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산맥(5) >
마력발전소의 과부하는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냈다. 녹아내린 오토마톤과 불탄 대지가 뒤섞여서 마그마처럼 분출했다.
시설 일대는 끝없이 불타고 있어서 접근하기 어려웠다. 회오리치는 눈의 형상을 보니 마력 폭풍까지 불고 있었다.
마력 폭풍은 마력의 밀도가 너무 높은 상태에서 충격이 가해지면 발생하는 현상이다. 일반인이 가까이 다가가면 방사능에 피폭당한 것처럼 픽픽 쓰러진다.
너무 작은 마력 알갱이에 온몸이 관통당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변화가 적어서 당했다는 인식도 없을 테지만.
테일러는 하늘을 쳐다봤다.
이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유적에는 변화가 없었다. 막대한 힘이 요동치면 결계 혹은 공간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이곳은 똑같이 눈보라가 내렸다.
어떻게 만든 장소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단순한 유적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처음 겪어보는 현상을 진지하게 궁리하는 도중, 앨런의 부름이 들려왔다.
“저기 보세요.”
시설이 워낙 커서 고개를 돌려야 다른 장소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테일러도 빨간 안구를 확인했다.
불꽃보다 더욱 붉은 눈이 화염의 벽을 뚫고 나왔다. 타란툴라처럼 생긴 오토마톤의 눈이 2개인 이유는 나머지 6개가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복수하려고 돌아왔나 보다.”
“그럴 리가 없죠. 크기부터 다른걸요.”
“농담이잖아.”
앨런의 거미가 손바닥 크기라면 타란툴라는 승용차와 비슷한 덩치였다.
“어째 비실비실해 보인다. 싱겁겠는데.”
“형제님, 방심은 금물입니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시바의 표정도 편안했다. 외장갑이 떨어진 부분에 툭 튀어나온 인공 근육은 불탔고, 다리도 몇 개는 잃어버렸다. 잿더미로 변하기 직전의 오토마톤은 아무런 위협도 아니었다.
그 순간, 화염 속에서 또 다른 눈 한 쌍이 위로 솟구쳤다.
“어, 좀 큰데···.”
테일러의 목이 위로 꺾였다. 그리고 불지옥을 빠져나온 녀석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콰직!
타란툴라는 납작하게 변했다. 거대한 발바닥에 짓눌리지 않은 다리가 요란하게 춤을 추다가 동작을 멈췄다. 새로이 나타난 오토마톤의 형상은.
“코끼리? 설원이니 매머드가 더 어울리지만, 너무 크잖아···.”
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재면 3층 건물 높이와 비슷했다. ‘집채만 하다.’라는 표현을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 바꾸는 몸집이었다.
테일러는 도주를 떠올렸으나, 망가진 매머드를 보니 자신감이 조금 싹텄다. 그리고 눈동자만 굴려서 일행을 살폈다.
시바는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하쉬를 달래고 있었고, 앨런은 가만히 서 있었다.
앨런의 표정으로 무슨 속내인지 짐작하려 해도 바이저 그리고 얇게 개조한 마스크 때문에 알기 어려웠다. 어차피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이겠지만.
“한판 붙을 거냐?”
“네. 순순히 도망치게 놔둘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매머드가 부서졌다고 해도 다리 길이를 보면 우리보다 훨씬 빠를 겁니다.”
그 말대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녀석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다.
“가자.”
삐―
“너, 말고.”
앨런은 임시로 만든 썰매에 탑승했다. 설원에서 쓰러트린 오토마톤의 외장갑으로 만든 썰매는 표범이 끌었다.
상자도 함께 따라가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앨런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너는 여기에서 화력 지원해. 여차하면 대신 맞아주고.”
그 말을 끝으로 앨런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탑승한 썰매가.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상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대신 맞으라니. 주인이 참 너무한다. 그렇지?”
삐!
상자가 높은 소리를 내며 테일러의 손을 쳐냈다.
“화내는 거야? 왜?”
그 사이, 앨런은 매머드의 주변을 돌며 녀석의 상태를 관찰했다.
‘덩치를 보면 화력은 대단하겠지.’
마탄으로 견제하면서 어설프게 도망쳤다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부하로 인한 폭발과 마력 폭풍에 얻어맞은 매머드는 정상이 아니었다. 특히, 왼쪽 뒷다리가 너덜너덜했다. 외장갑은 전부 벗겨졌고, 찢어진 마력 케이블로 흘러나온 마나가 푸른빛을 내며 산화했다.
앨런은 표범의 기동력을 살려서 괴롭힐 생각이었다.
