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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89화 (89/193)

< 지하묘지(3) >

앨런이 발사한 섬광, 정확히 말하면 기계 팔을 매개체로 쏘아낸 열선은 묘지의 주인을 단번에 침묵시켰다. 숯처럼 변한 몸체가 뒤로 넘어가서 산산조각이 날 때 즈음, 뜨거워진 공기도 차갑게 식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앞에 무너진 고양잇과 맹수의 두개골을 발로 한 번 차주고, 앨런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점점 마법사처럼 변한다?”

“제가 진짜 마법사였으면 전투는 훨씬 빨리 끝났겠죠.”

“와···, 자신감···.”

“자랑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사실인걸요.”

담담한 말투에 놀릴 마음도 사라진 테일러는 섬광을 쏘아내고 축 늘어진 기계 팔을 가리켰다.

“고장? 절벽은 이따 어떻게 내려가려고? 업어 줄까?”

“수문장 안구의 출력을 높였더니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냉각과 안정을 마치면 깨어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테일러는 석관 근처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길을 막는 뼈를 발로 툭툭 찰 때마다 그것들은 가루로 변했다.

“이래서야 가져갈 수도 없겠네. 나보고 도굴이니 뭐니 하더니 자기가 더 열중하고 있잖아.”

시바는 상체를 석관에 들이밀고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배를 걸칠 정도로 몸을 숙이니, 두 다리가 붕 떠서 파닥거렸다.

“쓸만한 부장품은 찾았어?”

“몇 개 있긴 한데 정체를 영 모르겠습니다.”

“어디 한 번 보여줘.”

여전히 석관 안쪽으로 엎드린 시바가 왼쪽 팔만 위로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는 투명한 수정이 들려있었다.

“애들 장난감 같은데.”

다음은 만년필이었는데 몸체 부분, 배럴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앨런이 대답했다.

“카트리지에 남아있는 금속을 보면 초기형 룬펜으로 짐작됩니다. 마도구 대부분은 미궁의 것을 본떴으니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 후로 다 삭아서 알아볼 수 없는 종이, 텅 빈 마석, 원시림의 생물 혹은 태양 같은 자연물을 본뜬 금속 공예품 등이 나왔다.

테일러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친 종이가 허물어졌다.

“왜 이런 물건만 있지? 혼자 묻혀있어서 귀한 신분인 줄 알았더니 가난했나···.”

“형제님, 소득은 있습니다.”

시바의 수염에는 금반지나 금줄이 매달려있었다. 본능적으로 금속을 선호하는 드워프라 그런지 앨런이 보기에도 퍽 어울렸다.

“금은방 주인 같아요.”

“나중에 은퇴하면 그러려고 했습니다.”

“수도승이 정년도 있어?”

“테일러 형제님, 같은 일터에서 수십 년 일한 감상 좀 들려주시지요. 항상 즐겁고 가슴 뛰었습니까?”

“나중에는 지루하긴 했지.”

“그런 겁니다. 어머님도 회초리를 드는 대신 고생했다고 등을 두드려줄 겁니다.”

“꿈에서?”

“전통적인 대화 창구입니다.”

“그게 아니라 맨날 그런 생각만 하니까 꿈에 나타나겠지.”

“그래서 어머님을 자주 보나 봅니다. 하하하.”

앨런은 눈에 띄는 소득이 없어서 실망한 둘을 뒤로하고 석관과 주인의 몸을 살폈다.

우선 석관은 표면에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빈 하늘을 향해 엎드려서 숭배하는 사람들이 조각되었다.

앨런이 내용을 머리에 담는 사이, 멀쩡했던 기계 팔은 주인이었던 숯을 천천히 부쉈고, 냉각을 마친 기계 팔은 그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가져왔다.

‘아까 사용했던 화력이면 큰 뼈만 남아야 하는데, 지하인이라 그런지 피부도 숯처럼 변했네.’

툭툭 건드리니 금방 무너지긴 했다. 기계 팔은 아예 가루로 변한 사체를 뒤적거렸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지팡이는 불에 휩쓸리고도 멀쩡하고, 무게는 나무 같은데 촉감은 금속이네.’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물건과 비교하니 길이나 굵기가 비슷했다.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바꿔서 사용해도 좋으리라.

‘감정사를 방문하면 명확하겠지.’

생각을 마친 앨런이 머리를 돌리니, 시온에게 다가가는 테일러가 보였다. 그의 손에는 여러 물건이 들려있었다.

