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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99화 (99/193)

< 하얀산맥(7) >

꼬리뼈는 척추의 끝부분이자 꼬리의 흔적이다. 척추동물인데 꼬리가 없다면, 대신에 꼬리뼈가 있다고 생각하면 됐다.

그러니 테일러가 반쯤 타버린 골반을 붙잡고 고민하는 것이다.

“오크나 고블린, 심지어 지하인도 꼬리뼈가 있는데 이건 뭐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종족인가? 아니면 돌연변이?”

“유적의 설계자가 만든 호문쿨루스일 수도 있죠.”

“그럴싸하다. 호문쿨루스는 제조자의 의도에 따라 형태가 크게 변하니까.”

“하쉬 씨, 여기에 남은 유골도 챙길까요?”

하쉬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불탄 뼈들을 관찰하다가, 제 이름이 나오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평생 광부로 일하다가 대량학살의 흔적을 발견했으니 오죽할까.

“음···. 어···. 네, 일단 그렇게 해주세요. 생물학자에게 보여주면 결론이 뭐라도 나오겠죠. 저는 복도에 있을 테니 여기 조사는 알아서 해주세요.”

하쉬는 손으로 입을 막고 사라졌다. 마치 토하기 직전의 모습과 흡사했다. 테일러는 그의 등을 잠깐 쳐다봤다.

“저게 당연한 거야. 나도 경험이 많으니 괜찮고.”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눈썹이나 찌푸리고 그런 말 하든가.”

앨런은 다시 잿더미를 응시했다. 동면장치와 생활 시설을 보면 이곳은 벙커가 분명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발생했기에 이곳이 화장터가 되었을까.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창궐? 누군가가 정신병에 걸려서 학살을? 괴물의 침입? 그것도 아니라면 유적 설계자의 장난?

장난일 확률도 높았다. 유적을 만들 정도면 마법과 신비에 조예가 깊고, 그런 사람들은 나사가 빠지다 못해 박살 나 있으니까.

미치광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사회의 통념이나 규범으로는 그들을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광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니 시바가 앞으로 나섰다.

“정화봉사단에 가입한 나쁜 형제자매님들 대부분이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정화봉사단? 뭐 하는 조직이길래 깜찍한 이름을 지녔어?”

“뇌 확장 장치 개조 받은 분들 말입니다.”

“아···.”

테일러는 알겠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나타난 수녀가 폭력조직원들을 수집하는 장면은 확실히 인상 깊었다.

“탐험가 중에도 그런 놈들이 굉장히 많아.”

“질서가 나름 잡혀있지 않습니까?”

“탐험가들은 전부 한가락 하는 놈들만 있어서 눈치 없이 까불면 죽으니까. 법은 멀지만, 주먹은 매우 가깝잖아.”

“맞습니다.”

“성직자가 이런 걸 동의해?”

“진실인데 어쩌겠습니까? 매가 약이라는 말은 복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어머니 수녀라는 분께 머리를 많이 맞았나?”

앨런은 이야기꽃을 피우는 둘을 놔두고 주변을 돌아다녔다. 지금까지 힘들게 일했는데, 머리 아픈 상황까지 직면했으니 쉬고 싶은 마음도 이해됐다.

애초에 고용된 입장에서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보수만 받아가면 되니까.

그런데 궁금하니 어쩌겠는가. 앨런에게는 재미의 영역이라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뇌 속에 존재하는 도서관에 책을 하나하나 채워 넣는 쾌감은 그 무엇보다 상위에 존재했다.

‘깨진 유리관, 끌려간 자국.’

죽고 나서 운반된 게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끌려간 것이다. 그랬으니 문 안쪽에 손톱으로 긁은 듯한 흠집이 있으리라. 사실 문이 너무 단단해서 손톱과 핏자국만 많았지만.

‘불은 왜 질렀을까?’

불은 정화의 의미도 있지만, 파괴도 내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당연히 후자였다. 벙커 내부의 생명체를 말살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생활 시설이나 발전소는 왜 가만히 놔뒀지?’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앨런이었다면 벙커를 통째로 붕괴시키고, 발전소마저 파괴했을 것이다.

‘경우의 수는 2가지. 유적 설계자의 악의적인 장난이거나, 무슨 이유가 있어서 파괴 활동을 멈춰야 했거나.’

앨런의 시선이 반쯤 타버린 유골로 향했다. 테일러는 목뼈의 상처를 보고 경동맥이 잘렸으리라 판단했다.

‘피해자가 아니라 피의자인가?’

그때, 밖에서 소란이 들렸다. 우다다다 달려가는 소리가 앨런의 집중을 깼다. 사람들을 따라가자 사과를 크게 베어 문듯한 붕괴 흔적이 보였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네.’였다.

벙커는 지하에 있었다. 외벽이 망가지면 무엇이 보이겠는가? 거의 모든 사람은 흙이나 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접근하지 마!”

