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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90화 (90/193)

< 지하묘지(4) >

성인 2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도 될 넓이의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니, 위의 공동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직사각형의 묘비가 가득했는데, 끝을 보려고 해도 창문에 김이 서린 것처럼 시각적 방해가 들어왔다.

달빛이 약한 밤처럼 사물이 제대로 안 보였기에 분위기는 매우 음산했다. 이런 장소에서 공포영화를 찍는다면 추가 CG 작업은 필요 없으리라.

위층보다 훨씬 어둡기에 시바의 손이 자연스럽게 헤드 랜턴으로 향했다.

“이상한 장소군요.”

“아니야, 랜턴은 만지지 마. 이런 장소에 강한 빛을 비추면 오히려 주변이 안 보여. 가만히 있으면 적응될 테니 기다려.”

앨런은 새로 얻은 지팡이를 등산스틱처럼 짚고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나 농도가 굉장합니다.”

“그래, 나도 느껴진다. 여기에서 수련하면 금방 늘겠다.”

“여러모로 아깝군요.”

말을 꺼낸 앨런은 수련하면 증상만 악화하고, 테일러는 인공 마나하트라 수련할 필요가 없고, 시바는.

“저희는 약간 다른 방식이라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마나하트가 자연적으로 생성하는 마나를 기도로 변형하기에 외부의 영향을 덜 받습니다. 그래도 이곳에 있으면 신성력의 회복이 빨라지긴 하겠군요.”

시바가 말한 기도는 모신교의 마력수련법이다.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기에 사람들도 기도라고 불러줬다.

대화를 듣던 테일러는 근처 묘비를 살짝 부러트렸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바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형제님. 아무리 지하인의 묘비라도 부수시면 안 됩니다.”

“금 간 부분이 흉측해 보여서 다듬어줬어.”

사실 다른 이유가 있다. 앨런도 그걸 알기에 남몰래 묘비 하나를 조금 훼손하고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전투를 끝내고 휴식도 없이 통로를 왔다 갔다 했으니, 탐험을 이어가기 전에 몸을 풀어줄 시간이 필요했다.

앨런은 압축 비스킷을 물에 녹여서 천천히 먹었다. 테일러는 초코바를 단숨에 욱여넣었다.

“여기를 묘지라고 불렀는데, 아래가 훨씬 그럴싸하네.”

“위는 가짜, 아래가 진짜겠죠. 미궁의 창조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장소를 만들었을까요?”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진실을 밝히는 논문을 게재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석학이 될 정도의 이슈니까.

궁금증을 고이 접은 앨런의 눈이 석관으로 향했다.

“주인이 아니라 묘지기였군요.”

휴식을 마치고, 셋은 다시 내려갔다. 앨런과 테일러가 부쉈던 묘비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테일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래서 탐험을 못 끊지.”

“형제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식물과 동물 그리고 괴물만 ‘완전히’ 부술 수 있다. 바위나 흙 등은 표면을 긁어놔도 다시 원상복구 돼. 묘비 같은 인공물도 마찬가지야.”

“원시림의 숲을 그냥 밀어버리면 동물들이 모습을 감출 수 없으니 사냥이 편해지겠군요.”

“아니, 그건 불가능해. 식물의 생장 속도가 너무 빠르거든. 비가 안 와도 자고 일어나면 머리까지 자라있어. 앨런은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성질을 지녔습니다. 가끔 법칙을 깨는 장소가 있는데, 그 안에는 특이한 무언가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물건 역시 재생성되지 않습니다.”

“어제 꿈에서 어머님을 못 뵈었는데 이런 행운이···. 기대되는군요.”

“착각은 금물입니다. 특이와 고가는 다른 말이니까요.”

묘비에 적힌 문자는 위와 마찬가지로 읽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는다면 해독의 열쇠가 될 수도 있었다.

앨런은 천천히 걸었다. 계단 근처를 일렬로 지나가는 묘비들을 따라서 계속 직선으로 움직였다. 중간중간 휴게실로 보이는 작은 건축물이 있었는데, 벽돌로 만든 버스 정류장을 닮았다.

테일러가 내부를 힐끔 보며 말했다.