“시온.”

“···.”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봐줄래?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보이는 물건이 수두룩하니 뭘 찾을 수가 있어야지. 여기에서 뭘 얻어야 할지 도와줘라. 힌트라도?”

“흥···.”

시온은 팔짱을 끼며 고개 홱 돌렸다. 온몸으로 자신이 화났음을 표현했다.

기껏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누군가가 먼저 도착해서 손가락만 빨았다. 그런데 자신에게 감정을 요구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테일러는 물러서지 않았다. 세월이 만든 철면피를 들이밀며 다시 말을 걸었다.

“저기 봐.”

“···?”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후배가 기다리잖아.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표정이지? 계속 저렇게 내버려 둘 거니?”

물론 앨런은 테일러가 말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도움은 되니 가만히 있었다. 테일러의 말을 최대한 흉내 내려고 노력하며.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시온은 아예 홀로스킨을 발동해서 얼굴을 덮어쓰고 침묵을 유지했다.

“이럴 거니?”

“···.”

“알았다. 간다, 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질린 테일러가 먼저 항복을 선언하며 멀어졌고, 시바와 달리 공동 오른쪽 벽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앨런은 한 곳에 쌓아놓은 부장품을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저번 홀로스킨보다 보안이나 마법저항력이 향상된 녀석으로 준비했지만, 앨런도 성장하기에 이번에도 내부를 꿰뚫어 봤다. 특징 없는 여성의 얼굴 안쪽에 숨겨진 시온의 본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녀는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테일러나 시바가 새로운 부장품을 발견하면 눈을 크게 떴다가, 확인을 마치면 원래대로 돌아갔다.

앨런은 내부가 안 보이는 척 행동했다. 일단 석관에서 꺼내 금속 공예품을 만지며 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선배, 이건 어때요?”

“난 몰라···.”

완전 무시로 일관하던 테일러와 다르게, 선배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대답은 해줬다. 고요한 눈동자를 보니 가치 있는 물품은 아닌 듯했다.

다른 부장품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수양의 결과인지, 아니면 앨런이 꺼낸 물건이 그냥 장식이어서 그런지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고민하던 앨런은 시온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는 모습을 봤다. 그 시선의 끝에는 기계 팔이 들고 있는 지팡이가 있었다.

다른 물건을 살피는 척하며 기계 팔을 살짝 흔드니, 시온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너무 당연한 결과인가?’

테일러와 시바가 지금도 부장품을 찾긴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귀중한 물건은 주인이 직접 가지고 있었으리라. 더군다나 이 지팡이는 화염에 휩싸이고도 그을음 하나 없었다.

앨런은 일부러 목소리를 흘렸다.

“그냥 평범한 지팡이인가.”

시온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래도 챙겨가야겠지.”

이번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고 가기 귀찮은데 그냥 버리고 갈까?”

시온의 얼굴이 편안해졌다가, 자신을 놀린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앨런이 살짝 움직여서 얼굴을 보려 하자, 이번에는 두 손으로 가려버렸다.

‘뭔가 부족한데.’

지팡이가 쓸만해 보이긴 하는데, 시온까지 파견할 일인가 싶었다. 그녀의 실력이라면 훨씬 중요한 임무에 투입하고도 남으니까.

일단 앨런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선배가 심심해서 자원했든지, 아니면 지팡이 혹은 무언가 중요한 물건이 있든지.’

브레이커도 기업이니 인력을 허투루 소모할 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면 23층에 무력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나? 기업 간 분쟁이라든지, 구더기 사냥이라든지.’

확정된 사실이 없어서 생각이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대로는 끝이 보이지 않음을 직감한 앨런이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동시에 테일러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알려주면 편한데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아까 놀려서 그래요.”

“농담이지?”

안 놀렸어도 시온이 진실을 말해주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앨런이 가만히 있으니, 테일러가 발치에 무슨 글자를 적었다.

[나침반은 어때? 너도 글로 적어. 시온, 쟤라면 아무리 작게 말해도 엿들을 테니까.]

그의 말대로 앨런은 나침반을 꺼내서 확인했다. 바늘에 달라붙은 금빛 가루를 모두 잃고 평범해졌다. 물론 오파츠긴 하니 문을 찾을 때는 여전히 사용 가능하리라.

[생각해보니 선배가 여기에 오려면 다른 열쇠가 필요하겠군요.]

