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98화 (98/193)

< 하얀산맥(6) >

초중전차 혹은 육상항모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매머드는 덩치에 걸맞게 터프했다. 내부에서 일어난 자폭새들의 배신에 온몸에서 불이 나는데도 우뚝 서 있었다.

“징그럽다.”

테일러는 마력 수련자였다. 인공 마나하트를 심었어도 마력감응력이나 감지력은 멀쩡했다.

덕분에 매머드 내부에 휘몰아치는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사람과 달리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애초에 저 덩치는 어디에서나 보일 테니 은신에 신경이나 쓰겠는가.

테일러는 시바와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세···.”

“잠시만요.”

앨런은 각오를 다지고 돌진하려는 둘의 앞을 썰매로 막아섰다. 급격한 제동으로 인해 눈이 파바밧 튀었다.

“끝났습니다. 멀리 떨어지세요.”

“마법공학자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나?”

“네. 저건 최후의 발악입니다. 상대에게 넘어갈 바에는 부품을 모조리 파괴하는 자폭 시퀀스입니다.”

앨런의 말대로 일행은 멀찍이 물러났다. 매머드가 작게 보이는 위치까지 이동하니, 아직도 불타오르는 마력발전소 앞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상대적 비유가 그렇다는 말이지 꽤 성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고통에 시름하던 땅이 울음을 멈추자, 앨런이 매머드를 관찰했다.

“확실히 끝났습니다. 다른 오토마톤도 안 보이고요.”

“멀쩡했으면 어땠을까?”

“매머드는 광산에서 봤던 DT-10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는 괴물입니다. 제대로 싸웠으면 아저씨와 하쉬 씨는 이 자리에 없었겠죠.”

“시바도 아니고 내가?”

“형제님···.”

시바가 책망이 가득 담긴 말투로 테일러를 찔렀다. 물론 테일러도 모두 무사해서 하는 농담이었다.

“발전소의 과부하를 담당하겠다고 했던 말처럼 저를 보호하려고 했을 테니까요.”

앨런의 말을 들은 테일러가 머리를 긁적였다. 명백히 쑥스러워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

테일러는 의문 가득한 눈빛만 던졌다. 그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앨런이 나섰다.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설령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그렇게 하마.”

과연 그럴까? 앨런은 미리 말을 나눴어도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테일러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았다.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기에 일단 눈앞에 집중했다.

앨런은 매머드를 분해했다. 워낙 커다란 녀석이라 온종일 걸릴 것 같아도 핵심 부품만 챙긴다면 짧게 끝낼 수 있었다.

“이건 무게만 잔뜩 나가서 필요 없고, 이건 괜찮은데 들이는 수고에 비하면 별로고···.”

내부를 파헤칠수록 앨런의 음성에는 실망만 내려앉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매머드는 마력발전소의 폭발로 인해 상당한 부분이 망가졌는데, 추가적인 폭발까지 견뎌야 했다.

앨런이 빠루로 철판을 떼어내자, 녹아내린 기판과 마력케이블이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었다. 챙겨가서 분리하느니, 차라리 돈 주고 사는 편이 훨씬 나을 정도였다.

“영혼석을 건지긴 했는데 제대로 작동하려나 모르겠네.”

당연히 영혼석 제거도 자폭 시퀀스에 포함되어 있는데, 문제가 생겼는지 그 부분은 남아있었다.

자폭의 효과가 있긴 했다. 영혼석은 투명하고 납작한 수정 속에 불투명한 기류가 떠다니는 모습이지만, 지금은 일부분이 새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아쉽지만 이것으로 만족해야겠죠.”

“저기는 건질 거 없으려나?”

앨런은 테일러가 가리키는 장소를 쳐다봤다. 마력발전소에는 붉은 강이 넘실거렸다. 땅과 오토마톤이 녹아내린 액체였다. 지옥의 죄인들을 삶는 가마솥이 저렇게 생겼으리라.

“힘들겠네요. 운반하려면 식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얼마나?”

“예전에 논문을 읽었는데···.”

“윽···.”

머리 아픈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테일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짧게 끝낼게요. 지진 때문에 마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났는데 한 달 넘게 불타올랐어요. 마력이어서 다행이지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사용했으면 끔찍했겠죠.”

“길게 설명 안 한다며.”

