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산맥(3) >
외부온도 : 20℃
앨런은 시야 구석의 온도를 확인했다. 설원 –30도, 계단 –10도의 냉혹한 공기는 사라지고, 따뜻한 기류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앨런은 순간적으로 생긴 김을 지우고자 바이저를 직접 닦았다. 미궁의 온도는 일정한 편이어서 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움츠러들었던 테일러의 어깨가 펴지고, 시바가 수염에 달고 다니던 얼음은 녹아내렸다.
두꺼비들이 복도에 줄줄 흘리고 달아난 눈도 녹아서 물이 되었다. 표지판이 없고, 거미줄 같이 엉켜있는 복도에 존재하는 이정표였다.
먼저 달려갔던 엘프의 신발이 물을 인주로 삼아 도장을 길게 찍어놨다. 두꺼비는 그보다 빠르게 달아났는지, 전투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앨런은 두꺼비의 움직임과 속도를 떠올렸다.
‘동굴의 오토마톤보다 정교해. 그 실력으로 전투용을 만든다면 훨씬 위협적이겠지.’
오토마톤이라는 명칭은 예전에도 존재했지만, 미궁의 등장 후로는 주로 그곳에서 나오는 기계를 일컬었다.
미궁에서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으니, 앨런처럼 고쳐서 사용하는 사람도 많았다.
시바가 그 부분을 지적했다.
“미궁의 오토마톤 같습니다. 이곳의 주인이 미궁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미궁의 발견 후로 백 년 좀 넘었으니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겠군요.”
“흠···.”
앨런의 생각은 좀 달랐다. 바이저를 열어놨기에 침음이 잘 들렸다.
“형제님은 짚이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순수해요.”
“저의 순수한 뇌를 위해 자세한 설명 부탁합니다.”
앨런은 남도 이 정도는 알고 있겠거니 하며 종종 말을 극도로 줄였다. 지금도 시바를 보는 눈빛에는 ‘충분히 풀어서 말했는데···.’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시바는 익숙해졌기에 대답을 기다렸다,
“추가적인 가공을 거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하인이 막 제작한 오토마톤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서, 확신 말고 느낌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다.
물을 따라 달리니 자연스럽게 바닥을 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앨런의 눈에 어떤 물질이 포착되었다. 왼쪽 눈이 작은 조각의 정보를 표시했다.
<분석>
종류 : 합성 섬유
특징 : 하쉬의 옷 재질과 동일
잠시 멈춘 앨런은 복도 벽과 바닥 연결지점에 떨어진 옷조각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멈추니 시선이 쏠렸고, 하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오, 이런······.”
하쉬의 반응을 보니 먼저 들어가서 소식이 끊겼다던 사촌의 흔적이 확실했다. 옷조각을 품에 집어넣는 도중, 저 멀리에서 굉음이 들렸다.
너무나 익숙한 전투의 소리였다. 있는 듯 없는 듯 앨런을 따라오던 표범이 주인의 다리를 스치며 앞으로 내달렸다.
앨런 일행 역시 속도를 높였다. 앞에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니 거대한 원형 홀이 나타났다. 천장 중앙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새하얀 원통이 매달려있었다.
곰을 닮은 오토마톤 3대와 앞서 나간 엘프 파티가 그 아래에서 대치 중이었다. 녀석들은 뒷발로 몸을 일으켜서 침입자들을 위협했다.
그때, 하쉬의 손가락이 가장 뒤에 있는 곰을 가리켰다.
“어깨에 박힌 꼬챙이가 보이십니까? 사촌이 사용하던 작살총이 분명합니다.”
찢어진 옷조각, 부러진 작살.
혈족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저기에 있었다. 곰이 끝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존재가 명확했기에 하쉬의 분노가 그들에게 향했다.
“워, 워. 잠깐 뒤로 빠져있지. 흥분한 상태로 달려들면 장의사 일감만 늘어나.”
테일러가 하쉬를 막아섰다. 고용주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파티마다 한 명씩 따라붙은 드워프들은 감시자이자 보증인이다. 이들이 죽으면 경위에 대해 추궁을 받아야 하고, 보상이 크게 깎였다.
“이러려고 그쪽 어른들이 우릴 고용했으니 가만히 있어. 흥분한 아군은 또 다른 적이기도 하니까.”
“윽···.”
하쉬는 쉽게 물러났다.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는 시바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성법이 분명했다.
