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94화 (94/193)

< 하얀산맥(2) >

검은 안개는 시야를 완벽히 차단한다. 헤드 랜턴이나 횃불 등 빛을 발산하는 도구로 쫓아낼 수 있지만, 임시적인 조치일 뿐이다.

빛이 사라지면 언제 사라졌냐는 듯, 슬금슬금 기어 와서 다시 자리를 채운다. 그렇게 안개로 둘러싸이면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는, 그야말로 눈뜬장님이 된다.

사람의 오감 중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고 하지만, 바로 효과가 나타나진 않는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시각의 빈자리를 청각이 완전히 채워주진 못한다.

이토록 효과가 확실하기에 군부나 방위 산업체에서는 미궁의 안개를 무기화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당연히 결과는 허탕. 이름난 마법사들도 검은 안개를 분석할 수 없었다.

그런 불길한 존재. 오직 하나의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눈앞에 있었다. 미궁에서 수십 년을 구른 테일러도 입을 쉬이 다물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형제님도 안개가 보이십니까? 어제 흘린 성수 때문에 안구 신경이 고장 난 줄 알았습니다.”

“도대체 뭘 했기에 눈에 알코올을 부어?”

두 사람이 혼란에 빠진 사이, 앨런은 하쉬를 쳐다봤다.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나눴다는 뜻은 다른 입구도 있다는 뜻입니까? 진입했다가 바로 돌아올 순 없습니까?”

“평소처럼 채굴하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안개문 여럿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질문도 마찬가지로 ‘네.’입니다.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만 하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그 후로 소식이 끊겼습니다.”

비밀리에 여기저기에서 사람을 끌어모은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혈족의 힘으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피해가 불어나서 노선을 바꾼 것이다.

브레이커 같은 대형 조직에 일을 맡겼다면 훨씬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드워프 특유의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욕심이 눈을 가렸는지 작은 무리만 고용했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한 앨런이 뭐라 할 문제는 아니기에 하쉬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죽은···, 아니, 소식이 끊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넘길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궁탐험가는 위험을 좇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애초에 이 바닥에 사는 사람들의 뇌 구조는 일반인과 달랐다. 호기심에 불이 붙은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하쉬의 시선이 안개를 관찰하는 테일러에게 향했다.

“두 분이 하던 이야기는 끝났습니까?”

“이야기랄 것도 없지.”

“안개에 관한 베테랑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롤프가 앨런에게 괜히 이야기를 꺼냈을까? 테일러가 브레이커에서 일했다는 정보는 몰라도, 수십 년 동안 탐험가로 일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테일러는 안개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미궁은 아냐.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랬으면 우리 선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정부를 불렀을 겁니다. 나라도 아니고 혈족 하나가 미궁을 삼켰다간 자멸할 겁니다.”

“세계 곳곳에 있는 미궁들은 공통점이 있어. 바로 문이지.”

미궁의 문은 거대했다. 일단 메이즈시티에 있는 문만 생각해도 높이 50m, 너비 100m였다.

모든 문은 검은빛을 띠며, 고체처럼 보였다. 진짜 형체가 있는 건 아니라 그냥 통과되긴 하지만.

“그러니 고작 2m 살짝 넘는 안개가 미궁일 리가 없지. 정확한 판단을 하려면 내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유연히 대처하리라 믿습니다.”

하쉬가 안개문을 가리켰다. 이야기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뜻이었다. 두둑이 지급한 선금도 의욕 고취의 일환이었다.

“좋아. 그 전에···.”

테일러가 앨런을 바라봤다.

“거미를 들여보냈는데, 그 아이와의 연결이 바로 끊겼습니다.”

“이제는 말할 필요도 없구나.”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표범과 상자를 불렀다. 둘의 시선이 모이자, 지팡이로 안개를 가리켰다.

“입장.”

표범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명령을 수행하고, 상자는 게 눈을 닮은 카메라 아이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천천히 들어갔다.

테일러, 시바, 하쉬의 순으로 문을 통과하고, 앨런이 가장 마지막에 들어갔다.

답답하고, 음울하고, 울퉁불퉁한 갱도의 풍경이 반전되었다. 뻥 뚫리고, 밝고, 평평하고 하얀 대지가 앨런을 반겼다.

‘설원?’

앨런의 시야 한쪽에 문구가 주르르 적혔다.

