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92화 (92/193)

< 파워슈트(2) >

룬프린터는 룬문자를 작동에 필요한 최소 크기로 새길 수 있는 장비다. 사람의 손보다 빠르고 정밀해서, 마법공학의 필수품 중 하나다.

마력의 흐름을 살펴야 하기에 온전히 맡길 수는 없어서, 마법공학자가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그야말로 사소한 문제다.

앨런이 룬프린터의 시작 버튼을 누르자, 기계에 의해 제어되는 노즐이 잠에서 깨어났다. 녀석이 노리는 대상은 네모난 판 위에 놓인 파워슈트의 외장갑. 그 위를 바삐 움직이며 그림을 그렸다.

얇은 노즐이 마석 가루가 섞인 금속을 매우 가늘게 사출하고, 빨갛게 달아오른 금속 실은 룬문자의 형태로 자리 잡은 뒤 천천히 식었다.

작업을 마친 앨런이 밝은 빛 아래에서 불량이 있는지 확인하는 도중, 옆에 있던 비토가 고개만 들이밀었다.

“최소 거리를 무시하고 새기게? 룬문자 사이의 마력 간섭은 어쩌려고?”

“[강화][가속][강화][가속], 이런 식으로 한 줄씩 떼어놓고 새겼습니다. 필요한 부분만 활성화하면 되니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도 되긴 하는데···, 음, 너라면 통제 실패는 없겠지.”

“이것으로 프로토타입, 완성입니다.”

앨런은 외장갑을 파워슈트의 가슴 부분에 끼웠다. 금속 및 합성소재로 이루어진 파워슈트는 근위병이 사용했을 때의 외형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그냥 보면 기초가 근위병의 파워슈트인 줄 모르리라.

“원본이 남아있긴 해? 원래 부품이나, 골격, 룬문자 같은 거 말이야.”

“처음에는요.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니 뱀 허물처럼 전부 벗어버렸네요.”

“그러다가 예산이 초과해서···.”

비토가 말을 하다 말고 긴 소파를 힐끔 쳐다봤다. 그 위에는 테일러가 누워있었다.

파워슈트를 만들다가 여윳돈을 전부 사용해서, 업그레이드를 기대하던 테일러가 크게 실망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축 처진 모습을 보면 누구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돌이가 예산이나 시간을 초과하는 일은 흔하죠. 그래야 성과가 제대로 나오기도 하고요.”

“정론은 맞는데···.”

비토가 눈치를 보는 사이, 앨런은 상자의 도움을 받아서 파워슈트를 착용했다. 근위병 때와 비슷하게 등판 쪽이 열리며 주인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가까이 다가간 앨런이 먼저 발을 넣고 몸과 팔까지 들이미니, 열렸던 장갑이 틈 하나 없이 야무지게 닫혔다.

삐―

“쉬어도 돼.”

상자는 룬프린터가 신기한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집게발을 고이 접어둔 상태기에 앨런은 안심하며 착용감을 만끽했다.

덩치도 키도 한층 커졌다. 미궁 탐험가치고는 여리여리한 몸에 처음으로 위압감이 깃들었다. 물론 일반인 상대로나 먹히고, 탐험가들에게는 ‘돈 좀 있는 탐험가1’로 느껴질 테지만.

앨런은 간단한 성능 테스트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오토마톤의 부품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200kg 정도 되던가?’

그 앞까지 걸어가서 양손으로 상자 밑을 덥석 붙잡았다.

“야, 허리, 허리!”

비토가 소리를 치기도 전에 앨런이 상자를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무게감이 느껴지긴 해도,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비토는 은은한 빛을 뿜는 파워슈트를 보며 뻗었던 손을 내렸다. 앨런이 무엇을 착용했는지 잠시 망각했었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그런 물건을 들 때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면 안 돼. 곧게 펴야지.”

“평소에 이럴 일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할게요.”

앨런이 힘쓰는 일을 얼마나 하겠는가. 전부 다른 사람이나, 도구의 능력을 빌리지.

상자를 내려놓고 파워슈트의 상태를 시각화했다. 각 부위에 자리한 영혼석과 센서가 왼쪽 눈과 연동되었다.

먼저 해부도처럼 팔을 살짝 벌린 파워슈트의 이미지가 나타났는데, 모두 초록색, 즉 정상이라는 뜻이었다. 그 옆으로는 문자가 주르륵 나열되었다.

<파워슈트 상태>

내구도 : 99%

마력융합로 : 99%↓

룬문자 가동률 : 10%

평가 항목은 일단 3가지. 일단은 사용해보고 필요하다면 항목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바이저를 올린 앨런은 마침 테일러와 눈이 마주쳤다.

“행복하니?”

“네.”

“그래, 네가 기쁘다니 나도 만족한다.”

내뱉는 말과 나무늘보처럼 축 늘어진 몸뚱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기력한 테일러를 보던 앨런이 비토에게 물었다.

“출근 시간이 언제죠?”

“오후 12시. 지금쯤 가면 딱 맞겠네.”

“언제까지 일하세요?”

