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산맥(1) >
솔도스 연방은 대륙 하나를 거의 통째로 차지한 나라고, 그들이 자랑하는 국력은 광활한 땅에서 뿜어진다.
드넓은 대지, 막대한 자원은 사람을 끌어모으기 최적의 요소기에 솔도스가 강대국 반열에 오른 것은 당연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존재하는 법. 땅이 너무 넓어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충분히 수용할 만한 단점이지만, 사람들은 기다림과 귀찮음을 극도로 싫어했고, 대부분의 발전은 그걸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졌다.
앨런이 지금 탑승한 기차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을 극복하고자 만들어진 하이퍼루프 열차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대륙을 질주했다.
아니, 비행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공기저항이 거의 없는 기차는 시속 1000km를 훌쩍 넘는 속도로 내달렸다.
시바는 차체에서 발생해서 좌석까지 전달되는 부드러운 진동을 즐겼다. 안마의자에 앉은 모양새라 잠을 자기 좋지만, 그럴 수 없었다.
“듣고 계세요?”
“앨런 형제님은 안 피곤하십니까?”
“하이퍼루프의 원리를 궁리하고 있으니 너무 재밌어서요. 대륙을 관통하는 진공관을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그 내부로 기차를 운행한다는 생각은 누가 했을까요?”
입을 쉬지 않는 앨런 덕분에 시바는 관심도 없는 하이퍼루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성수를 마신다고 깨어난 게 실책이었다. 테일러의 숨소리를 들으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시바가 잘못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벌떡 일어난 테일러가 열차를 나갔기 때문이다.
“여기는 시골인가?”
하이퍼루프 역에서 주변을 둘러본 테일러의 첫말이었다.
이들이 도착한 도시 링스는 인구 5만을 겨우 넘었다. 대부분 건물이 낮고, 거리도 한적했다.
당연히 몇천만이 부대끼며 사는 메이즈시티와 비교할 수 없었다. 마천루가 즐비하고, 사람이 쉴새 없이 몰려드는 곳과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장소는 다른 미궁 도시뿐이었다.
앨런이 하이퍼루프의 보안을 뚫을 방법이 없나 고민하는 사이, 시바는 은근슬쩍 거리를 벌리며 테일러 옆으로 붙었다.
“메이즈시티 근처에 있는데 한 번도 안 오셨습니까?”
“1500km 넘게 떨어져 있는데 근처는 무슨···. 솔도스가 땅이 너무 넓어서 그렇지, 다른 대륙이었으면 나라 몇 개는 횡단하고도 남아. 그리고 메이즈시티에 미궁이 있는데 이런 곳에 정신 팔릴 시간이 어디에 있어?”
“또 다른 세상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보안 뚫기에 실패한 앨런이 동의를 표했다.
“어떤 룬문자와 회로 마법이 적혀있는지 찾아본다며?”
“그러려면 방화벽과 보안 설계를 망가트려야 하는데, 그러면 솔도스 연방에서 저를 쫓겠죠.”
“안타깝지만 어쩌겠냐.”
“음···, 해킹 연습을 더 해야 하나?”
테일러는 포기가 아니라 위험한 생각을 하는 앨런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만히 놔두면 진짜로 실행할 기색이라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이거 보이지? 기억수정 안에 영상 녹음해놨어. 이번에는 양보 안 해줄 테니까 무조건 나부터 업그레이드 해줘야 해.”
“형제님···.”
“또 왜?”
“마음이 너무 좁습니다. 앨런 형제님이 예산 때문에 곤란해하니 먼저 해결하라고 하셨으면서 왜 이러시는지···.”
“남자의 마음은 갈대다.”
“그럼 오늘부터 저와 함께 어머님의 경전을 공부하며 정신수양의 시간을 가집시다.”
헛소리 대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양복을 입은 드워프 하나가 다가왔다. 일반적인 드워프와 다르게 가슴까지만 내려오는 짧은 수염과 초콜릿 색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모시러 왔습니다.”
드워프의 눈동자는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롤프가 보내준 사진과 앨런 일행의 인상착의를 비교한 것이리라.