“묘지기가 머무는 장소겠지? 지금 4번째로 보는데 간격이 10분 정도 된단 말이지. 아래는 굉장히 넓구나.”

앨런은 묘지의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나 끝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휴게실을 눈에 담고 다시 전진했다.

어두운 장소, 똑같이 생긴 묘비들, 축축한 공기가 주는 정신적 피로감은 굉장히 짙었다. 기대감이 가라앉으니 차라리 무언가가 나타나길 바랄 정도였다.

“6번째 휴게실입니다. 도대체 몇 명이 죽었기에 이렇게 거대한 묘지를 만들었는지, 이곳의 끝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어머님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가시죠.”

“잠시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앨런의 말에 2명의 시선이 모였다. 답변을 갈구하는 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휴게실을 가리켰다.

“휴게실의 모양, 벽돌에 생긴 균열의 크기와 각도가 같습니다. 우리는 넓은 장소를 탐험하는 게 아니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도는 중입니다.”

“뭐? 그럼 위로 올라가는 문은? 휴게실 옆에 있는데 지금은 안 보이잖아.”

“미궁이니까요.”

어떤 물음에도 미궁이라고 대답하면 훌륭한 설명이 되었다. 수많은 탐험가가 들락거려도 미궁의 세상은 여전히 미지로 가득했다.

쳇바퀴의 햄스터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행은 아예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짐을 풀고 여기저기에 기대거나 앉아서 앨런이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봉우리에 숨어있다가 지금까지 등 쪽의 외골격에 매달려 있던 거미들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2열 종대로 모인 녀석 중 가장 끝에 있는 거미 하나가 묘비를 따라 움직였다.

앨런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거미 하나는 배 위로 화면을 띄웠다. 지금 정찰 중인 거미의 시야가 화면에 잡혔다. 시야가 낮아져서 그런지 묘비 하나하나가 거대한 빌딩 같았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화면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노이즈가 생겼다. 이상 현상은 곧 끝나고, 다시 선명해진 화면에는 앨런이 보였다.

아까 오른쪽으로 보낸 거미가 왼쪽으로 돌아왔다.

시바가 금반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참 신기하군요. 흥미가 생깁니다.”

“태평하긴. 우리 지금 갇혔어.”

“어머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 있으면 고난과 역경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이참에 입교하시겠습니까?”

“결혼 못 하잖아.”

“테일러 형제님이 결혼이요?”

테일러의 얼굴 근육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 몰라?”

“사귀는 분은 있습니까? 혹시 웨스턴스카이의 사장님? 그런데 애인과 대화할 때 왜 그렇게 목소리를 덜덜 떠십니까?”

“······.”

당연히 애인이 아님을 시바도 알면서 놀리는 것이다. 요화의 입장에서 테일러는 귀중한 손님의 ‘보호자1’이었다.

“착각을 정정하면 모신교는 결혼 가능합니다. 어머님의 가르침 중 하나가 사랑인데, 교인들 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조용히 해. 집중하는 모습 안 보여?”

앨런은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주인을 중심으로 거미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였고, 그 반경은 점점 넓어졌다.

앨런의 머릿속에는 6개의 화면이 그려졌다. 한 마리당 카메라 아이가 4개니 24개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복잡한 화면 속에서 특이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앨런이 아니라 키키가 여기에 있었으면, 뇌 확장 장치의 연산으로 발생한 열을 식히다가 수랭 파이프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한동안 침묵하던 앨런이 눈을 뜨니, 쪼그려 앉아있던 시바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형제님 찾았습니까? 아니면 별문자로 어떻게 안 됩니까? 등불이 어둠을 밝힌다?”

“석관의 머리처럼 격자가 그려지는지 찾아봤는데 없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앨런이 다시 생각에 잠기고 몇 시간이 흘렀다. 교대로 잠을 청하던 시바와 테일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제님, 묘지기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을 여는 열쇠 아냐? 사용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였다면 시온이 그냥 돌아갔을 리가 없지. 어떻게든 보내려고 했을걸.”

“열쇠가 하나의 자물쇠만 열라는 법은 없죠. 아니면 이곳의 시련 자체가 진정한 열쇠를 만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눈을 뜬 앨런이 지팡이로 손을 뻗었다. 은회색 지팡이 표면은 매끈했고, 외형은 쇠파이프와 비슷했다.