테일러는 앨런의 입을 막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다시 여정을 떠나기 전, 마력발전소가 뿜어내는 열기 때문에 녹아가는 땅을 둘러봤다.

“다른 파티는 어떻게 했을까? 감히 오토마톤의 군대에 맞서겠다는 생각은 못 했을 텐데.”

“엘프 형제님은 뇌도 근육 같으니, 그냥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본능에 따라 움직여. 보자마자 포기했을걸. 내기해도 좋아.”

“가동했다에 고급 성수 3병.”

“나는 반대쪽에 3병.”

건전한 도박의 현장을 구경하던 앨런이 썰매에 탑승했다.

“모든 경우를 가정하고 과부하를 시켰으니, 다른 쪽과는 상관없이 문은 열릴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복귀를 시작했다.

조금 움직이자 다시 눈보라가 몰아쳤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서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트렸다. 불타는 발전소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얼굴을 때리는 눈발 때문에 고개를 살짝 숙인 테일러가 말을 꺼냈다.

“상자는?”

“별문자를 어떻게 입력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본 테일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앨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앨런은 어깨에 올라온 거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오토마톤의 영혼석은 사람으로 치면 영혼이자, 심장이자, 뇌입니다. 당연히 최우선 보호 대상입니다.”

“설마 그 거미가?”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올라간 거미의 움직임은 살충제를 먹은 곤충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몸이 달라서 그런지 걸음마도 힘들어하네요.”

“너, 자꾸 애매하게 말할래? 발전소에서도 이랬잖아. 나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 어쨌든 멀쩡하니 다행이다.”

“정이라도 드셨어요?”

“지성이 싹튼 것처럼 행동하잖아. 인공지능? 인공정령? 아무튼, 내 말뜻 알지?”

“명칭만 다르고 비슷한 개념입니다. 태양이나 해처럼요. 그리고 상자는 반응 알고리즘이나 행동 패턴을 좀 많이 입력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혹시 모르지.”

앨런은 그 말을 듣고 상자를 빤히 쳐다봤다. 녀석은 다리가 제멋대로 춤추는 현상을 막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마력이 깃들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자주 일어나니까요.”

공학자 특유의 고집을 지닌 앨런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한동안 지켜볼 생각이었다. 때론 시간이 옳은 답을 내려줄 때도 있으니까.

“누가 나를 업그레이드 해줬으면 멀쩡했을 텐데···.”

“네?”

“상자 말이야.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상당수 처리했겠지. 그랬으면 나머지는 상자도 막을 수 있었을 거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바가 끼어들었다.

“형제님, 훌훌 털어냈다고 해놓고 아직도 심중에 품고 계십니까? 연장자의 넓은 아량을 보여주시지요.”

“나이와 변화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수명 연장하려고 끔찍한 짓을 벌인 것들이 전부 노인이었듯이.”

“맞습니다. 사람의 각성이나 악인의 개과천선은 보기 드뭅니다. 그래서 더욱 귀합니다. 인간 승리 혹은 찬가라고 불릴 만큼.”

앨런은 카르텔 조직원을 데려갔던 수녀를 떠올리며 물었다.

“경험담인가요?”

“네, 저도 그쪽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뉘우치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혹은 반성했다고 자신을 세뇌할 뿐입니다. 실상은 공포와 금제 때문에 굴복한 것이지요.”

“종교인이면 좀 더 희망찬 미래를 노래해야지.”

“테일러 형제님도 알다시피 현실은 냉혹합니다.”

“그래서 타락하고 땡중이 됐구나.”

“아니, 대화가 왜 그런 쪽으로 흘러갑니까?”

큰 고비를 넘겨서 그런지 일행에게는 여유가 흘렀다. 덕분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문이 존재하는 건물로 복귀한 앨런은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에 쌓인 눈이 치워진 모습을 보면, 청소 두꺼비는 제대로 작동하는 듯했다.

문이 존재하는 홀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래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하쉬와 사촌이 끌어안았다.

“로이스.”

“하쉬 형님.”

엘프 파티와 함께 다니는 드워프가 하쉬를 반겼다.

“오토마톤 때문에 그냥 돌아왔습니다. 문은 형님이 여셨죠?”

“저분들이 했지. 문이 열렸는데 왜 가만히 있지?”

