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91화 (91/193)

< 파워슈트(1) >

지하묘지에서 기묘한 지팡이를 얻은 앨런은 브레이커의 기지에 캠프를 차리고, 원시림 21~23층을 돌아다녔다.

매번 같은 장소만 돌아다니면 지겨워질 법도 하지만, 매번 위치를 바꾸는 문과 다양한 패턴으로 등장하는 생물들 덕에 언제나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기지에 복귀해서 사냥의 전리품을 정산하던 앨런은 신분증의 정보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30일이나 걸렸네요.”

“돈으로 신분을 사려는 것들을 막으려는 조치지. 어차피 그런 놈들은 잠깐의 흥미로 탐험가 신분증을 만들려는 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리면 지루해서 떨어져 나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아니라 돈으로 신분증을 갱신하려는 사람들은 원시림을 돌아다니는, 손바닥만 한 모기나 거머리만 봐도 지상으로 발을 돌릴 확률이 높았다.

마침내 도달 계층이 바뀌었으니 가장 큰 목적은 달성했다. 다음 탐험부터는 입장 시간이 크게 단축되리라.

테일러에게 정산을 맡긴 앨런은 천막에서 마도구를 수리했다. 난로를 수리하는 도중, 천막이 걷어지며 빛이 들어왔다.

“너무 어두운 장소에서 그러면 시력 떨어진다. 그보다 빅 뉴스!”

“심심해서 또 장난치시는 거 아니죠?”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응원을 장난이라니···. 이번에는 아냐. 진짜야.”

“말씀하세요.”

앨런이 고개 들었다. 고친 난로에서 피어오른 불이 천막 내부에 은은한 빛을 선사했다. 테일러는 기지 내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풀어냈다.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브레이커에서 이번 달에 보내기로 한 탐험대가 어떤 이유로 취소됐다고 하더라.”

“형제님, 호들갑 떨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천막 구석에서 잠을 자던 시바가, 그의 말로는 잠이 아니라 접신, 침낭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호들갑이라니.”

테일러의 손가락이 앨런 근처에 있는 지팡이 가리켰다. 난로의 불빛 때문에 표면이 빛났다. 문자가 너무 빽빽하고 세밀해서 알 수 없는 문양처럼 보였다.

“원래는 시온이 가져갔어야 할 물건을 우리가 챙겼잖아. 덕분에 시온이 한동안 우릴 따라다니긴 했지만.”

“모종의 장소를 여는 열쇠라는 가정이 진실로 변했다는 말이군요.”

앨런은 테일러가 하려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상황과 단서 몇 개를 조합하니 판단은 쉬웠다.

“마침 시기가 공교롭잖아. 탐험대는 31층 이하가 목표였으니, 굳게 닫힌 문은 그곳에 있겠지.”

“그 전에 원시림을 돌파할 필요가 있죠. 이번에 올라가면 파워슈트를 완성할 생각입니다.”

앨런은 상자의 서랍에 물자를 보관하고 일어났다. 상자는 집게발을 열심히 놀리며 강화외골격 착용을 도와줬다.

따가운 시선을 느낀 앨런이 고개를 돌리니, 테일러가 이쪽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고 있었다.

“형제님, 얼굴이 너무 불경합니다.”

“그건 무슨 뜻이야? 넌 기도나 하고 있어. 앨런, 나는?”

“아저씨도 이참에 업그레이드하죠.”

“우리 돈도 많이 벌었으니, 이번에는 가성비 따지지 말자. 마력을 운용할 때 가슴이 뜨겁단 말이다.”

“발열은 그 제품 특징입니다. 허용범위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매직웨어 사면 되잖아. ···그럴 거지?”

원시림은 미로나 동굴과 비교하면 수입이 월등히 좋았다. 이번에 올라가면 별문자 해석본을 사고, 파워슈트 제작과 테일러 업그레이드를 해도 돈이 남을 만큼.

물론, 그만큼 위험한 장소기도 했다. 하이리턴은 하이리스크와 언제나 같이 다녔으니까.

기지를 빠져나온 앨런은 미리 준비해둔 마석을 나침반에 먹였다. 나침반은 보통 양극을 가리키는 물건이고, 미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늘 한쪽이 입구를 다른 쪽은 출구를 가리켰다.