“더 빨리!”
주인의 명령에 반응한 표범이 설원을 더욱 강하게 박찼다. 순간적인 가속에 썰매가 앞으로 튀어 나가고.
투두두두!
지나간 궤적을 따라 눈이 사납게 튀어 올랐다. 원인은 매머드의 상아, 정확히 말하면 상아처럼 위장한 기관포였다.
상아 밑으로 축 처진 검은 선은 케이블이 아니라 급탄을 위한 띠였다. 탄약이 기관포 내부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빨려 들어갔다.
‘크기를 보니 20mm? 피격당하면 좋은 꼴은 못 보겠어.’
썰매는 매머드를 중심으로 크게 원을 돌며 달렸고, 녀석은 앨런을 맞추기 위해 동체를 회전시켰다.
주의는 끌었으니 일단 첫 단계는 성공이었다. 기관포가 다른 쪽으로 향했다면, 테일러나 시바면 몰라도 하쉬는 확실히 조각났을 것이다.
반시계방향으로 이동하던 앨런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파워슈트의 팔뚝이 열리며 굵은 총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장전한 마탄은 철갑탄. 마탄이 총구를 빠져나간 반동에 팔이 살짝 떨렸다.
철갑탄은 허공을 날았다. 분명 빗나가는 궤적이었다. 마침 매머드가 몸을 돌리지 않았다면.
콰직!
왼쪽 상아가 아래로 푹 꺾여서 덜렁거렸다. 기관포 안으로 운반되던 탄약이 자극을 받았는지 연속으로 폭발했다.
추가적인 피해를 받은 매머드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상자가 쏘아낸 마탄이 녀석의 옆구리에 화염을 꽃피웠다. 마탄은 외장갑이 녹아내린 부분만 골라서 타격했다.
앨런과 상자의 공격이 연속으로 성공하자, 매머드의 앞다리가 무릎을 꿇었다. 고통을 느낄 리는 없으니, 마력회로가 보내는 신호에 잠시 이상이 생긴 것이다.
“우리도 가자.”
“알겠습니다. 하쉬 형제님은 저 바위 뒤에 숨어 계세요.”
테일러와 시바가 적의 이상 신호를 놓칠 리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었다. 상처 입은 초식동물을 놓칠 포식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그 대상이 매머드여서 초식동물이라고 하기엔 어색했다.
시바는 뒷다리를 공략할 생각인지 매머드의 뒤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철소에서나 들릴 법한 쾅쾅 소리가 들렸다. 범종을 때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테일러는 매머드의 등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동한 리플렉스 액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폭음도 길게 늘어졌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테일러의 속도는 그대로였다. 리플렉스 액셀이 생체 신호를 가속하고 증폭했다. 부서진 외장갑이 지금은 위로 향하는 발판으로 보였다.
무릎을 살짝 꿇어서 추진력을 확보한 테일러는 어느새 매머드의 등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테일러는 드럼 탄창을 장착한 샷건을 아래로 겨눴다. 매직웨어로 강화한 왼손으로도 반동을 견딜 수 있으니, 오른손으로는 마나소드를 꺼냈다.
그 상태로 엉덩이부터 머리까지 내달렸다.
탕탕탕!
화약에 섞인 마석 가루가 훨씬 강한 파괴력을 뽐냈다. 탱크처럼 두꺼운 외장갑에 쏘면 아무 소용 없으니, 인공 근육이 보이는 부분만 노렸다.
슥!
마나소드 역시 인공 근육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날이 없는 무기는 가벼워서 손목만 꺾으면 가동범위가 휙휙 바뀌었다. 덕분에 인공 근육은 다져진 모양새가 되었다.
테일러는 오직 외장갑이 없는 부분만 파고들었다. 적의 약점을 노리는 행위는 비겁함이 아니라 영민함의 발로였다.
‘이 녀석이 멀쩡했다면 도망이 훨씬 나은 선택지였겠지.’
매머드는 타이탄으로나 상대할 덩치였다. 둘을 붙여놨으면 볼만한 구경거리였으리라.
머리까지 도달한 테일러는 마나소드를 역수로 잡았다. 오토마톤은 동물과 달라서 이곳에 뇌가 있을 확률은 낮았지만, 감지 기관이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마나소드가 외장갑의 틈을 파고들기 직전.
우우웅!
커다란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동시에 몸도 덜덜 떨렸다. 생명체가 들을 수 없는 대역의 효과이리라.
원인은 매머드의 귀. 분명 작았던 귀는 부챗살처럼 쫙 펼쳐진 상태였다. 그곳이 파르르 진동하면서 음파 공격을 뿜어냈다.