“우리가 돈을 주고 고용했으니 그 말이 그 말이죠. 형님이 열었으니 입장도 가장 먼저 해야죠. 그래서 안 들어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바의 수염이 호선을 그렸다.

“예절을 아는 형제님입니다. 어디를 가도 굶어 죽진 않겠군요.”

“위험할까 봐 기다렸을 수도 있지. 어쨌든 내기는 내가 이겼다.”

“어쩔 수 없군요.”

“태연하다? 고급 성수는 손도 못 대게 하더니.”

테일러는 시바와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근육질 엘프, 롤로를 보며 웃었다.

“자신 있게 가더니.”

“오토마톤이 그리 많은데 어떻게 하라고. 아니면 장치라도 하나 떼어왔어야 했나?”

“잘하셨습니다.”

“넌 어른들이 말하는데 왜 끼어들어?”

롤로가 목소리를 높여도 앨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전부 내뱉었다.

“무언가를 부쉈으면 침입자 제거 절차가 실행됐을 겁니다. 비상 동력을 통해 오토마톤 다수가 깨어났으면 그쪽은 이 자리에 없었겠죠. 친구들도요.”

“끙···.”

끔찍한 가정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롤로가 거리를 벌렸다. 죽음은 자신도 익숙했으나, 말을 하는 앨런의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사이코패스냐?”

“아닙니다.”

이제는 다시 아래로 내려갈 차례였다. 열린 문 아래로 수직 통로가 뚫려있었다. 사람들은 줄에 매달리거나, 부착 능력이 있는 등반 마도구를 사용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간 앨런은 통로의 정체를 파악했다.

“승강기군요.”

줄 없이 부유하는 원형 장치가 아래에 있었다. 그것도 파괴된 상태로.

“시작부터 불안한데.”

“쫄지 마.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더 불길하잖아.”

“닥치고 탐색이나 시작해. 뭐 발견하면 함부로 건들지 말고 바로 사람 부르고.”

아래에는 깜깜한 복도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진입하자 불이 켜졌다. 헤드 랜턴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빛이 보이자 차분해졌다.

사람들은 복도와 연결된 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여긴 뭐 하는 곳일까?”

“저거 애기들이 쓰는 요람이잖아. 딸랑이도 있네.”

“갖고 놀지 말고 내려놔.”

“이곳은 식당 같고. 동시에 100명도 먹겠는데.”

“여기는 창고다. 통조림인가?”

“괜히 먹을 생각하지마. 알지? 이런 곳에 있는 물건 함부로 건드리면 죽는다.”

온갖 생활 시설을 지나가자 원형 문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짜증을 내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자동문이구나.”

“쌍욕 장전하고 있었는데 다행···.”

사람들이 동시에 말을 멈췄다. 안에는 깨진 유리관이 가득했다.

“이거 동면장치잖아.”

동면장치 혹은 생명유지 장치의 일종이었다. 최고급 장치는 시간을 극도로 느리게 하는 종류도 있었다. 미궁에서 발견한 오파츠이며, 미궁의 창조자가 시간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앨런도 다른 사람들처럼 동면장치를 자세히 관찰했다. 내부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액체는 말라붙은 지 오래였고, 안에 있어야 할 무언가도 존재하지 않았다.

깨진 유리에 시꺼먼 무언가가 묻어있기도 했다.

‘이건 피 같은데···.’

앨런은 원형 문을 다시 쳐다봤다. 거기에는 밖에서 볼 수 없었던 흔적이 보였다.

‘손톱과 핏자국?’

마치 탈출하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앨런은 길게 이어진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구역마다 깨진 유리관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구역에서 불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테일러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잿가루가 될 때까지 태워버렸네. 이러면 유전자 감식도 안 돼. 명백히 잘 아는 놈의 소행이다. 재의 양을 보면 유리관 속에서 잠자고 있을 생명체가 모두 여기에 뒤섞여있겠구나.”

“그나마 멀쩡한 게 하나 있어요.”

앨런이 가리킨 곳에는 타다만 백골 하나가 있었다. 테일러가 쪼그려 앉으며 상태를 살폈다.

“경추의 상처를 보니 경동맥 쪽을 잘렸나 본데.”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테일러의 시선이 골반 부분에서 딱 멈췄다.

“꼬리뼈가 없잖아.”

< 하얀산맥(6)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