위층으로 향하는 문을 찾은 앨런은 몸을 돌렸다. 마침 23층 중앙에 있는 봉우리가 햇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가봤지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수집가가 나침반에 집어넣은 마법 혹은 신비가 전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나, 새로 얻은 지팡이가 있어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문을 통과하고, 뒤에서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니, 표범과 상자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둘은 사냥 때문에 외피가 많이 손상되었다. 역전의 용사처럼 보여도 내구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시작은 상자였다. 표범의 외장갑이 탐스러워 보였는지, 아니면 수거할 대상이라고 여겼는지 집게발을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당연히 표범은 앞발로 쳐냈고.

“쟤네 뭐하냐? 벌써 인공지능이 싹 텄어?”

“그건 아닙니다.”

‘별문자 중급 해석본1’은 행동 패턴의 다양화에 관한 서술이고, 앨런 나름대로 책에 적혀있지 않은 부분도 실험하며 적용했다.

말머리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인공지능은 자유와 예측 불가능을 기반으로 싹을 틔운다. 상자와 표범의 행동은 앨런 나름대로 문구를 적용한 결과였다.

‘책의 흐름을 보면 내가 새긴 별문자가 2~3권에 해당하는 내용이겠지.’

그래도 어떤 신기한 지식이 있을지 모르니 책은 사야 했다. 아무리 하찮다 해도 언젠가 작은 톱니바퀴가 될 수도 있으니까.

상자와 표범을 떼어놓은 앨런은 지상에 도착했다.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갑네요.”

“하얀 쓰레기.”

“수도원의 아이들이 좋아하겠군요.”

3명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요새를 빠져나와 도로로 시선을 옮기니, 공무원들이 제설 작업을 하고 있었다. 차로 높이 쌓인 눈을 밀어버리면 불의 정령들이 나머지를 녹이고, 물의 정령들이 배수로로 옮겼다.

저 멀리, 높은 빌딩 위로 홀로그램 공익광고가 펼쳐졌는데, 새해에는 마음을 다잡고 범죄를 멀리하자는 내용이었다.

앨런이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메이즈시티답군요.”

“범죄율을 보면 그나마 미궁이 나아. 지상의 피해자들은 약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탐험가들은 전부 무기를 들고 있어서 저항할 순 있으니까.”

집으로 사용하는 창고로 돌아가니, 샷건을 든 비토가 앨런을 맞이해줬다.

“도둑인 줄 알았잖아.”

“살아있었군요.”

“인사가 왜 그래? 오히려 내가 할 말 아냐? 그나저나 미궁 탐험을 엄청나게 오래 했네. 거의 50일 정도 지났나?”

앨런이 수긍의 몸동작을 보내고, 테일러가 비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인사가 왜 그러긴. 애송이가 죽었을까 봐 착한 앨런이 걱정해준 거지.”

“네?”

“왜 야매 의사나 마법공학자 실력이 뛰어난지 알아?”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실력이 모자라면 고객의 클레임에 죽기 때문이죠.”

실력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불법의 세계에서는 경력이 아니라 진짜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시바가 냉장고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성수를 접하겠군요. 알맞게 숙성, 아니 정화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같이 가.”

테일러도 이번에는 한마음이라서 딴지 안 걸고 뒤를 따랐다. 앨런은 문 근처에서 비토를 마주 봤다.

“아저씨가 저런 말 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롤프 씨가 받는 수수료에는 보호비도 포함되어있으니까요.”

“나도 아로마아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그것 하나 모를까···.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힘들었는데 점점 할만해 지더라. 한번은 골렘 의수 수리를 실수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고 팁 주는 손님도 있었어.”

비토가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현금 칩을 꺼냈다. 앨런이 가만히 보고 있으니 억지로 손에 쥐여줬다.

“이번 달 장비 대여료 및 숙박비.”

“그냥 알려준 계좌에 넣어주시지 그랬어요.”

“직접 받는 편이 더 기분 좋잖아. 계좌는 숫자놀음 같아서 정이 안 가.”

“수입은 괜찮았나요?”

“수수료나 대여료 빼면 나한테 온전히 떨어지는 몫이 400만 정도 돼.”

“그럼 이 칩에는 100만 코인이 들어있겠군요. 이건 그냥 비토가 사용하세요.”

앨런이 칩을 상의 주머니에 직접 넣어줬다. 비토가 만류하긴 했는데, 시늉만 하고 앨런의 손을 막진 않았다.

“보너스야?”

“그런 말이 있죠. 코 묻은 돈.”