[수집가가 수작을 부린 나침반 말고 다른 열쇠가 있다는 뜻이지. 그것도 여러 번 열 수 있게.]

[브레이커의 열쇠가 진짜겠네요.]

나침반은 망치로 자물쇠를 강제로 개방한 것과 유사했다. 어쩌면 시온의 차분함도 그런 사실에 기반했으리라. 자신은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열쇠가 있고, 상대는 우연으로 입장했을 거라는 믿음.

[그렇다면 묘지는 마석 광산처럼 일정한 기간을 두고 재생하는 시설이겠군요. 지팡이는 어딘가에 사용하는 소모품이고요.]

[갑자기 논리의 비약이 있는데···. 어쨌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테일러가 발로 흙을 문질렀다. 밀담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느새 이쪽으로 몸을 돌린 시온의 눈동자가 계속 지팡이를 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무엇을 노렸는지 거의 확실해졌다.

“아···.”

앨런과 눈이 마주치자 시온이 안타까운 음성을 흘렸다. 어차피 들켜서 그런지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지팡이···.”

“잘 쓸게요.”

“······.”

이제 찾을 물건도 다 찾았겠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시온과 함께 원래 들어왔던 통로로 향했다.

“여기 몇 번 와보셨죠?”

“응···.”

“이쪽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던데, 왜 함정이 있는 통로로 가셨나요?”

“재밌잖아.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도 못 했고···.”

첫 번째 방에 도착하자 위를 향해 빙글빙글 꼬아진 통로 입구가 보였다. 시온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틈을 노린 앨런이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천천히 올라오세요.]

테일러가 확인했다는 의미로 바닥을 문댔다.

“형제님들 지금···.”

“아이고 죽겠다!”

테일러가 검지로 입술을 가리는 사이, 앨런은 기계 팔과 룬문자의 힘을 빌려서 통로를 올라갔다.

조금 올라가니 멈춰있는 시온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아저씨가 힘들다고 하셔서요.”

“노인네 좀 그만 부려먹어!”

저 아래에 있는 테일러가 추임새를 넣듯이 곡소리를 냈다. 시온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맞지.”

그 소리를 들었는지 테일러의 앓는 음성이 잠깐 끊기긴 했다.

마침내 올라간 절벽, 세찬 바람이 앨런의 땀을 강하게 밀어냈다.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시온은 시바가 올라오는 모습까지 보더니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나빴어. 안녕.”

“다음에 봐요.”

앨런의 음성은 거센 바람에 흩어졌지만, 시온이라면 들었으리라. 그녀는 윙슈트를 펼치더니 날다람쥐처럼 빠르게 강하했다.

앨런이 난간까지 걸어가는 사이, 어느새 봉우리를 둘러싼 숲을 절반이나 주파했다. 상대를 몰라보고 접근한 비행 생물은 섬광이 번쩍임과 동시에 반으로 갈라져서 추락했다.

시온은 점점 작아지다가 점이 되고, 마침내 안 보일 정도까지 멀어졌다.

앨런은 그걸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위에는 시바만 있었고, 테일러는 여전히 통로에서 버티고 있었다. 통로는 앨런의 추측대로 사람이 안에 있으니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다시 내려가죠.”

“또?”

“확인할 게 있어서요.”

테일러와 시바가 구시렁거리긴 했으나 앨런의 말을 따랐다. 아까는 시온 때문에 무언가를 진행하기엔 부적합한 상황이었으니까.

다시 공동으로 되돌아간 앨런은 금속 공예품 중 태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석관을 향해 다가갔다.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

“형제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침반을 찾을 때 적혀있던 글귀요. 그리고 나침반이 태양을 담으니 이곳의 문이 열렸었죠.”

“구름, 호수, 달, 산 조각이 있고, 그중에는 태양도 있군요.”

“네, 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앨런은 사람들이 숭배하는 빈 하늘에 태양을 붙였다. 어떤 홈도 없이 매끈하기만 한 부분에 태양이 찰싹 달라붙었다.

“아무 일 없군요.”

“잠시만요.”

앨런은 엎드린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의 머리에 선을 긋는다면 모눈종이처럼 격자가 생길 것이다. 앨런의 손가락이 별문자 누르듯 머리를 눌렀다.

“어둠을 밝힐 등불을 내려주소···서.”

마지막 머리를 누르니.

그그긍!

석관이 밀리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 지하묘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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