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산맥(4) >
파워슈트가 움직일 때마다 눈이 밀려나며 11자로 길게 이어진 자국이 생겼다. 그마저도 폭설이 금방 덮어버리지만, 뒤따르는 사람들이 이동할 시간은 충분했다.
앨런은 생각을 나눴다. 길을 찾는 데 절반, 이곳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는 데 절반. 테일러 수련법의 효용 덕분에 복잡한 사고가 교차하면서도 엉키지 않았다.
지하에서 봤던 홀로그램은 어떤 작업을 수행해야 더 아래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대로 믿어도 되나?’
유적의 설계자가 방문객에게 우호적이라면 곰들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지만, 그것들은 사람을 보자마자 공격했다.
심지어 곰의 영혼석이 열쇠였다. 아무리 단단히 봉인해놨다고 해도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는 법이다. 브레이커의 회장 같은 사람이 방문해서 단칼에 쪼개버리면?
‘문도 부술 테니 영혼석이 필요 없긴 하겠네.’
제이크 마셜은 이 자리에 없으니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앨런은 잡념을 밀어냈다.
‘설계자가 바랐던 사람이 방문했다면 오히려 곰들이 명령을 들었을 수도 있겠지.’
곰의 영혼석 내부에는 앨런이 해석하지 못하는 별문자나, 뿌연 안개 때문에 관측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해부해보겠지만, 열쇠라는 생각에 시도할 수 없었다.
앨런은 사색이 점점 깊어지자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으니 홀로그램에 나온 대로 움직여야 했다.
이런 종류의 유적 혹은 결계는 설계자의 의도대로 따라줘야 활로가 생겼다. 물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기에, 위험도 가까이 따라붙었다.
앨런이 설원 한복판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파워슈트 덕분이었다. 합금 장갑에 보호받는 내부는 따뜻하고 안락했지만, 외부는.
“으으음···.”
뒤에서 테일러의 신음이 들렸다. 보통 때라면 욕을 한 사발 내뱉고 싶은 표정인데도, 입술이 얼어붙어서 참고 있었다.
피부를 저미는 칼바람과 골수까지 얼리는 한기가 여정을 방해했다. 시야를 제한하는 눈보라도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뻥 뚫린 공간을 걷고 있는데도 독방에 갇힌 모양새였다.
오직 하얗기만 해서 정신병 걸릴 듯한 공간을 묵묵히 걷고 있으니, 하쉬가 차가운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앨런 씨, 이 방향이 맞습니까?”
“네.”
“정말로요?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쉬의 음성에는 짜증과 분노가 묻어있었다. 분노는 혈족을 죽인 존재 때문에, 짜증은 험난한 자연환경 때문에 발생했으리라.
앨런은 자세히 설명했다.
“지하에서 올라오자마자 굵은 파이프 혹은 케이블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홀로그램이 켜짐과 동시에 활성화됐는지 미약한 마력이 흐르더군요.”
흐르는 마력은 문이 존재하는 건물로 향했고, 그 끝에는 정체불명의 시설이 있을 것이다.
“지하에 파묻힌 마력의 통로를 역행하면 되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설원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세세하게 풀어헤친 설명과 차분한 음색 덕분인지 하쉬의 태도도 금방 누그러졌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정신과 육체는 불가분의 관계라 정신이 황폐해지면 말로써 티가 나는 법이다.
위대한 도전을 성공한 사람들도 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속으로는 끝없이 고뇌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얌전한 사람이 오히려 이상했다.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었다. 수직으로 내리던 눈보라가 거의 수평적인 움직임을 보여줬다.
입을 문질러서 얼음을 떼어낸 테일러가 3시 방향을 가리켰다.
“바람까지 부니까 체감온도가 미쳐 돌아가네. 저기 큰 바위, 아니 얼음인가?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쉬자.”
앨런이 의견을 내기도 전에 다른 2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 앨런은 그냥 직진해도 상관없었다. 파워슈트 덕분에 쾌적했고, 점검은 지하에서 끝내놨으니까.
가까이 다가가니 바람막이의 정체가 얼음이라고 판명되었다. 그것도 속에 두더지를 닮은 오토마톤을 품고 있는.
“이것 봐라. 얘네도 너무 추워서 박제가 돼버렸네.”
테일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더지의 카메라 아이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빛이 테일러를 위아래로 훑더니 바로 빨갛게 변했다.
카드득!
코 대신 달고 있는 원뿔 형태의 드릴이 세차게 회전했다. 얼음이 순식간에 깨지고, 자유를 얻은 두더지가 지면을 파고들었다.