앨런이 문을 닫으며 창고 중앙으로 향했고, 비토가 헐레벌떡 뒤따랐다.

“100만이 그렇게 느껴진다고? 그럼 탐험가는 도대체 얼마나 버는 거야? 목숨 수당이 포함되어서 그렇겠지만···. 나도 이참에 미궁을···.”

비토가 헛된 망상을 중얼거렸다. 위험을 싫어하는 성격이니 내일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릴 것이다. 클리닉에서 그를 설득할 때, 제물로 바쳐지는 영상이 없었다면 가만히 있었으리라.

샷건의 탄약을 빼낸 비토가 상자에 집어넣었다.

“혹시 도둑이 방문했어요?”

“어리숙한 녀석인지 내가 소리치니까 도망가더라. 메이즈시티 도둑이라 긴장했는데 그냥 애송이였어.”

비토의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앨런의 시선은 어깨를 지나쳐 위로 향했다. 5m 높이의 천장에는 철골과 파이프 그리고 케이블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데, 그곳에는 거미들도 숨어있었다.

앨런은 그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야 비토도 평소에 긴장하고 날래게 행동할 테니까.

도망쳤다는 도둑은 겁 많음을 자책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이라 목숨을 건졌다. 기계는 사람과 달리 자비가 없었다.

시선을 돌린 앨런은 H 형태의 정비대에 매달린 파워슈트로 손을 뻗었다. 50일이나 지나서 그런지 덮은 천에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다.

옆에는 앨런이 내려가기 전에 주문한 박스가 쌓여있었다. 현대의 금속 정밀 가공은 굉장히 뛰어나서 부품 하나하나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소독약 냄새가 날 정도로 진한 성수를 음미하던 시바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앨런 형제님은 쉬지도 않는군요.”

“쟤는 저게 휴식이야. 마도구를 만지기만 해도 세로토닌이 펑펑 뿜어져 나올걸.”

“이번에는 얼마나 쉬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내가 정하는 게 아냐. 앨런의 정비가 끝나면 휴식도 끝나.”

“고행이 따로 없군요.”

“탈퇴하려고?”

“아닙니다. 몸은 힘들어도 점점 충만해지는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수도원에서 오랜 기간 수행해야 얻는 성과를 겨우 50일 만에 얻을 줄은 몰랐습니다.”

시바는 흡족했다. 어차피 지상에 남아있어도 병원 업무를 도울 테니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럴 바에는 실력이 확실히 향상되는 미궁이 훨씬 나았다.

“잘 선택했어. 젊었을 때 바짝 벌어놔야 나중에 편하지. 그게 돈이든 실력이든.”

두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토는 앨런에게 바짝 붙어서 구경했다.

“그건 뭐야?”

“팔뚝에 부착할 마탄 발사기입니다. 수납 가능한 형태라 걸리적거릴 일도 없습니다.”

“이건?”

“마력융합로를 만들 부품입니다.”

연이은 질문에도 앨런은 꼬박꼬박 대답해줬다. 답변 자체가 복습이었고, 상기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었다.

“마력융합로?”

마력융합로는 마석을 소모만 하는 마력로와 달랐다. 마석 합성의 원리가 적용된 마도구로, 마석을 합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마력이 혼입되며 용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이용했다.

그렇게 얻은 마석은 다시 소모하고, 텅 비려고 하면 다시 합성을 시도했다.

물론 마석의 내구도 때문에 교체가 필요해서 영구적인 기관은 아니었다.

“어떻게 만들게? 핵심 기술은?”

“마석 합성 기술은 알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꼭꼭 숨기는 비밀을? 기업이라도 털었어?”

“네.”

“뭐?”

비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궁 19층에 있는 록하트의 마석 광산을 뒤엎는 과정에서 얻었습니다.”

“에너지기업을? 참 열심히 사는구나···.”

비토는 격차를 절감하면서도 열심히 달라붙었다. 자신이 아는 앨런이라면 쫓아내지 않으니까. 물론 그에 따른 대가는 있었다.

“맡긴 부분 처리는 끝났나요?”

“아직. 너무 어렵네.”

“···?”

“너 말고 나한테는 어렵다고···.”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작업을 이어갔다. 비토는 두 손뿐만 아니라 기계 팔까지 다루는 모습을 구경했다.

삐―

기묘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상자가 집게발을 딱딱거리고 있었다. 왠지 비웃는 것 같은 동작이라 마음이 울컥거렸다.

< 파워슈트(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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