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묘지(1) >
암벽등반은 굉장히 도전적인 스포츠다. 풀어 말하면 위험하고, 어렵고, 진땀 나는 육체 활동이다.
등반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인해야 하며, 앞의 두 조건을 갖췄더라도 교육과 장비 그리고 기술이 필수로 요구된다.
그럼 앨런은 앞에서 말한 조건 중 몇 개나 해당할까. 육체는 당연히 빠지고, 교육은 들어본 적도 없다. 육체가 미달이니 기술을 배워봐야 시간 낭비다.
앨런이 지닌 요소는 정신과 기술, 오직 두 가지. 그래도 압도적인 기술이 나머지 단점을 모두 보완하기에 암벽등반은 쉬웠다.
기계 팔이 암벽에 달라붙으면, 4개의 손가락이 바위나 틈을 강하게 붙잡고.
퍽!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돌가루도 약하게 튀어 올랐다. 손바닥이라 할만한 장소에서 튀어나온 금속 막대가 바위 표면을 파고들어서 몸을 제대로 지지하면, 다음 기계 팔이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두 손이 자유로운 앨런은 막대가 만든 구멍에 볼트를 끼우고, 로프를 연결했다.
잠시 밑을 바라보니, 아래에 두고 온 표범과 상자는 점을 찍은 듯했다. 동시에 암벽에 바짝 달라붙은 테일러가 고개를 위로 꺾었다.
“좀 천천히 가자.”
“선배는 뛰어 올라갔다고 했으니 더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아니, 걔는 여길 어떻게 뛰어다니지? 산양도 그렇겐 못 하겠다. 너는 의외로 생생하네. 수도승 교육 과정에 암벽등반도 있나?”
테일러가 시선을 내리니 잘 따라오는 시바가 보였다. 땀은 좀 났어도 힘든 기색은 없었다.
“종족 고유의 특성 같습니다.”
산과 채굴을 좋아하는 드워프는 너무 열중하다 보면 조금만 파려다가 수직 통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두 손으로 올라가야 하니, 자연스레 그들의 손가락 힘은 매우 강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팔뚝이 워낙 두껍기도 했고.
그새 바람이 땀을 식혀서 피부를 차갑게 만들었다. 앨런의 기계 팔이 다시 움직였다.
“대화할 정도로 여유를 찾으셨으니 올라가겠습니다.”
“초콜릿 좀 먹자. 당 떨어졌어···.”
“빨리 드세요. 산양이나 맹금류가 보이지 않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아마 선배가 올라가며 정리했겠죠.”
시체가 사라졌으니 적어도 30분에서 1시간은 지났다는 뜻이었다. 마력을 사용하는 초인들에게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마음만 먹으면 40km도 1시간 안쪽으로 여유롭게 주파하겠죠.”
“어떻게 그리 잘 알아?”
“근위병을 해치울 때의 움직임과 탐험가 신체 조사 자료를 비교해봤습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선배는 심도 4~5 사이일 겁니다.”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서 전달했다. 바람 때문에 소리를 크게 질렀다가, 혹시 남아있을 동물의 주의를 끌면 귀찮으니까.
마침내 식물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정상에 도착했다. 오직 단단한 바위만이 앨런을 반겼다.
꼭대기는 300제곱미터 정도의 넓이였다. 암석 산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기에 제일 밑의 둘레는 훨씬 컸다.
“높이는 400m 정도군요. 경치는 좋네요.”
봉우리를 중심으로 숲이 동그랗게 펼쳐져 있고, 좀 벗어나면 평야가, 그 안에는 기업들의 기지가 드문드문 자리했다.
시선을 더 멀리 던지면 23층을 둘러싼 산이 보였는데, 그곳이 일종의 경계선이었다. 그 너머는 투명한 벽 때문에 도달할 수 없었다.
절벽 쪽에서 머리만 쏙 내민 테일러가 앨런을 불렀다.
“좀 잡아줄래?”
“오늘따라 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세요?”
“이 나이에 암벽등반이라니···, 이거 노인학대야.”
앨런의 기계 팔이 로프를 잡아서 쭉 당겼다.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 두 마리가 펄떡대며 올라왔다.
앨런은 바닥에 누운 테일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탐험가들이 여길 기피하는군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었다. 이번에는 시온 덕분에 쉽게 올라왔지만, 원래는 산양과 맹금류의 공격을 버텨내야 했다.
사냥에 성공하면 시체가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라서 추락한 전리품을 수확하려면 다시 하산해야 했다.