녀석은 바로 공격하진 않았지만, 계속 아래를 돌아다니며 신경 쓰이게 했다. 갑작스러운 두더지 잡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보다는 짜증이 가득했다.
“어머님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오늘따라 설계자의 얼굴이 보고 싶군요.”
시바의 꽉 쥔 주먹을 보면 그다음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발밑에 튀어나오는 드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드릴이 뭉개지며 두더지의 목이 크게 꺾였다. 마력회로가 망가지자, 회로를 따라 내달리던 푸른빛들이 허공으로 녹아들었다.
시바의 주먹도 멀쩡하진 않았다. 깨진 권갑 사이로 붉은 얼음꽃이 피었다.
“머릿속에 차오른 부정한 생각을 빼내니 한결 낫군요.”
시바는 정말 상쾌한 표정이었다. 피를 본 하쉬가 입을 열었다.
“주먹은 괜찮으십니까?”
“하쉬 형제님은 마음이 참 고우시군요. 동료들은 묻지도 않는데···.”
앨런과 테일러는 천막을 설치하고 있었다. 상처? ‘의사가 제 병 못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시바는 모신교의 수도승이었다.
“정 급하면 어머님께 약손 빌려달라 해.”
“테일러 형제님, 성법을 그렇게 외워도 발동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평소에 시바가 멋대로 주문을 생략하고, 이름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 놀랍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이동하자 얼어붙은 시설이 나타났다. 비유가 아니라 얼음이 진짜로 건물을 휘감고 있었다.
1층처럼 보이나 전례를 생각하면 지하로 확장했을 것이다. 앨런의 마력 파장 탐지기도 아래로 펼쳐진 구조를 확인했다.
앨런이 왼쪽 어깨를 두드리자 작은 안테나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기능이 많다?”
“탐험을 편하게 해주는 도구죠.”
“너무 복잡하면 싸우다가 망가지기도 쉽지 않을까?”
“제가 직접 싸울 일이 있나요?”
따지고 보면 앨런의 포지션은 포병 혹은 저격수. 급할 때는 직접 나서겠지만, 평소에는 앞으로 나설 일이 없었다.
일행은 차례대로 나서며 얼음을 깼다. 얼마나 오래 얼어있었는지 얼음이 아니라 금속 같았다. 거대한 망치를 장비한 하쉬는 광부여서 그런지 길을 손쉽게 뚫었다.
문이 있는 부분의 얼음을 아치 형태로 제거했지만,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틈이 얼어붙었네요.”
앨런이 손바닥을 내밀자 기다란 화염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불질이 끝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이 다시 닫혔다. 테일러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안하게 왜 이래?”
가까이 가니까 다시 열렸다. 그제야 안심하고 전진했다.
시설은 어두웠지만, 미로나 동굴과 비교할 순 없었다. 검은 안개가 가득한 미궁과 달리, 복도에는 약한 빛을 내는 전등이 있었다. 마치 탈출용 안내등처럼.
다른 장소를 경험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오토마톤이 어디에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몰랐다.
조금 걸으니 하얀 벽이 투명하게 변했다.
‘유리가 아니네.’
앨런이 막을 관찰하고 있으니, 시바가 허리춤을 두드렸다.
“왜 그러세···.”
시바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 앨런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투명한 막 밖에는 지하로 뻗어있는 거대한 기둥들이 있었는데, 오토마톤들이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256···.”
“형제님, 무슨 뜻입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오토마톤의 숫자입니다.”
기둥 뒤나, 저 아래까지 합치면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리라.
바글바글한 오토마톤은 가동정지 상태였다. 평소의 앨런이라면 눈을 빛내며 막을 뚫으려고 시도할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앨런,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그러면 안 된다.”
“그럴 생각 없었어요.”
테일러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잔소리를 했다. 저것들이 모두 깨어나면, 그리고 적대적이라면 감당할 수 없으니까.
복도는 유리로 만든 것처럼 투명했다. 계속 전진하니 제어실로 보이는 방이 나타났다. 마치 절벽 너머로 툭 튀어 나간 전망대 같았다.
주위를 감싼 기둥들이 풍경에 더해지니, 마치 기묘한 숲 한가운데에 있는 듯했다.
“이거··· 깨워야 하나?”
걱정하는 테일러처럼 앨런도 감이 왔다.
“이 시설을 가동하면 오토마톤도 깨어나겠죠. 그런데 가동해야 이곳을 탈출할 수 있어요.”
