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86화 (86/193)

< 원시림(3) >

원시림은 동굴 그리고 미로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사방이 뚫려있어서 관측해야 하는 영역이 급증했기에, 탐험 동안 긴장 수치가 높이 솟아올랐다.

검은 안개도 없고, 태양은 떨어질 생각을 안 하니 시각이 멀리까지 뻗어 나갈 만하나, 식물들이 적절히 방해했다. 덕분에 후각, 청각 등 모든 감각이 오랜만에 제대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금방 지쳐. 길도 없어서 직접 개척해야 하고. 지긋지긋한 녹색 쓰레기들.”

앞장선 테일러가 마나소드로 나뭇가지나 풀을 슥슥 잘라냈다. 옆에 있는 상자가 기계 팔로 떨어진 나무를 치우면, 열린 길을 따라 시바와 앨런이 움직였다. 표범은 오토마톤이라 아예 풀숲으로 다녔다.

길을 정리하던 테일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앨런은 정찰로 바쁘니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좀 도와야 하지 않을까?”

“날붙이는 너무 사납습니다.”

“목뼈 꺾기랑 두개골 파괴는 얌전하고?”

“모신교의 규율상 신체 상실을 일으키는 무기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만 규율 찾아? 고기는 잘만 썰면서.”

진심은 아니고 높은 습도 때문에 불평이 조금 새어 나온 것이다. 가지치기로 테일러의 정신이 분산된 만큼, 시바는 언제든지 성법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앨런은 정찰 거미 여섯 대를 조작했다. 일행을 중심으로 육각 진형을 갖춘 거미들은 동글동글한 카메라 아이를 열심히 굴렸다.

“생각보다 사냥감이 적네요. 23층이라 그러겠죠?”

앨런의 말대로 원시림에 존재하는 기지는 전부 23층에 있었다. 당연히 탐험가가 많으니 경쟁이 심하고, 사냥할 동물도 줄어들었다.

다음 층으로 가려면 현재 층에서 나오는 마석을 먹여야 하는데 사냥감이 적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분쟁이 생긴다.

미연에 방지하고자 기지에서 협의를 마친 파티들이 나침반 하나에 마석을 몰아주는 경우도 있으나, 항상 그럴 수는 없었다. 야생에서 만난 파티와 협력할 수도 있으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탐색 끝에 켈렌켄이라고 불리는 공포새를 사냥한 앨런 파티도 마찰을 겪었다. 뒤늦게 도달한 파티 리더가 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먼저 추적하고 있었는데 홀라당 삼켜?”

“이미 사냥이 끝났는데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원시림의 동물은 탐험가를 인지하면 도망이 아니라 공격을 합니다.”

켈렌켄이 아예 인식도 못 했다면 상당히 멀리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 주제에 소유권을 주장하냐는 완곡한 어법이었다.

앨런의 말에 정곡이 찔린 남자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석 하나만 있으면 길이 열려. 그러니 양보 좀 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대화 나눌 시간에 문을 찾았으면 벌써 도착했겠네요.”

“나침반 없으면 아예 탐지도 안 되는 문을 어느 세월에 찾아.”

저쪽 파티의 숫자는 여덟이라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계속 치근덕거렸다.

이쪽의 숫자가 적으니 일단 분위기에서 압도하고 설득해볼 생각으로 보였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도달한 탐험가가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그냥 가자. 저기는 세 명이잖아.”

“뭔 소리야?”

“달랑 세 명이 여기까지 내려왔다고. 게다가 노인 하나에 아이 둘이잖아.”

“한 명은 몰라도 다른 하나는 드워프잖아. 눈깔 삐었어?”

그러다가 구시렁거리며 떠나갔다. 하소연할 상대가 필요해서 소리만 질렀는지, 아니면 누군가 보고 있을까 봐 그냥 떠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소리까지 끊기고 나서야 테일러가 마나소드를 허리춤에 끼웠다.

“억지도 조리 있게 부려야지. 요즘 탐험가들은 왜 이리 애새끼 같은지 모르겠어. 나 때는 성정은 거칠어도 개념은 제대로 박혀있었는데···.”

“어머니 수녀님과 똑같이 말씀하시는군요.”