“수입이 괜찮으면 빨리 끝내는 날도 있어서 탄력적이야. 오후 6시에 끝낼 때도 있고 밤 12시까지 할 때도 있고.”

한 달 동안 수수료 떼고 비토의 손에 온전히 들어온 돈은 500만 코인. 계속 자정까지 일했으면 2배는 벌었을 것이다.

물론, 해결사와 용병이 모이는 술집이라는 장소의 특수성도 한몫했다.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고, 직업 특성상 마도구 수리를 자주 해야 하니까.

호황인데도 500만 코인이면 너무 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장소가 장소니만큼 간단한 마도구 수리 의뢰만 받았다.

“공부는 꾸준히 하시죠?”

“그래서 자정까지 일하는 날은 적어. 돈만 보고 일했으면 주머니가 빵빵해졌겠지.”

“잘하시는 겁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계속 발전하는 기술 때문에 저절로 뒤처지니까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필요하면 별문자 책도 보세요.”

“수면제로 쓰긴 좋더라. 그날은 아주 꿀잠을···.”

“침 흘린 건 아니죠?”

“절대 아니지. 중고도 아니고 비싼 값 치르며 새 책을 샀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근무 시간은 왜 물어봤어?”

앨런의 손가락이 축 늘어진 테일러를 가리켰다. 그는 주변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더 좋은 매직웨어로 업그레이드 해주기로 했으니 자금을 모아야죠. 파워슈트 적응이나 문제점 탐색 기간이 필요해서 한동안은 지상에 있으려고요.”

“잠깐, 그럼 나는? 사장이 직원 일자리를 빼앗아도 되는 거야?”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아니, 잠깐···. 제발, 이러지 마···.”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비토는 도구를 챙기고 앨런의 뒤를 따랐다.

*

앨런은 롤프의 술집, 취한 불꽃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니 빨간 머리카락을 사자 갈기처럼 늘어트린 주인이 제일 먼저 보였다.

머리 스타일부터가 눈에 띄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직접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직원이 있음에도 저러는 모습을 보면 취미의 영역이 분명했다.

아니면 브로커라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중일 수도 있고.

정보상이나 브로커가 괜히 술집을 하겠는가? 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면 입술이 가벼워지기 마련이었다.

파워슈트를 입은 앨런이 발을 들이니, 손님들이 눈길을 한 번 줬다가 다시 술잔에 집중했다.

파워슈트는 자주 보는 장비였다. 직업 특성상 일반인보다 익숙하기도 하고, 마침 구석에 앉은 해결사 하나도 헬멧을 벗고 술을 잔뜩 들이켜고 있었다.

게다가 누가 만들었냐, 어떤 재료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수준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다. 그러니 앨런이 입은 파워슈트를 단순한 근력 보조나 노동용으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새로운 인력이 방문했나 싶어서 관심을 기울이던 롤프는 바이저를 올린 앨런을 보고 피식 웃었다,

“마법공학자 앨런, 오랜만이야. 옷도 기깔나게 차려입었네. 얼마 주고 맞췄어?”

“사장님, 저는 땜장이라고 부르면서 앨런은 제대로 호칭하는 이유가 뭡니까?”

“불만 있으면 실력을 키워. 쉽지?”

원래 단순한 일은 쉬워 보이지만, 제일 어려웠다. 지식을 쌓으면 실력이 상승한다. 누구나 알고 있어도, 지식부터 제동이 걸렸다.

마법공학은 ‘마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만큼 난해해서 진입장벽이 높고, 사람마다 격차도 컸다.

롤프의 차갑고 진실 가득한 혀 놀림에 격추당한 비토는 술집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작은 방이 작업실이었다. 지하에 있는 롤프의 술집에는 그런 방들이 많고, 각 분야의 기술자들이 일하기도 했다.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한 앨런이 넌지시 물었다.

“비토는 어때요?”

“소개가 있어도 아무한테나 방을 내주진 않지. 아직 어리숙하긴 한데, 나이를 생각하면 괜찮아. 아, 네가 몇 살이었지?”

“18살이요.”

“아, 생각난다. 생일이 6월이랬지? 네 앞에서 괜히 나이 이야기를 꺼냈네. 메이즈시티는 넓어서 너처럼 세월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나. 만년 유망주로 남다가 잊힐지, 태풍도 무시하는 거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롤프는 말을 적당히 끝마쳤다. 앨런은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다. 유망주로 끝내는 사람이 99%가 넘는다는 말이리라.

앨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식과 탐험 그리고 치료만이 중요했다.

비토의 작업실을 힐끔 보니, 방문한 손님이 꽤 있었다. 이곳의 장점 덕분이었다. 마도구 수선을 지켜볼 수 있어서 혹시라도 부품을 바꿔치기하거나, 도둑질한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웠다.

앨런도 그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얼굴을 아는 해결사들은 줄을 바꿔 서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비토의 앞자리는 한적하고, 앨런의 앞자리는 붐볐다. 마지막 일감을 처리한 비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형님들, 진짜 너무 하시네요.”

그때, 근처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골렘 의수로 팔짱을 끼니, 워낙 두꺼워서 상반신이 거의 다 가려졌다.