진퇴양난, 딜레마 등 현재 상황을 표현할 말은 많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테일러는 주저앉았고, 시바는 투명한 막에 얼굴을 대고 기둥을 구경했으며, 하쉬는 안절부절못했다.
앨런은 시설을 조사했다. 설계자가 설비를 숨겨놓을 생각이 없어서 정체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었다.
“마력발전소와 비슷한 시설입니다. 거의 차이가 없겠네요.”
앨런이 말을 꺼내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시설을 가동하면 케이블을 따라 마력이 흘러서 지하로 향하는 문이 열릴 겁니다.”
“오토마톤은?”
“그게 문제죠. 곰 3마리처럼 우리를 적대할 테니까요.”
개개인의 강함은 이쪽이 훨씬 우월하나, 숫자의 폭력이 문제였다. 게다가 더 강한 개체가 저 아래에 잠들어있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마 다른 파티들도 고민 중이겠죠.”
“엘프는 뇌도 근육 같던데.”
“마력발전소의 상태가 모두 같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그들의 실패도 고려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문은?”
“안 열리겠죠. 대신에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폭파?”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제일 좋아하는 행위잖아. 어쩐지 요즘 잠잠하다 했어.”
테일러가 그런 말을 꺼내자 하쉬가 의문 담긴 눈동자로 앨런을 쳐다봤다. 앨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을 이었다.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이곳을 과부하 시킬 거예요.”
“결과는 폭발 맞지?”
“네.”
“그럼 똑같네.”
앨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력발전소는 망가지겠지만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 그냥 진행하겠습니다. 마력 공급이 많아져서, 다른 곳이 실패하더라도 문은 열릴 겁니다.”
앨런은 조작을 마친 곰의 영혼석을 꺼냈다. 애초에 과부하가 가능한 이유는 영혼석을 끼울 위치가 발전소의 코어였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여주는 꼴이었다. 그러니 살짝만 만져도 치명적이었다.
앨런이 허리를 펴자, 테일러가 질문을 던졌다.
“과부하는 누가 담당하게?”
“제가 할게요. 설원에서 탈출하려면 누군가는 해야죠.”
“폭발 반경은?”
“적어도 마력발전소와 주변은 통째로 날아가겠죠. 여유 시간은 10초나 되려나···.”
테일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럼 내가 남을 테니 너는 올라가라.”
“네?”
“희생할 필요 없다. 나는 충분히 살았으니 괜찮아.”
“원격 조종하면 되는데요.”
“아···.”
테일러가 입을 다물더니 천장을 바라봤다. 추워서 그런지 귀가 새빨개졌다.
“형제님은 참 건강하시군요.”
“···.”
“귀가 굉장히 빠르게 붉어지는 모습을 보니, 적어도 10년은 혈관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테일러가 못 들은 척하고 있으니 시바가 씩 웃었다.
“앨런 형제님, 어떤 오토마톤을 조종할 생각이신지?”
“당연히 이 아이입니다.”
앨런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는 상자가 있었다. 계기판이 잔뜩 있는 기계를 집게발로 툭툭 건드리는 자세 그대로 멈췄다. 카메라 아이의 조리개만 살짝살짝 움직였다.
“형제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했나 봅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형제님, 냉혹하시군요.”
시바가 책망하는 듯한 소리를 내자, 상자가 그의 뒤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특이한 행동을 보이자 벙어리를 자처하던 테일러도 입을 열었다.
“저거 봐, 저거.”
“관심이 쏠렸을 때의 행동방식을 정해주지 않아서 저러는 겁니다.”
앨런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앞에 멈추자, 상자의 집게발이 축 늘어졌다. 앨런은 서랍을 열고 거미를 꺼냈다.
“이 아이면 충분합니다.”
“너 왜 자꾸 사람을 오해하게 만드는 거냐?”
삐―!
테일러가 미간을 좁히고, 우연인지 상자의 기계음이 따라붙었다. 앨런은 눈 하나 깜짝 안 하며 과부하 준비를 마무리 지었다.
거미를 제어실에 두고 설원으로 올라간 일행은 꽤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럼 시작합니다.”
앨런이 말을 하고 10초 후.
쿠르릉!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불벼락이 솟구쳤다. 몰아치는 눈을 모두 녹이며 주변을 사우나처럼 만들었다.
몸을 돌리려던 앨런은 그럴 수 없었다. 화염 속에서 도드라지는 2개의 붉은 빛이 보였다. 그건 무언가의 눈동자였다.
< 하얀산맥(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