두 명이 땀을 말리는 동안, 앨런은 주변을 둘러봤다. 식생 없는 풍경만 눈에 들어오고, 시온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여기로 왔을 텐데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내가 동굴에서 알려준 기술 있지?”
“비밀통로 탐색이요?”
가르침보다는 앨런이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지만,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진 않았다.
“여기에도 비밀통로가 있나요? 어떻게 열죠?”
“추측이니까 눈에서 레이저 좀 그만 쏘렴. 사실 여기에 통로가 있는지도 몰라.”
“그래도 신빙성이 높네요. 한 번 찾아보죠.”
다시 시간이 흘렀다. 등반 때문에 축축하게 젖었던 옷이 전부 마르고, 바람 때문에 몸이 차가워질 때까지도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찾기 쉬웠으면 다른 탐험가들이 벌써 발견했겠지. 취미나 연구 목적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가끔 있으니까.”
“형제님, 나침반은 어떻습니까?”
“아까 멈췄는데 다시 확인해볼게요.”
앨런이 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투명하고 동그란 수정 안에 있는 바늘은 봉우리까지 인도하고 제 역할을 마쳤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손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나침반에 햇빛이 닿으니 내부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앨런은 몸 그늘에 있던 나침반을 높이 들어 올렸다.
태양이 닿자, 나침반 내부가 부글부글 끌어 올랐다. 바늘에 붙어있던 미세한 금빛 가루들이 수정을 빠져나와서 바닥에 닿았다.
평범해진 나침반을 보고 아쉬워할 법도 하지만, 앨런은 다른 곳에 집중했다. 가루가 내린 모래가 움직이더니 별문자의 형태로 재정렬되었다.
누워있던 테일러도 얼른 일어나서 앨런의 옆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거 별문자 맞지?”
“네. 도서관의 책장이 이런 형태를 이뤘었죠. 그때와 똑같이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라고 적혀있네요. 아, 여기에서 말하는 등불이 태양이었군요.”
깜깜한 미로나 동굴과 달리 원시림의 해는 항상 그 자리에 고정되어있었다. 우연이라 하기엔 공교로웠다.
지하인은 땅속에 거주하고, 피부는 빛이라곤 경험한 적 없는 사람처럼 새하얬다. 그러나 앨런이 경험한 환상에서는 태양과 구름이 분명히 존재했다.
‘모종의 이유 때문에 지하로 피신했거나 강제로 유폐 당한 건가? 그래서 태양을 갈망했고?’
앨런은 떠오른 추측을 기억의 도서관 한쪽에 꽂았다. 정보가 너무 적어서 결론을 내리긴 어려웠다.
바람을 훅 분 것처럼 모래가 전부 흩어지고, 봉우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그르릉!
암벽끼리 긁히며 낮고 사나운 소리를 흘렸다. 단단한 암반이 입을 쩍 벌리니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무슨 원리인지 빛조차 거부하는 미끄럼틀이 아래로 펼쳐졌다.
엎드린 테일러가 고개만 쏙 내밀었다.
“이거 거의 수직 통로 같은데···. 몸 성히 내려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확인해보죠.”
앨런의 어깨에 붙어있던 정찰 거미가 훌쩍 뛰어내리더니, 다각다각 움직이며 통로 안으로 쏙 들어갔다. 녀석은 잠깐 미끄러지나 싶더니 벽과 천장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동작을 보면 [부착]과 [마찰]의 룬문자가 제대로 작동하네요. 천천히 내려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좋아. 가볼까.”
테일러의 장갑과 부츠에서 앨런이 새긴 룬문자가 빛났다. 엄살을 피울 때도 많지만, 필요하면 먼저 몸을 던지기도 했다. 그 뒤를 시바와 앨런 순으로 따랐다.
몸이 천천히 하강했다. 다행히 완전 수직 통로는 아니고 워터슬라이드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갔다.
저 앞에 있을 테일러의 목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올라올 땐 편하겠네에에, 얼마나 내려가는 거야아아?”
“제 계산대로라면 봉우리 높이는 벌써 돌파했습니다. 지금은 땅속이겠군요. 방금 10m를 넘었습니다.”
“미궁의 땅은 그렇게 깊이 팔 수 없잖아. 미로나 동굴은 스크래치만 생기고, 원시림은 기껏해야 1m?”
강기나 대마법을 동원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다. 미궁은 매우 단단하며, 영구적인 상처를 남길 수 없다. 초월적인 힘을 지닌 강자들도 미로의 길을 따라 얌전히 움직이는 이유였다.
마침내 저 앞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착했다!”
