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88화 (88/193)

< 지하묘지(2) >

석관에 누워있던 존재가 포효했다.

그워어어!

가까이 있던 테일러는 주인의 목구멍 속이 너무나 잘 보였다. 푸석푸석한 치아, 말라비틀어진 혀, 구멍이 뚫려서 반대편이 보이는 목구멍.

주인의 괴성은 끊이지 않았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테일러의 시간이 죽 늘어났다.

리플렉스 액셀이 발동되었다. 신경 증폭이 일어나서 감각 수용과 뇌의 명령 하달이 빨라졌다.

시간이 길게 늘어나니, 괴성을 지르는 장면조차 영화 재생 배속을 느리게 한 것처럼 변했다. 뚝뚝 끊어진 목소리는 그저 우습게 들릴 뿐이었다.

테일러는 바로 마나소드를 꺼내서 휘둘렀다. 푸른 궤적이 노리는 목표는 주인의 목. 생물 대부분은 목이 잘리면 죽고, 그건 언데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성이라도 남아있다면 대화를 시도해볼 텐데, 미궁을 거니는 모든 존재는 탐험가를 적대했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무조건 선제공격을 했다.

사실 테일러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사고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수십 년간 탐험가로 살아온 본능이 그를 이끌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날이 주인의 목에 접근하고.

빠직!

반투명한 막이 생기며 스파크가 튀었다. 검과 맞닿은 부위를 중심으로 물결이 치고, 밖으로 밀려났던 파동은 다시 안으로 수렴했다.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테일러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주인의 생체 신호를 확인한 매직웨어가 각성제를 투여했다. 흐릿해졌던 정신이 멀쩡해지면서 주변의 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어머님, 치료! 도움!”

대충 외운 성법이 시바의 손을 하얗게 물들였다. 그 상태로 테일러를 부드럽게 받아드니, 빛이 등을 통해 빠르게 스며들었다.

“고맙다. 응급조치가 아니었으면 내상을 입을 뻔했어. 저놈이 펼치는 마법···, 장난 아니야.”

테일러가 몸을 추스르는 사이, 앨런은 적을 분석했다.

<분석>

이름 : 불명

종족 : 지하인

특징 : 마법사

찢어진 피부 사이로 보이는 골격은 지하인과 매우 흡사했다. 몸을 일으킨 주인의 손에는 하얀색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지팡이 끝이 앨런 일행을 겨눴다.

애애앵!

갑자기 나타난 모기떼의 날갯짓 소리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원시림이라 그런지, 마법의 효과 때문인지 모기 하나하나가 주먹 크기였다.

“이런 ㅆ···.”

“보호막!”

인상을 찌푸린 테일러는 샷건을 겨누고, 시바는 [자애의 포옹]이라는 이름도 길게 느껴지는지 대충 불렀다.

그 사이 쇠 구슬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진짜 모기라면 당연히 쓸데없는 공격이지만, 덩치 덕분에 녀석들은 픽픽 쓰러졌다.

추락한 모기의 체액이 바닥에 닿으니. 치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흉악한 액체였다.

“혐오스러운 조합만 꾹꾹 눌러 담았군.”

“아직은 할만합니다.”

앨런이 쇠 지팡이로 모기떼를 겨눴다. 그 끝에서 뿜어진 일직선의 화염이 지우개처럼 혐오스러운 벌레를 지워갔다. 이곳의 영향을 받았는지, 화염조차 흑백이었다.

궁금증이 치솟으나 전투 중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색다른 소음이 앨런의 시선을 가로챘다.

공동의 벽 쪽에서 뼈다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원시림의 생물들이 뼈만 남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암석과 흙을 뚫고 나타났음에도 놈들의 몸은 깨끗했다.

“사령술까지 쓰는 모습을 보니, 모기에게 물렸으면 생명력과 마력을 빼앗겼을 겁니다.”

“사악한 미궁의 괴물이 악독한 언데드로 재탄생하다니···.”

담담하게 상황을 입에 담는 앨런과 달리 시바는 수염을 파르르 떨며 분노했다.

“그래, 사채 이자처럼 혐오스럽군.”

“사채도 쓰셨어요?”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일단 움직이죠.”

앨런은 아까 이용했던 통로를 가리켰다. 여기에 있으면 적에게 포위되는 형국이다. 심지어 벽에서 튀어나오니, 벽을 등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통로는 예외였다.