테일러와 시바가 눈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앨런은 미리 출격시킨 표범의 전투를 구경했다.
표범이 근처로 다가오자, 작살 박힌 곰이 몸을 옆으로 틀었다. 서 있는 키가 3m에 가까워서 그런지 위압감이 엄청났다.
그건 앨런의 짧은 감상이고, 표범은 자그마한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주인의 설계대로 움직이는 냉혹한 전투 기계 그 자체였으니까.
뒷발로 몸을 일으킨 곰은 사람이 보기엔 위협적일지 몰라도, 표범의 알고리즘으로 판단하면 좋은 표적이었다.
기잉―
앞다리 사이의 등판이 열리며 마탄 발사기가 삐죽 튀어나왔다. 곰을 겨눈 총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탄을 발사했다.
핑그르르 돌면서 허공을 내달린 마탄은 곰의 가슴에 명중했다.
“앨런, 불발이니?”
“아뇨.”
테일러가 물어볼 정도로 시각효과가 부족했다. 근접전을 위해 만든 표범이 화력이 강한 마탄을 쏘면 같이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앨런은 표범과 상자의 역할을 확실히 분리했고, 표범이 발사한 것은 이른바 디버프 마탄이었다.
곰의 겉은 멀쩡해 보여도 [부식], [쇠약], [감속]의 효과가 착탄 부위를 중심으로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작업을 마친 표범이 자세를 낮추며 질주했다. 곰의 오른쪽 앞발이 꼬리가 지나간 자리를 내려찍었다.
곰의 오른쪽으로 미끄러진 표범이 마나클로를 바짝 세웠다. 바닥을 찍어서 몸에 제동을 걸고 180도 회전했다. 그러자 곰의 엉덩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직도 엎드린 자세의 곰은 표범의 속도에 대응하지 못했다. 마나클로가 뒷다리 부분의 외피를 찢고, 내부의 인공 근육을 절단했다. 밖으로 튀어나온 근육 섬유는 구운 오징어처럼 돌돌 말렸다.
덕분에 상체를 들던 곰은 균형을 잃었다. 곰 역시 전투 지능이 탑재된 기계. 고통을 모르는 녀석은 앞발을 최대한 벌려서 덩치를 부풀리고, 등으로 표범을 깔아뭉개려고 했다.
표범이 반응하긴 했지만, 앞발에 엉덩이 부분을 얻어맞았다. 덩치 차이에서 오는 중량 때문인지, 표범이 길게 미끄러졌다. 바닥과 외장갑의 마찰로 인해 불똥이 튀어 올랐다.
몸을 뒤집은 곰은 표범의 위치를 확인하고 앞다리를 구부렸다. 마치 튀어 나가기 직전의 맹수처럼 인공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다리가 정상이 아님에도 곰은 높게 뛰어올랐다. 다리들을 쫙 펴고 대자로 변해서 깔아뭉개려고 했다.
그러나 곰의 표적은 표범이 아니라 다른 곰이었다. 엘프 파티를 공격하려던 곰은 아군의 공격에 반응도 못 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아군을 깔아뭉갠 배신자는 그 자세로 버텼고,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곰은 테일러와 시바에 의해 고철로 변했다. 배신자 역시 똑같은 신세가 되었다.
배신자 곰이 기동을 완전히 멈추자, 등판에 매달려있던 거미가 훌쩍 뛰어내려서 앨런에게 돌아갔다.
하쉬가 상자의 서랍 속으로 들어가는 거미를 보며 물었다.
“설마 해킹입니까?”
“네. 표범의 아랫배에 붙여놨다가 달라붙게 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제어권을 강탈하다니···.”
하쉬는 광부라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해킹 자체가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대신 효과는 대단했다. 적이 줄어들고 아군이 늘어나니까.
말을 마친 앨런은 해체를 도왔다. 곰의 영혼석은 블랙박스 같은 구조물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구조물은 마나소드로도 흠집이 안 생길 만큼 단단했다.
“영혼석이 중요하긴 한데, 왜 이렇게까지 보호했을까요?”
“네가 모르는데 내가 알겠니?”
테일러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거린 앨런은 홀 중앙으로 시선을 옮겼다. 곰 하나를 처치한 엘프 파티가 무언가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앨런 역시 재빨리 다가갔다. 홀 바닥 중앙에는 손가락 깍지 끼듯이 꽉 맞물린 원형 문이 존재했다.