“크윽!”
테일러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리플렉스 액셀의 냉각 시간이라 대처할 수 없었다. 툭 튀어나온 외장갑에 겨우 손을 뻗었지만, 썩은 고목이 부러지듯 함께 떨어져 내렸다.
테일러는 눈밭에 얼굴을 처박았다. 음파 때문에 눈에도 잔물결이 생겼다.
시바도 영향을 받았는지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나마 성법 때문에 나은 것 같지만, 동작이 애벌레처럼 느렸다.
그리고 테일러는 목격했다. 자신을 향해 머리를 돌린 매머드를. 붉게 타오르는 코끝을.
빛은 점점 강해졌다. 수문장이 안구 광선을 발사하기 직전과 비슷했다.
콰앙!
코 근처에서 성대한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코가 꺾이며 붉은 광선이 테일러가 아니라 근처를 지나갔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눈을 순식간에 안개로 바꾸고, 주변이 뿌옇게 변했다.
콰앙!
다시 폭음이 터지며, 음파 공격이 주춤거렸다.
테일러는 뒤로 구르며 탄력을 이용해 위로 점프했다. 시야에 들어온 상자가 집게발을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마탄 발사가 성공적이었다는 표시이리라.
‘앨런은?’
매머드의 몸 반대편에서도 폭음이 들리니, 그쪽에서 교란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형제님, 괜찮으십니까?”
“고맙다. 일단 정비.”
“그렇게 하죠.”
시바의 하얀 손이 몸 위를 스칠 때마다 통증이 가라앉았다. 잠깐의 여유가 생겨서 뒤를 힐끔 쳐다보니, 시바의 주먹이 터트린 뒷다리가 보였다. 저러니 마탄 몇 발에 매머드가 휘청거렸으리라.
퉁!
그때, 테일러의 근처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외장갑은 외장갑인데 무언가 이상했다. 애초에 분리를 상정하고 만든 부위 같았다.
고개를 든 테일러는 등의 일부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외장갑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는 주먹 크기의 소형 미사일들이 가득했다.
그곳에서 불꽃이 튀더니, 미사일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목표는 마탄으로 자신을 방해한 상자.
상자 역시 한쪽 집게발로 방패처럼 생긴 마력방어막을 펼쳤지만, 미사일의 수가 너무 많았다.
콰르릉!
불벼락이 한차례 떨어지고, 폭삭 주저앉은 상자만 보였다. 상자라는 표현은 너무 동떨어져 있고, 고철이라는 단어가 훨씬 정확했다.
테일러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던 상자의 최후에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상자 근처의 바위에 하쉬가 숨어있었다.
“폭발반경을 보면 휩쓸렸겠지.”
자욱한 먼지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그건 확실했다. 하쉬에게 날개라도 달렸으면 몰라도.
그때, 먼지 사이로 짙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것의 정체는 표범과 눈썰매. 하쉬는 앨런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고맙···.”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으헉!”
표범은 탑승객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썰매를 끄는 게 아니라, 휘두르는 행위에 가까웠다. 앨런도 파워슈트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튕겨 나가서 눈밭을 뒹굴고 있었겠지.
앨런의 눈동자가 상자의 잔해를 훑었다. 그것도 잠시, 다시 매머드를 주시했다. 눈빛은 평소와 똑같았다.
매머드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옆구리와 배가 있는 부분이 열리더니 공장식 닭장 같은 구조가 보였다. 그 안에는 작은 새를 닮은 오토마톤이 층층이 수납되어있었다.
매머드는 육지를 걸어 다니는 항공모함이었다. 작은 새들이 날개를 펼치며, 밖으로 뛰쳐나왔다. 빨갛게 달아올라서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보면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 감이 왔다.
‘자폭이겠지. 하지만 그게 실수야.’
바이저에 가려진 앨런의 얼굴에 삼원이 나타났다. 세 개의 원이 겹친 미간은 특히 빛났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헬멧의 내부 조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앨런의 왼쪽 눈에서 푸른 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용오름처럼 강렬하고 사나웠다.
눈은 새들의 영혼석을 꿰뚫었다. 별문자에 간섭하고, 각 부위로 내달리는 신호를 조작했다.
날아오른 새들이 방향을 틀었다. 그건 매머드의 몸에 남아있는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쾅!
새들의 몸이 외피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콰앙!
출격을 기다리던 새들은 매머드의 몸을 파고들며 속에서 폭발했다. 매머드의 몸 구석구석에서 화염과 연기가 솟구쳤다.
< 하얀산맥(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