통로 쪽에 자리를 잡으니 삼면만 주의하면 됐다. 테일러가 왼쪽을, 시바는 오른쪽을 맡았다.

여태 중얼거리던 시바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결한 죽음]”

마법에 턴언데드가 있으면, 성법에는 정결한 죽음이 있었다. 삿된 마력이나 원혼을 정화하고, 신성력이 시체에 머물러서 시체폭발이나 뼈를 이용하는 연계 마법을 방해했다.

성법도 사용자의 성향을 따라가는지, 투사체가 아니라 주먹에 두르는 형상이었다.

테일러는 마나소드와 샷건으로, 시바는 주먹으로 적들을 처단했다. 뼈만 남아서 살아있을 적보다 약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앨런!”

“마법사는 마력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급격히 펼친 방어막과 연달아 사용한 마법 때문에 마력회로가 꼬였나 봐요.”

“그럼 그렇지. 내가 그리 허무하게 날아갈 리가···. 이크!”

그나마 다행인 점은 주인이 언데드를 불러내고 추가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앨런은 원래 이런 상태에 직면하면 화력으로 찍어눌렀으나, 등반 때문에 상자와 수레를 아래에 놓고 와서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야 하나 고민하는 도중, 반대편 통로에 있는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후퇴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기척 숨기기가 얼마나 능숙한지, 근처를 지나가는 해골조차 그녀를 알아채지 못했다.

앨런과 눈을 마주치자 입을 뻐끔거렸다.

‘도와줄까? 내가 8, 네가 2.’

앨런은 처음에 입술의 움직임을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어림없는 제안에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은 마스크 때문에 입술을 보여주지 못하니까.

‘그럼 반반으로.’

절레절레.

‘싫어? 그럼 내가 4, 아니 3···.’

비율이 확 깎였다. 왜 테일러가 검만 빼면···. 나쁜 단어가 떠오른 앨런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시온은 협상에는 소질이 없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급해 보였다.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이라도 있나? 그렇다면 브레이커 측에서는 이곳의 존재를 원래 알고 있었나?’

확실히 브레이커가 선한 기업이긴 했다. 시온의 실력이면 증거인멸이 훨씬 쉬울 텐데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의 비약이 너무 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앨런이 지금까지 경험한 세상은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 갔는데.

‘개인에 따라 다른가?’

양아치를 닮은 요원인 오마르였으면 바로 공격해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

앨런은 기계 팔에게 지팡이를 건넸다. 녀석은 긴 리치를 이용해서 늑대의 두개골을 후려쳤다. 다른 기계 팔은 달려드는 산양의 뿔을 잡고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전장을 살폈다. 끝없이 쏟아지는 적, 점점 안정을 되찾는 주인, 지쳐가는 전위들.

예상 결과는 안 좋았다. 아무 소득도 없이 후퇴하든지, 주인의 기상천외한 마법에 당해서 쓰러지든지.

앨런이 보통의 마법공학자였으면 그랬을 것이다. 거미의 배 위에서 춤추던 룬펜이 앨런의 허리춤으로 회수되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거미 여섯이 은밀하게 이동했다. 전장이 워낙 혼란스러워서 손바닥보다 약간 큰 녀석들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불퉁한 표정의 시온은 제외하고.

앨런의 뒤쪽으로 움직였던 거미들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공동의 천장은 동굴처럼 거칠거칠해서 거미가 매달리기 좋았다.

“앨런!”

“잠시만요. 마법 좀 써볼게요.”

이번에도 테일러가 이름만 불렀지만, 앨런은 그 속뜻을 알아채고 대답했다.

“마법?”

“안 되면 후퇴하죠.”

안타깝지만 탐험이란 이런 것이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짓인데 내가 죽으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시온, 고얀 녀석···.”

사실 도와주는 쪽이 더 창피하긴 했다. 그래도 명색이 교관도 해봤고, 먼저 왔으니 주인이니 뭐니 소리친 체면도 있었다.

앨런은 천장을 바라봤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거미 여섯이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펼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지만,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의 과정을 거친다.

몸속에서 마력의 구조체를 만들고.

입으로 주문을 외워서 밖으로 끄집어냄과 동시에 확장 시킨다.

이때, 상상력과 직관으로 모자란 부분을 채웠다.