“묘지기가 하는 일을 생각해봤습니다. 도굴꾼을 막고, 새로운 입주민의 자리를 만드는 등 묘지를 가꾸죠.”

“그래서?”

“묘지기가 묘지를 해칠 리가 없죠. 그럼 남은 장소는 우리가 휴게실이라 이름 붙인 건물뿐입니다.”

앨런이 지팡이 끝으로 휴게실의 벽돌을 두드렸다. 말만 휴게실이지 한 사람이 다리를 뻗고 잠을 청하긴 충분했다.

“일단 부숴보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테일러의 발과 시바의 정권이 벽돌을 타격했다. 쌓인 심심함이 많았는지 동작 하나하나가 매우 거칠었다.

휴게실을 1/3 정도 남겨놨을 무렵, 철거작업을 진행하던 2명이 동작을 멈췄다.

옆으로 밀어둔 벽돌이 신기루처럼 증발하고, 휴게실이 있던 터에는 평평한 바닥만 남았다. 그 중앙에는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누가 봐도 지팡이의 굵기와 비슷했다. 앨런이 지팡이를 깊숙이 꽂으니, 마력이 진동했다.

휴게실이 있던 터를 중심으로 마력이 회오리쳤다. 묘비들이 가루가 되고, 폭풍의 대열에 합류했다. 회오리는 점점 압축되더니 바닥에 꽂힌 지팡이를 덮쳤다.

기현상이 끝나고, 앨런은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촘촘히 그리고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작은지 선 혹은 문양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사실 문자라고 하기에도 곤란했다. 제대로 살피면 ‘□□□’와 비슷하게 공백으로 보일 테니까.

앨런이 고개를 들었을 때, 묘지는 사라졌다. 땅을 대충 파낸듯한 공동만 있었다.

“대규모의 환상 마법이었군요. 실체와 구별할 수 없는···.”

범상치 않은 마법 혹은 신비리라. 앨런은 이곳에 환상을 부여한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시바 역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앨런을 불렀다.

“형제님. 지팡이의 문자는 무슨 의미일까요?”

“묘비에 적는 문자는 보통 정해져 있죠.”

“생일, 사망일, 유언 그리고 이름이···, 설마?”

“제 생각에는 이름 같습니다.”

공동에 남은 건 오직 흙뿐. 자연스럽게 일행의 발걸음이 위로 향했다. 계단을 빠져나왔을 때, 시바가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묘지기는 묘지를 해치지 않는다고 했잖습니까.”

“네.”

“그럼 묘비를 하나라도 부쉈으면···. 그러고 보니 테일러 형제님이 묘비를 살짝 뜯어낸 거로 기억합니다만···.”

“그 정도는 세이프인가 보지. 그리고 앨런도 살짝 부쉈다.”

책임을 슬그머니 나누려는 행태에 시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작 앨런은 신경도 안 쓰고 다음 계획을 말했다.

“혹시 모르니 사냥 좀 하다 가요.”

“휴식은?”

“변명거리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봉우리에서 내려가니 표범이 고개를 슬쩍 들었고, 상자는 집게 팔을 파닥거리며 수레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싱싱한 다이어울프 3마리가 들어있었다.

“그냥 돌아가도 되겠네요.”

숲을 빠져나간 일행은 기지로 향했다. 브레이커의 기지가 보이자,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원시림 땅은 1m 정도 팔 수 있어.”

“파낸 흙을 벽 앞뒤로 배치하면 회복력 때문에 벽을 꽉 잡아준다는 말씀하려고 하셨죠?”

“그래···. 잘 아네.”

대사를 빼앗긴 테일러가 침묵한 사이, 외성으로 진입한 일행은 시온과 마주쳤다. 누가 봐도 기다렸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이리 늦었어?”

“중간에 사냥감을 마주쳐서요. 추격하다 보니 좀 헤맸습니다.”

시온은 수레에 실린 거대한 늑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내성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테일러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심장 부근에 올린 손의 엄지를 치켜세웠다.

< 지하묘지(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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