시바가 말을 받아주는 사이, 앨런은 켈렌켄을 해체했다. 정확히 말하면 등 뒤에 달린 두 개의 기계 팔이 전리품을 수확했다.

켈렌켄은 공포새의 일종으로, 공포는 두려움을 뜻한다. 실제 모습을 보니 일반인은 덜덜 떨게 생겼다.

가만히 서 있는 키만 해도 2m를 훌쩍 넘는다. 다리와 머리를 쭉 펴면 더 늘어날 게 분명하고, 부리는 사람의 머리와 상체를 단번에 삼킬 만큼 거대했다.

석화 능력을 봉인한 코카트리스와 싸움을 붙이면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았다.

“지금이야 멸종했다지만 옛날에는 이런 동물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는 거죠?”

“티타노보아, 다이어울프, 켈렌켄. 조상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몰라.”

“미궁의 창조자는 이런 생물을 어떻게 구현했을까요?”

“그걸 알면 나도 미궁 하나 만들겠지. 마석 크기는 어때? 몇 마리 더 잡아야 해?”

앨런은 테일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이 크기면 충분해요.”

사실 마석을 몰아주자는 파티를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모두 거절했다. 수집가가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나침반을 깨워야 하니까.

“좋은 정보는 선점해야죠.”

마석을 나침반에 붙이니 스르륵 녹아내리고, 투명한 수정 안을 부유하던 바늘이 핑그르르 회전하기 시작했다.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정작 문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모든 탐험마다 특별한 성과를 얻는 게 더 이상합니다.”

시바도 앨런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앨런 형제님의 말이 맞습니다. 욕망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 법입니다. 전문용어로 물욕센서라고 하죠.”

“도대체 누가 쓰는 말이야? 전문용어가 맞긴 해?”

“탐험가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하더군요.”

“말을 말자.”

마침내 바늘이 멈추고, 지금까지 전진하던 방향에서 살짝 왼쪽을 가리켰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니, 23층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목격했던 봉우리가 보였다.

23층은 중앙에 높고 험준한 산이 있고, 주변으로 숲이나 평야가 있었다. 산은 암벽등반가들이 좋아할 만한 형세였다. 다르게 말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등산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저기 올라가긴 빡센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형제님. 산 위에 문이 생기면 탐험가들은 어떻게 올라갑니까?”

“저기엔 원래 문이 안 생겨. 그런 걸 생각하면 확실히 저 나침반이 수상한 구석이 있긴 해. 저번에 앨런이 봤다던 환상도 그렇고.”

봉우리 아래에 도착한 앨런은 고개를 꺾어서 위를 쳐다봤다. 기암절벽이라는 단어가 정말 어울리는 장소였다. 원통을 대충 깎아서 꽂아놓은 듯한 암석 산이 눈앞에 있었다.

암벽에 꽂는 볼트나, 잡고 올라가기 편한 로프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로나 동굴처럼 원시림도 미궁에 속하기에, 탐험가가 근처에 없다면 이물질을 모조리 흡수했다.

주변을 구경하던 앨런은 작은 돌조각이 떨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위에 작은 점이 보였다. 왼쪽 눈이 시야를 확대하며 점의 정체를 명확하게 드러냈다.

아담한 뿔을 지닌 산양이 절벽을 오가고 있었다. 손가락 크기의 뿔과 달리 두꺼운 목과 전신에 울룩불룩한 근육은 전혀 아담하지 않았다.

앨런이 손가락으로 산양을 가리켰다.

“등반하다가 감지당하면 그대로 들이받나요?”

“그래서 탐험가들이 여긴 안 오려고 해. 저기도 한번 볼래?”

테일러의 말대로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멀리 있음에도 ‘크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맹금류였다.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빛내던 녀석은 산양을 본체만체하더니 봉우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여기에 머물렀으면 귀찮을 뻔···.”

"아깝네요."

앨런과 테일러의 입이 동시에 열리고, 서로를 쳐다봤다.

“뭐가 아깝니?”

“일단 뭐라도 잡으면 좋잖아요.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앨런이 손짓하자 근처 나무에 올라갔던 표범이 훌쩍 뛰어내렸다. 육중한 몸무게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착지를 선보인 녀석은 주인의 근처를 맴돌았다.