<파워슈트 상태>

내구도 : 99%

마력융합로 : 99%↓

룬문자 가동률 : 15%↑

외부온도 : -30℃

앨런은 온도를 보고 센서가 고장 났나 고민했지만, 직접 살펴보니 그런 징후는 없었다.

옆을 확인하자 그런 의심도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몸을 움츠린 테일러, 열어둔 지퍼를 잠그는 시바, 눈 때문에 쿠키앤크림처럼 변한 하쉬를 보니 이곳은 설원이 맞았다.

표범은 평소처럼 몸을 낮췄고, 상자는 집게발로 자꾸 눈을 파헤쳤다. 수납하고자 하는 의도가 훤히 보였지만, 눈이 잘게 부서지자 상자도 관심을 껐다.

“앨런, 이렇게 추운데 몸은 괜찮···.”

말을 하던 테일러가 입을 다물었다. 헬멧 바이저에 닿은 눈송이가 물로 변해서 흘러내리는 장면을 목격한 탓이다.

“온도 대책은 잘 세워놨습니다. [발열] 덕분에 따뜻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괜한 기우였구나···.”

“필요하시면 룬문자 적어드릴게요.”

“마력을 꾸준히 소모하겠지?”

“네.”

“그럼 됐다. 참아보다가 정 힘들면 부탁하마.”

애초에 밖은 겨울이었다. 링스는 해발고도가 높아서 메이즈시티보다 더 춥기에 탐험복도 따뜻한 녀석으로 준비했다.

“미궁에서도 겪어봐서 그런지 그리 춥진 않구나.”

앨런은 저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보다는 ‘춥다.’ 자체에 주목했다. 금제 때문에 원시림 아래의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지금 하는 말로 판단하면 비슷한 지형이리라.

‘그런데 어떻게 말 하셨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에는 금제도 반응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중요하지 않아서?’

앨런은 상념을 떨쳐냈다. 고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우선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쉬 씨는 추우십니까?”

“부탁드립니다.”

마도구나 탐험 장비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지만, 하쉬의 전문 분야는 탐험이 아니라 광부였다. 몸은 똑같이 튼튼해도 언제나 목숨을 거는 탐험가의 정신력에 견주긴 어려웠다.

앨런은 철판을 구부려서 마석을 박아넣고, 겉에 [발열]을 새겼다. 급조한 마도구를 건네니 하쉬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땅속 깊은 곳에 설원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사촌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겠군요. 이정표도 없는 장소에서 길을 잃은 겁니다···.”

안개문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먼저 도착한 사람 시점에서는 후발주자들이 그 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옷깃을 여민 테일러가 하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움직이지. 통화도 안 되는 장소에 머물러봐야 체온만 빼앗기니까. 앨런, 혹시 뭐라도 보이니?”

“아뇨. 오직 눈만 보입니다.”

가장 눈이 좋은 앨런에게 물어봐도 시원찮은 대답만 돌아왔다. 무엇보다 눈보라가 관측을 계속 방해했다. 악의마저 느껴지는 자연현상이었다.

테일러가 먼저 앞장섰다. 눈 속에 푹푹 빠지는 다리를 끌고 길을 만들었다.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면 시바가, 때로는 앨런이 선두에 섰다.

숨결마저 얼어붙는 추위였다. 물론 앨런은 체감한 게 아니라, 시바의 수염에 잔뜩 낀 서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괜찮으세요?”

“공기가 깨끗하고 시원합니다. 형제님도 한 번 경험해보시지요.”

앨런은 궁금해서 바이저를 살짝 올렸다가 내부로 들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화들짝 놀랐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리니 시바가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웃음 때문에 수염이 움직이자 매달린 서리가 후드득 떨어졌다.

앨런은 중간중간 보이는 삐쩍 마른 나무를 채집하기도 했다.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면 마력을 아낄 수 있으니까.

표범이 끄는 급조한 썰매 위로 꽤 많은 장작이 쌓일 때쯤, 하늘이 어두워졌다. 눈보라 때문에 해가 가려진 게 아니라, 밤이 다가왔다는 신호였다.

쉴 곳을 찾는 일행에게 손바닥을 살짝 오므린 듯한 지형이 마침 보였다. 천막으로 바람을 막고 불을 피우니,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사라졌다.

수염에서 얼음이 사라진 하쉬가 하늘을 쳐다봤다.

“이곳에도 달이 떴군요. 아직도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앨런 탐험가님은 굉장히 젊어 보이는데 침착하시군요.”