드워프는 트럭으로 앨런을 안내했다. 표범은 사뿐히 짐칸 위로 올라갔고, 무한궤도 대신 거미 다리를 장착한 상자도 쉽게 탑승했다.
“화목한 분들이군요. 팀워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조수석에 앉은 앨런이 물었지만, 드워프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일개 직원일 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도 모릅니다.”
직원이 입을 꾹 다무니, 앨런은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머리에 눈 모자를 쓴 하얀산맥이 태양을 삼키고 있었다.
태양은 하얀 눈과 얼음을 붉게 물들이는 마지막 작업을 끝으로 쉬러 갔다. 순식간에 도시 전체에 어둠이 내렸다. 그것도 잠시, 가로등이 일시에 켜지며 사방이 밝아졌다.
언제나 포화상태의 메이즈시티와 달리 링스의 도로는 한적했다. 차가 없으니 신호 몇 번 걸려도 이동속도가 워낙 빨랐다.
앨런은 휙휙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잡아챘다.
‘링스의 특성인가?’
표정은 밝고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언제나 빠름을 추구하고 울화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메이즈시티의 시민들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무슨 차이지? 인구 밀도? 지리적 위치? 소음? 범죄율?’
앨런의 머릿속에 여러 이유가 떠올랐으나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곰곰이 생각하는 앨런의 귓가에 드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이즈시티에 비하면 심심한 도시입니다. 탐험가님의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풍경도 좋고, 사람들도 즐거워 보입니다. 좋은 도시입니다.”
“하하, 그래서 제가 이곳을 좋아합니다. 어디에서나 하얀산맥을 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죠.”
앨런은 룸미러로 시바의 표정을 살폈다. 산을 사랑하는 드워프의 피를 지녔기에 그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시내를 관통하며 이동한 트럭은 도시 외곽의 5층 호텔에 도착했다. 시설이 엄청 좋은 곳은 아니었다.
“함께 일할 분들도 이곳에 묵나요?”
“각자 다른 숙소를 구했습니다. 일행마다 저 같은 직원이 하나씩 따라붙기도 했고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객실까지 안내한 직원은 단말기 하나를 나눠주고 사라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테일러는 문이 닫히자마자 조용히 속삭였다.
“약속한 금액이 상당해서 오긴 왔는데 비밀이 너무 많아. 사람들을 굳이 나눠서 묵게 하는 것도 수상하고···.”
“이상하면 포기하고 돌아갈까요? 계약금을 적게 받아서 위약금이 부담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으니까.”
테일러가 분위기를 잡으니, 어둠으로 몸을 감싼 하얀산맥을 구경하던 시바도 관심을 보였다.
“유적이겠지.”
“나라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재밌겠네요.”
테일러는 극명히 갈리는 반응을 즐기다가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나라에 신고하면 조사단이 오겠지? 그러면 광산이 올스톱 되는데 보상은? 정보가 이리저리 새나가서 방문할 불청객들은?”
“생각보다 문제가 많군요.”
테일러는 시바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앨런을 힐끔 쳐다봤다. 이런 대화보다 새로운 장난감인 파워슈트가 훨씬 마음에 드는지, 온 정신을 그곳에 쏟고 있었다.
“앨런, 너도 참여해야지.”
“듣기만 할게요.”
여전히 파워슈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테일러는 앨런의 정신 일부가 이쪽에 할당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열심히 움직이던 기계 팔 중 하나가 작동을 멈춘 것이다.
기행은 기행이었다. 뇌 구조가 어떻게 생겼기에 멀티태스킹을 숨 쉬듯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형제님, 혹시 뇌 건강에 적신호가?”
“쓰읍!”
“유적입니다.”
“아, 거기까지 했지. 광산업을 한다는 롤프의 사촌도 욕심이 생기겠지. 비밀스럽게 처리하면 보물이 모두 내 건데 하고 말이야. 아니면 경쟁자 때문에 추가 인력을 고용했을 수도 있고. 정확한 내막은 사장을 만나야 알 것 같은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전부 말해줄지 모르겠다.”
말을 마친 테일러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물 쏟아지는 소리가 나고 나서야 시바가 앨런에게 물었다.