테일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앨런의 기계 팔이 양옆으로 쫙 펼쳐졌다. 통로를 긁는 소리와 함께 앨런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앨런은 통로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아래를 한번 확인하고, 천천히 발을 디뎠다.
일단 검은 안개는 없었다. 그리고 광원도 없지만, 내부가 보였다. 마치 흑백화면을 보는 것처럼.
내부는 직사각형의 방이었다. 눈에 띄는 사물은 네모나게 깎은 돌인데, 벽에 바짝 붙어서 주르르 박혀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앨런이 석판을 쓰다듬었다.
“글자가 적혀있는데 역시 알아볼 수 없네요.”
마치 일부러 공백을 만든 것처럼, ‘□□□’ 비슷한 흔적만이 나열되었다. 글자의 흔적이라도 있으면 몰라도, 이런 식이면 신이 아닌 이상 해석할 수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시바가 불쑥 의견을 말했다.
“분위기가 묘비 같습니다. 예전에 살던 수도원 근처에도 이런 식의 묘지가 있었죠.”
“확인할 방법은 한 가지뿐이지.”
마나소드를 뽑아낸 테일러가 석판 앞에 푸른 칼날을 꽂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격자무늬로 썰어댄 후, 의수를 사용해서 흙을 파냈다.
“형제님, 갑자기 도굴하시면···.”
“도굴? 지질 조사, 고고학 연구 같은 좋은 말도 많잖아. 아직 탐험가 물이 덜 들었어.”
한창 땅을 파던 테일러가 어구구 소리를 내며 허리를 쭉 폈다. 그의 앞으로는 텅 빈 구덩이만 보였다.
“감각이나 눈을 속이는 신비가 적용됐나 싶어서 직접 삽질했는데 아무것도 없네.”
“그냥 장식인가 봅니다.”
앨런은 바로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니 흥미가 팍 식었다. 그래도 아직 탐험할 장소는 남았고, 우선 묘지와 연결된 통로만 해도 2개는 있었다.
테일러가 앨런의 의견을 물었다.
“왼쪽? 오른쪽?”
“왼쪽으로 가요.”
“왜?”
“별문자가 적혀있어요. 왼쪽에는 평온, 오른쪽에는 고행이요.”
“여기는 미궁이잖아. 심보 고약한 놈이 꾸민 함정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별문자를 아예 믿으면 안 되죠. 어차피 탐험이 쉬우리라 생각도 안 했고요.”
일행은 결국 앨런의 말을 따랐다. 탐험에는 당연히 위험이 따르고, 위험할수록 보상은 컸다.
통로도 아까 묘비가 있던 방과 마찬가지로 광원이 없는데 앞이 보였다. 색채를 잃어서 흑백처럼 보이긴 했는데, 명도 차이 덕분에 사물을 분간하긴 쉬웠다.
“몸이 편안하니 오히려 불안한데···.”
“형제님. 말이 씨가 됩니다.”
테일러의 말대로 사건이 터지진 않았다. 앨런이 선택한 통로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가끔 첫 방처럼 묘비가 나타나긴 했는데, 역시 텅 비어있었다.
다시 한참을 걸어 도달한 장소는 이전과 달랐다. 통로를 빠져나오니 거대한 공동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다른 통로가 보였다.
앨런은 지금까지 지나왔던 구조를 상기했다.
“첫 방의 오른쪽 통로가 저리로 연결되겠네요. 데칼코마니 형태군요.”
“데칼···, 뭐?”
“대칭이요.”
“일단 석관이나 살펴보자.”
테일러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앙에는 높은 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석관 하나가 있었다. 지금까지 목격했던 묘비의 양상으로 볼 때, 저 안에 있을 존재는 범상치 않은 신분일 가능성이 컸다. 물론 이전과 동일하게 텅 비어있을 수도 있었다.
테일러가 석관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반대편 통로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검은 인형 하나가 쏙 튀어나왔다.
옷 이곳저곳에 그을음이 묻은 시온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눈을 뜨고 내부를 살폈다.
“어?”
“하하, 우리가 먼저 왔구나. 미궁의 룰은 알고 있겠지?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이 주인이라는 룰 말이다.”
그그긍
그때 묵직한 돌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테일러와 석관에 누워있던 존재의 눈이 마주쳤다.
“어···, 주인이 있었네.”
주인은 사람이라 부르기 힘든 몰골이었다. 푸석푸석하고 찢어진 피부 사이로 뼈가 보였다. 눈알이 있어야 할 장소는 텅 비었다. 마치 붕대를 안 감은 미라와 비슷했다.
끄어어!
그래도 소리는 낼 수 있었다.
< 지하묘지(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