테일러와 훈훈한 덕담을 나눴던 근육질 엘프가 앨런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우리가 먼저다.”
목소리에 욕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앨런은 관심을 끄고 천장을 쳐다봤다. 어차피 저 문은 힘으로는 열기 어려워 보였다.
앨런은 천장에 달린 하얀 원통을 보다가 상자를 불렀다. 건네주는 지팡이로 원통 표면을 꾹꾹 누르자, 푸른색 홀로그램이 펼쳐졌다.
“뭐한 거니?”
“마력의 통로가 의도적으로 막혀있어서 돌려놨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연결되는 모습을 보니 이곳의 주인도 그런 의도였겠죠.”
“난 봐도 모르겠던데···. 너희들, 좀 떨어져. 안 보이잖아.”
테일러가 손을 휘저으며 엘프 파티를 몰아냈다. 그들이 멀찍이 물러나자 홀로그램이 제대로 된 형태를 드러냈다.
중앙에 있는 건물 모형은 앨런이 눈에 담았던 시설과 흡사했다.
“우리가 현재 있는 장소군요. 그리고 밖으로 뻗어 나간 선은···.”
길로 추정되는 선을 따라가니 다른 3개의 시설이 있었다. 각 시설은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하며, 도형의 중앙은 현재 위치였다.
각 시설의 푸른색이 연해지고 하얗게 변했다. 중앙 건물의 빛깔이 더욱 진해지더니 홀 바닥의 문이 열렸다.
홀로그램은 계속 같은 장면을 보여줬다.
“각 시설에서 무언가를 하면 여기 아래가 열린다는 뜻이군요.”
앨런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파티도 마찬가지였다.
근육질 엘프, 롤로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마침 이곳에 세 파티가 있으니 각자 하나씩 맞으면 되겠네.”
“방법은 아세요?”
롤로가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다. 곰의 몸통에서 꺼낸 영혼석을 어떤 장치에 끼우라는 홀로그램이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같은 동족이라면 글자로 남겨도 되는데 영상으로 자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 안 통하는 경우도 상정했다는 의미였다.
앨런은 다시 지팡이를 꺼내서 원통형 홀로그램 재생기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롤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쳤어? 망가지면 책임질 거냐?”
“뭐라도 확인해 봐야죠. 홀로그램의 내용이 진짜인지 그대로 믿을 수도 없고요.”
과일 때리듯 지팡이로 수차례 건드니, 재생기가 천장에서 떨어졌다. 앨런은 그 안에서 영혼석을 꺼냈다. 영혼석은 중앙 처리 장치 역할을 맡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손가락으로 영혼석을 살살 문지르자, 별문자를 입력할 수 있는 은하수가 펼쳐졌다. 블랙홀이라도 만났는지 꽤 많은 별문자가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사라지고 있어서 제대로 읽기 힘들었다.
“씨앗, 붕괴···.”
앨런은 겨우 2개의 단어만 건졌다. 별문자를 해독하고 있음을 알아챈 롤로가 물었다.
“다른 건? 혼자만 알지 말고 말해.”
“꿿춓쟽.”
“······??? 무슨 뜻이야? 지금 나 놀리는 건가?”
“깨진 별문자를 그대로 읽었습니다.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죠.”
추가적인 정보는 없고, 바닥의 문은 아무리 용을 써도 파괴 불가니, 이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홀로그램이 시킨 대로 수상한 시설을 가동하는 것이다.
앨런이 다시 밖으로 나오자 시야 구석에 문자가 떠올랐다.
외부온도 : -30℃
내부와 비교하면 무려 50도나 차이 났다.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입김은 얼음 가루로 변해서 후드득 떨어졌다.
시바의 수염에 얼음이 다시 주렁주렁 매달렸다.
“어머님의 품이 그리워지는 날씨입니다.”
“마마보이야?”
“형제님.”
시바의 진지한 목소리를 들은 테일러는 장난이 너무 심했다고 반성했다. 종교인을 상대로 신과 관련된 농담을 던졌으니까. 시바가 땡중 같아도 근본은 신실한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시바의 표정은 밝았다.
“우리는 어머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니 정말 괜찮은 표현입니다. 그에 견줄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럼 다행이고.”
가볍게 넘긴 테일러와 달리, 이런 일이 처음인 하쉬는 동족의 뇌세포가 추위에 얼어붙었는지, 모신교가 아니라 사이비를 믿는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 하얀산맥(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