“미궁보다 신기한 장소는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비슷한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가능할까요?”

“자세한 설명은 넘기겠습니다. 그곳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지만, 여기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환상인지, 결계로 가둔 공간인지···.”

따뜻한 물로 목을 녹이던 테일러가 한마디를 더했다.

“후자에 가까울 거다. 심도7 이상의 고위 결계술사겠지. 땅속에 이런 장소를 왜 숨겨뒀는지 모르겠네. 심보가 참 고약해.”

“마석 광산이라 동력을 보급하기 편해서 그럴까요?”

“그렇다기엔 누군가가 굴을 파놓은 흔적이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갱도를 만들기 전까지는 바위만 가득했습니다.”

하쉬가 내놓은 대답이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생각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앨런의 왼쪽 눈이 혼자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별문자를 입력한 대로 반응했다. 모닥불 너머에 가득한 어둠을 꿰뚫었다.

<분석>

종족 : 엘프, 인간, 드워프

특징 : 드워프의 복장은 하쉬와 일치

“누군가 옵니다.”

앨런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영들이 점점 가까이 오자, 가장 뒤에서 보호받던 하쉬가 앞으로 나섰다.

“사촌입니다. 무기들 내려놓으세요. 로이스!”

“하쉬 형님!”

둘은 몇 년이나 떨어졌던 가족처럼 격하게 끌어안았다. 방위조차 알 수 없는 험지에서 고생하다가 만났으니 오죽할까.

고용주들은 쉬어도 일꾼들은 그럴 수 없었다. 저쪽 파티의 대장으로 보이는 근육질 엘프가 앞으로 나섰다.

“정보교환이나 합시다.”

“그러지.”

테일러가 앞으로 나서자 엘프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노약자는 야외활동을 자제해야 할 날씨인데···. 관절 윤활유는 멀쩡합니까?”

“말본새하고는. 보아하니 스테로이드 처먹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고자 되는 수가 있어.”

no약자인 테일러는 바로 말을 받아쳤다. 탐험가의 세계에서는 ‘오늘 날씨가 좋군요.’와 동급인 훈훈한 덕담을 시작으로 서로 알아낸 정보를 교환했다.

물론 이야기를 나눌수록 서로가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눈보라, 설원, 안 보이는 사람의 흔적 등 이미 아는 사실만 오고 갔다.

“시간 낭비만 했군.”

“내가 할 소리.”

천막을 떠난 그들은 바로 옆에서 텐트를 만들었다. 그들을 따라온 로이스는 떠날 생각이 없는지, 계속 하쉬와 붙어있었다.

“함께 다니기로 했습니다.”

예상했던 말이었다. 연락할 방법이라도 있으면 각자 흩어져서 이곳을 뒤져보겠지만, 불가능하니 함께 다니는 편이 훨씬 좋았다.

물론 딱 붙어서 다니면 비효율적이니 좌우로 거리를 적절하게 벌리고, 주변을 탐색하며 움직일 것이다.

*

탐색 2일 차.

소득 없음.

탐색 3일 차.

다른 파티 합류.

탐색 4일 차.

좌익을 담당하던 앨런 일행이 건축물을 발견했다.

신호탄을 발사하니, 멀리 퍼졌던 파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의 앞에는 파괴된 문 그리고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문을 살피던 하쉬가 입을 열었다.

“밖에서 부순 흔적이군요.”

계단을 지켜보던 앨런이 시야 구석을 바라봤다.

외부온도 : -10℃

문이 부서져 있는데도 20도나 차이 났다. 심지어 계단에 쌓인 눈은 누군가 치우기라도 한 듯이 굉장히 얇았다.

그때, 저 아래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커지자 사람들의 손은 자연스럽게 무기로 향했다.

마침내 등장한 녀석들은 두꺼비 형태의 오토마톤 무리였다. 커다란 입으로 눈을 삼키다가 계단 위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삐이익!

포식자를 만난 초식동물처럼 소리를 빽 지르더니 계단 아래로 황급히 달아났다.

엘프 파티는 바로 추적을 시작했고, 앨런 일행은 천천히 움직였다.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데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계단을 완전히 내려온 앨런은 또 다른 부서진 문을 발견했다. 그곳을 지나가니 불이 켜진 밝은 복도가 보였다.

두꺼비들은 어떤 동화책의 빵조각처럼 눈을 질질 흘렸다. 앨런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 하얀산맥(2)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