“너무 하긴. 정비 실수로 목숨을 건져서 좋게 넘어갔어. 알지? 아니었으면 콱!”

실수가 아니었으면 ‘콱!’하기 전에 죽어서 이런 말을 할 기회도 사라졌으리라. 그랬으면 비토가 실수했다고 알려질 일도 없었다.

적당히 손맛만 본 앨런이 마도구를 비토에게 밀어줬다. 그러자 반발이 생겼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앨런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해결사는 미궁의 괴물처럼 위협적이지만 적어도 말은 통하니···, 아니, 같은 언어를 쓰니까.

“검수는 제가 하겠습니다. 불편하시면 다시 가져가세요.”

그렇게까지 설명하니 해결사들은 투덜거리긴 해도 가만히 있었다. 제대로 된 가게에 맡기면 비용이 배는 비쌌다.

해결사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작업실에 둘만 남았다.

“업그레이드하려면 돈 필요하다며?”

“비토에게 맡겼는데 함부로 빼앗는 행위도 못 할 짓이죠. 다른 방법이 있나 생각 중입니다.”

“그럼 사장에게 일감을 받는 건 어때? 브로커니 쓸만한 일을 많이 알고 있겠지.”

“여기에 온 이유 중 하나기도 하죠.”

“하나? 설마, 내가 일 잘하고 있나 검사하는 것도 다른 이유야?”

앨런은 어깨만 으쓱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 특유의 떠들썩한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손님들은 바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왼손에만 골렘 의수를 착용한 오크가 롤프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내 몸값이 겨우 그것밖에 안 돼? 장난해?”

“이봐. 손님들도 있는 데 이럴 거야?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하자니까.”

“그냥 여기서 해!”

일그러진 오크의 얼굴은 아이가 겁을 집어먹고 오줌을 지릴 만큼 사나웠다. 롤프는 그런 상황에서도 수염 한 가닥조차 떨지 않았다. 브로커다운 배짱이었다.

점점 높아지는 오크의 언성, 테이블 밑의 무기로 슬쩍 움직이는 롤프의 손.

그때 앨런이 나섰다. 좋은 일이 있나 물어보려고 하는데,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여러모로 찝찝하니까. 성격상 피 보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도 싶고.

앨런의 손이 골렘 의수 위로 얹어졌다.

“넌 뭐···.”

앨런의 팔을 뿌리치려던 오크가 입을 다물었다. 떨리는 동공이 움직이지 않는 골렘 의수로 향했다. 의수를 봉쇄한 파워슈트에서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어두운 술집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파워슈트. 마력의 빛이 흐르니,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빌어먹을···.”

원래부터 난동부릴 생각은 없었는지, 아니면 힘의 차이를 느꼈는지 오크는 얌전히 사라졌다. 구경거리가 사라지니 손님들의 관심도 빠르게 흩어졌다.

롤프는 오크가 내리친 테이블이 부서졌나 조사하고 있었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함부로 하는지. 안 부서진 걸 보니 비싼 값 하긴 했네.”

“왜 그랬어요?”

“정산비율 때문에 마찰이 좀 있었지. 하여간 오크 새끼들. 분명 좋다고 해놓고 하루도 안 지났는데 금방 말을 바꾸네.”

“그것뿐인가요?”

“당연히···.”

앨런의 무심한 눈동자와 마주친 롤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시세보다 좀 싸게 고용하려고 하긴 했지···.”

손님들이 괜히 구경만 한 게 아니었다. 브로커와 해결사는 공생관계지만, 돈 때문에 앙금이 쌓이기도 쉬웠다.

“새끼들. 이참에 잘 됐다고 킬킬거리면서 지켜보고만 있고. 너는 왜? 가려고?”

“아뇨. 일거리가 있나 물어보려고요.”

일 이야기가 나오자 롤프의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동네 아저씨 같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앨런의 실력이나 장비 상태 등을 보며 냉철한 평가를 하는 중이었다. 오크를 막아선 이유 중 하나에는 가산점도 포함되어있었다.

“신분증 보여줄 수 있나?”

“여기요.”

롤프는 신분증을 받아들지도 않았다. 오직 하나, 도달계층에만 관심을 보였다.

“벌써 원시림까지? 그럼 심도 3이구나. 혹시 파워슈트 입고 내려갔나?”

“아뇨. 파워슈트는 이번에 새로 맞췄습니다.”

“음···, 그럼 이건 어때? 내 사촌이 솔도스 서부에서 광산을 운영하는데, 사람이 필요하다고 소식을 전했어.”

메이즈시티는 솔도스 중앙에 있었다. 정확히 서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광산이라고 하니 최소한 1천 킬로미터 밖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을 구한다고요? 아, 근처에 소문이 나면 안 되는 일인가 보네요.”

“아는 사람 앞에서는 입이 가벼워질 수도 있으니까. 테일러 씨는 브레이커에서 일했으니 이런 경험이 많을 테고, 시바는 같은 드워프고 수도승이니 믿을 만하지.”

롤프는 인연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도 엄연히 브로커. 사람의 실력을 냉철히 분석하고, 일을 맡겼다.

< 파워슈트(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