는 고객은 대부분 해결사니까요.”
“하긴 총포상도 엄청 친절하지.”
잘못하면 손님이 값을 치른 총구가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다. 그러니 숨겨둔 능력이 있거나, 미치지 않았다면 무기 상인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며칠 뒤, 앨런은 뇌 확장 장치에 담긴 기억 조각을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테일러가 술병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놈 말이 진짜야?”
“일부는 맞습니다. 카르텔 자체가 산드라의 제자 소유입니다. 노박도 그 밑에서 일했어요. 제물을 통해 눈을 강화하라고 맡겼는데, 저에게 빼앗겼죠. 이실직고하면 죽을 테니 몰래 왔고요.”
언제나 그렇듯 비교적 최근의 기록만 남아있었다.
오파츠가 아니면서도 오파츠를 흡수하는 비밀의 단서라도 얻었으면 좋았겠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진 않았다.
‘검은 구름으로 가려진 배드섹터의 별문자를 읽을 수 있으면 의문이 풀리겠지.’
그러려면 마정석을 모아야 했다. 요즘 정체기에 돌입했는지 저층에서 나오는 마정석은 효과가 거의 없었다.
앨런은 마력과다증의 치료법을 찾아야 하니, 어쨌거나 미궁을 내려가야 할 운명이었다.
사실 확실한 치료법이 있긴 하다. 바로 마나하트 파괴.
그러나, 그런 치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력이 틀어지면 룬문자를 그릴 수 없고, 영향을 받은 뇌 또한 별문자를 인지하지 못 한다.
살았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상태는 앨런의 취향이 아니었다.
해룡의 심술이라 불리는 해역에서의 사건 후, 앨런은 자신을 계속 몰아붙였다. 지금도 관성으로 달리고 있었다.
앨런이 멈추는 때가 온다면, 마력과다증을 치료했거나, 무언가 대단한 성과를 이룬 후일 것이다. 물론 휴식도 잠깐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23층에 있다는 기지까지 가보죠.”
“갑자기? 또 속으로만 생각하고 혼자 결론 내렸지?”
“일단 그곳을 중심으로 탐험해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러자. 말 나왔으니 이건 어떠냐?”
테일러의 인공 안구에서 뿜어진 빛이 화면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보급품 수송’이라고 적혀있었다.
“이제는 브레이커 직원도 아니잖아요.”
“프랑수아에게 부탁 좀 했지. 어차피 갈 거면 편히 가자고.”
“형제님, 지금 인맥으로 자리를 얻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싫어?”
“서로서로 돕고 사는 세상입니다.”
< 재회(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