앨런은 첫 번째 과정부터 탈락이었다. 구조체를 짜려고 시도하면 마나의 파도가 모래성 허물듯 휩쓸어버렸다. 마력과다증이 장점만 있었다면 병으로 분류되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구조체를 외부에 만들면 어떨까.’

구조체 혹은 수식이 정밀하지 않으니, 당연히 마법사가 펼치는 마법보다는 약했다.

그래도 못할 시도는 아니었다. 드워프의 위성마법도 정밀함보다는 숫자와 규모에서 오는 폭거였다.

양과 질 중 어느 쪽이 중요한지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하나에서라도 압도적인 장점이 있다면, 다른 쪽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거미 6마리 중 3마리가 움직였다. 각자의 배에 큰 룬문자가 하나씩 쓰여있었는데, 먼저 움직인 녀석의 배에는.

[광휘]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찬란한 빛이 떠올랐다. 거미를 중심으로 백색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여기까진 눈에 띄는 효과가 없었다.

그다음 녀석의 배에는.

[부정]

거짓으로 부여받은 생명을 배척했다. 목숨을 잃은 자는 지상을 활보할 게 아니라 땅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양분이 되어야 했다. 그게 이 세상의 법칙이고, 순환의 이치였다.

마지막은 [정화]

더러운 물질을 씻어낸다. 사악한 의지가 담긴 마력을 밀어내고 깨끗함으로 채워 넣었다.

앨런과 이곳 주인의 마력이 충돌하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나고, 반발 때문에 마력이 꼬인 언데드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동작뿐만 아니라 내구도나 힘에도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시바의 주먹질 두세 번에 침묵했다면, 지금은 스치기만 해도 가루로 변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3배 빨리 허물어지면, 이쪽은 힘을 그만큼 아끼고, 다른 쪽으로 분출할 수 있었다.

언데드가 이쪽을 포위했지만, 역으로 에워싸인 형국이 되었다. 탄력을 받은 테일러와 시바가 놈들을 밀어붙였다.

“이대로 놈의 목을 친다. 시바는 앨런을 보호해줘.”

“아뇨, 잠시만요.”

언데드를 녹이는 빛줄기는 일종의 설치형 마법으로 광산의 가로등과 드워프의 위성 마법에서 영감을 얻었다. 당연히 매개체인 거미가 부서지면 마법도 끊겼다.

석관의 주인도 본능적으로 아는지 천장에 달라붙은 아이들을 공격하지만, 거미는 다리가 달려서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다각다각 움직이며 도망갈 때마다 엉덩이가 씰룩거렸다. 그 모습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마력의 실을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는지, 앨런과 눈이 마주쳤다.

그워어어!

여전히 이해 못 할 괴성을 내지른다. 동시에 주인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 광구가 형성되었다.

흑백 세상이라 본래의 색채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앨런은 애초에 마법의 완성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6마리 중 3마리가 정화 마법을 펼쳤다. 그렇다면 남은 3마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주인의 머리 위쪽 천장에 매달린 녀석들은 하나씩 떨어져 내렸다.

먼저 출격한 거미의 폭발이 방어막을 벗겨내고, 두 번째의 화염이 주인의 몸을 잠식하고, 마지막에 몸을 던진 거미가 마력을 정화했다.

폭발로 유명을 달리한 거미와 달리, 다른 거미들은 몸체가 화염에 녹아내릴 때까지 버텼다. 그리고 앨런과 그들의 연결이 끊어짐과 동시에 언데드 무리도 재로 돌아갔다.

“어머님의 품에서 평온하길.”

“집주인도 처리했으니 이젠 우리 차지군. 그럼 어디부터 털어볼까?”

“형제님, 단어 선택이 좀···.”

“뭐, 어때? 사실인데. 깜짝이야!”

갑자기 근처를 지나간 광선 때문에 테일러가 뒤를 돌아봤다. 기계 팔 하나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확인사살을 해야죠.”

새까맣게 탄 주인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앨런은 노박이 준 교훈을 허투루 날릴 생각이 없었다.

앨런은 그 상태로 눈동자만 돌렸다.

“아···.”

시온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시온의 표정이나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한 자세도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아마도 도움을 주고 지분을 요구할 생각이었으리라.

앨런의 생각이 맞았는지, 주인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나서야 흑백 세상이 원래의 색채를 되찾았다.

< 지하묘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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