“형제님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이요? 진짜 유적이라면 신기한 물건이 많이 나올 테니 오히려 기대되는데요.”
물어볼 사람을 잘못 골랐다. 앨런뿐 아니라 미궁탐험가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 그들은 위험애호가이자 발견에 목마른 탐구자였다.
*
다음 날, 어제 안내해준 직원이 방을 방문했다.
“피로는 푸셨습니까? 출발하기 전에 비밀서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직원이 내민 서류는 마법적인 조치가 더해진 계약서이자 비밀서약서였다. 서명을 마친 테일러는 계좌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선금이 최근 탐험 수입 절반이나 되네.”
“나머지는 의뢰가 끝나면 일괄 지급할 예정입니다. 계약서에 적힌 대로 추가 보상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앨런과 시바도 서명을 마치고, 어제 봤던 트럭에 다시 탑승했다. 앨런은 이번에도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도로에 접어들자, 직원이 입을 열었다.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하쉬, 여러분을 소개해준 롤프 형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오너 일가였군요.”
“약간 개념이 다릅니다. 우리 회사는 혈족 중심으로 돌아가서 따지고 보면 직원 전체가 오너 일가입니다.”
입단속 하기 최적의 상황이었다. 드워프의 혈연은 무엇보다 끈끈하고, 가족 사이의 의리를 위해서는 몸을 바치기도 했다.
“예상하셨을 수도 있지만, 여러분을 고용한 이유는 광산에서 발견한 유적 때문입니다. 원래는 회사의 힘만으로 해결해보려고 했는데···.”
“친척들이 많이 죽었나 보군.”
정곡을 찌르는 테일러의 말에 하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맞습니다. 시체도 못 건진 상황이지만, 이대로 묻어두기엔 희생이 너무 크다고 판단, 외부의 인력을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알아낸 내용은?”
“입구가 여러 개이며,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습니다. 끈을 묶어도 깔끔하게 잘리더군요. 그게 전부입니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왜 못 챙겼겠는가.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침묵이 감도는 사이, 트럭이 갱도 입구에 도착했다. 차들이 주차되어있었고, 입구로 들어가는 무리도 보였다.
자신의 장비를 챙긴 하쉬는 그들을 가리켰다.
“파티 하나당 직원이 하나씩 붙습니다.”
감시자로 따라붙겠단 이야기지만 누구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았다. 금액 때문에 많이 누그러진 상태기도 하고, 하쉬가 지닌 장비도 꽤 훌륭했다.
주변을 구경할 시간도 없이 갱도로 입장했다. 뜨거운 햇살이 사라지며 서늘한 공기와 어둠이 앨런을 맞이했다.
아치 형태로 제작한 지지대마다 마력등이 붙어있어서 사물을 알아보긴 쉬웠다. 검은 안개가 가득한 동굴보다 훨씬 쉬운 장소였다.
집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앨런의 앞에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하쉬가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탑승하시죠.”
“깊이가 얼마나 되나요?”
“1km입니다.”
“이걸 타고 1km나 내려갑니까?”
“붕괴 위험 때문에 그렇게 파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몇 번 갈아타셔야 합니다.”
모두 탑승하자 철제 상자는 끼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중간 뚫려있는 굴을 보니 어떤 식으로 팠을지 그림이 그려졌다.
‘단면을 본다면 생선 뼈 같은 모습이겠지.’
항상 똑같은 엘리베이터, 비슷한 느낌의 갱도 때문인지 지루함이 빨리 찾아왔다.
최하층에 도착한 테일러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갱도를 걸으면서 입이 찢어질 듯이 하품을 하다가 그대로 멈췄다.
“형제님, 턱관절 이탈이라도 발생하셨습니까?”
입을 천천히 다문 테일러가 눈을 크게 뜨며 앞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바라본 시바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미궁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검은 안개가 그곳에 있었다. 주변으로 흘러나오지도 않고, 동그랗게 뚫린 구멍 안에서만 넘실거렸다.
하쉬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용병만 고용하려다가 롤프 형님에게도 탐험가 주선을 부탁한 이유입니다. 심도 3이라면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완전 다른 계급이기도 하고요.”
< 하얀산맥(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