“시도는 좋은데, 쟤들은 등반하는 사람만 표적으로 삼아. 근처를 돌아다니기만 하면 무시하고.”

“그럼 위에 뭐가 있다는 뜻인가요? 왠지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 같네요.”

“예전에 몇 번 올라갔는데 경치 말고는 별거 없었어. 음···, 지금은 그 나침반이 있으니 좀 다를 수도 있겠다. 그럼 올라갈 준비 하자.”

시바가 수레를 숨기고, 그 안에서 서로의 몸을 묶을 로프를 꺼내는 사이, 앨런은 룬펜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 그릴 룬문자는 [부착]과 [마찰]. 설령 손가락에 힘을 빼더라도 룬문자가 어느 정도 보조해주리라.

“수직 달리기도 되니?”

“점프만 안 하면요. 발바닥 하나는 암벽에 무조건 붙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지···.”

으아아······.

그때 저 멀리에서 희미한 비명이 들렸다. 날개로 트럭도 덮을 만한 맹금류가 날아간 방향이었다.

테일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앨런 쪽으로 향했다. 마치 의견을 묻듯이.

“가보죠.”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앨런 형제님은 어머님의 가르침에 귀의할 생각 없습니까? 행동 하나하나에 묻은 선량함을 보면 어머님이 참 좋아하실 듯합니다.”

“멀쩡한 애 물들이지 말고 너나 잘해.”

“모신교가 이상하단 말씀입니까?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발언이군요.”

“모신교 말고 네가 문제야.”

“그건, 음···.”

시바는 침몰한 배처럼 입을 다물었다.

20분 정도 걸어서 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한 앨런은 바닥에 누워있는 탐험가를 목격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간호받고 있었다. 무릎 꿇은 여자가 남자의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줬다.

“그렇게 올라가지 말라니까.”

“저 위에서 볼 경치를 생각해 봐. 그리고 이 정도는 안 죽어.”

“얼마나 많은 남자가 너랑 똑같은 유언을 내뱉었는지 알아? 그리고 등산하려면 장비와 방어막 생성기를 제대로 갖춰야 문제없이 올라갈···. 무슨 일이죠?”

남성을 닦달하던 여성이 앨런을 발견하고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숨길 수 없는 경계심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비명이 들려서 와봤습니다. 문제없으니 다행이군요.”

“확인했으면 어서 갈 길 가시죠.”

“야, 착한 분들 같은데 왜 이리 까칠해.”

“너 때문에 그래!”

“걱정은 감사합니다. 보기 드문 분들이네요. 눈 감고도 절벽을 뛰어 올라가는 탐험가도 그렇고 오늘은 재밌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군요. 안전한 탐험 되시길.”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파티와 함께 사라졌다.

특정 단어에 반응한 앨런과 테일러가 서로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일까요?”

“그런 기행을 벌이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고?”

시온일 확률이 거의 100%였다. 앨런이 그동안 많은 탐험가의 얼굴을 보며 특징을 데이터베이스에 기록했지만, 그녀와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테일러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올려다봤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내 생각에 분명 목적지가 같을 거다.”

“근위병을 해치우고 혼자 출발한 이유가 있었군요.”

“그나저나 시온이 경쟁자면 힘들 것 같은데···.”

“그래도 가봐요. 선배 혼자서···.”

“잠깐, 선배? 언제부터 그렇게 불렀어?”

“같은 나이긴 한데, 그 호칭을 좋아하더라고요. 아저씨도 처음에 할아버지라고 부르니 싫어했잖아요.”

“형제님, 맞는 말인데 왜 화를 내셨습니까? 자고로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 성현의 가르침이죠.”

“넌, 시끄러. 앨런은 하던 말 계속하고.”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각이라도 얻는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모를까, 나침반에 손을 댄 사람은 수집가다. 악명만 따로 빼놓고 생각하면, 그의 실력은 진짜였다.

근위병의 시점에서 환상을 봤던 때처럼 이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할지도 몰랐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앨런은 궁금해졌고, 그걸 해소하길 원했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절벽에 바짝 붙어서니, 기계 팔이 뾰족하게 변하며 암석을 파고들었다. 팔은 차례대로 움직이며 앨런의 몸을 위로 이끌었다.

< 원시림(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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