“전부 물러나!”

사람들이 극도로 경계했다. 벙커 외부에는 지반이 아니라 혼탁한 색채가 존재했다. 불길하게 꿈틀거리는 형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붕괴 지점 근처의 콘크리트와 철근을 긁어내던 앨런이 뒤로 끌려갔다.

“아무리 궁금해도 저긴 가지 마라. 만지지도 말고.”

“뭔지 아세요?”

“공간문을 열다가 실패하면 저렇게 돼. 차원의 미아가 되기 싫으면 호기심 죽여.”

“미아가 되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공간 계열 대마법사가 직접 들어가서 조사했으니까.”

“돌아왔단 뜻이군요.”

“또, 또. 눈 돌아간다.”

앨런은 성인인데도, 테일러는 물가에 내놓은 애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잘못하면 혈압 조절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테일러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그 후로 사람들은 탈출구를 찾아 벙커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여기 갇힌 거야?”

“하···. 보수가 높아서 홀린 내가 원망스럽다.”

허탕만 쳤다.

그래도 최소한의 질서는 유지되었다.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는 마력의 흐름 때문이다. 발전소 과부하로 거칠던 흐름이 가라앉는 중이었다. 마력감응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이었다.

혼자 신난 앨런은 계속 탐구를 진행했다. 원래 지하에 존재하는 벙커 시설은 훨씬 거대하리라 예측되지만, 그쪽으로 통하는 복도는 혼탁한 색채에 막혀버렸다.

“뚜렷한 해결책이 없네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너도 그만 돌아다니고 쉬어. 그러다 과로로 쓰러진다.”

앨런은 눈을 감은 테일러 옆에서 매머드의 영혼석 살폈다.

“아, 눈뽕!”

테일러가 옆으로 몸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앨런의 앞에 펼쳐진 입력창은 그야말로 별의 바다였다. 매머드의 덩치만큼 안에 담긴 내용도 많았다.

사실 앨런은 돈으로 고용된 몸이라 유적에서 얻는 물건은 모두 하쉬의 몫이다.

용병들은 고용주가 없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얻으면 조금씩 챙기긴 하지만, 하쉬는 앨런이 꺼낸 영혼석을 봤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속이긴 싫었다.

그래서 말을 꺼냈다.

“내부를 살펴보기만 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아니면 어르신들을 설득해서 드리겠습니다. 아직 탈출은 요원하지만, 앨런 탐험가님이 이번 탐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욕심 없고 정직하시군요. 탐험가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세상도 훨씬 살기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앨런에게 중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지식이었다. 매머드의 영혼석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별문자의 구조에 대한 정보는 영원했다.

기분 좋은 오해라서 앨런은 머리만 살짝 끄덕이고 말았다.

앨런이 매머드의 별문자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이틀이 지났다.

복도가 떠들썩하게 변했다.

“문이다! 탈출할 수 있어!”

“모두에게 알려!”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워낙 커서, 구역마다 캠프를 차렸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테일러가 불안정한 공간문이라고 했던 혼탁한 색채가 사라지고, 어떤 풍경이 나타났다. 하얀 눈이 쌓인 산이 보였다.

하쉬는 그곳이 어딘지 알아봤다.

“하얀산맥의 봉우리를 잇는 산등성이입니다. 등산코스로 애용하는 길입니다.”

“형님, 저도 기억납니다.”

로이스도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풍경 속에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드워프 사촌 형제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퉁퉁이!””

그들이 퉁퉁이라고 부른 생명체는 와이번이었다. 사람들이 쳐다보자 하쉬가 설명을 곁들였다.

“이 부근의 지배자입니다. 식탐이 많아서 덩치가 좀 크죠?”

하쉬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조금이 아니라 비만 와이번이었다. 살이 더 찌면 날 수 없을 정도로.

“영리해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수족관의 물개나 돌고래 같은 녀석이죠. 가끔 길을 막고 투정을 부리는데, 초콜릿이나 과자를 주면 비켜줍니다.”

탈출구가 보이자, 여태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도 이랬으면 문명 발전 속도가 2배는 빨랐으리라.

벙커에 존재하는 물건을 가득 챙긴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 잡동사니를 밖으로 던졌다. 잡동사니는 산등성이에서 굴러다녔다. 확인이 끝나니 망설임도 사라졌다.

앨런이 문을 통과하자, 눈 밟는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삼라만상에 접속 가능하다는 문구도 시야 구석에 나타났다.

안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리고, 땅에 뽀뽀하는 사람도 있었다.

“악!”

갑자기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

“마석이 사라졌어!”

유적에서 챙긴 전리품이 모두 없어졌다. 매머드의 영혼석을 보관해둔 주머니도 텅 비어있었다. 화장터에서 건진 꼬리뼈 없는 골반도 사라졌다.

그 고생을 했는데 건진 게 없으니, 사람들이 집단 우울증에 걸렸다. 하나같이 앓는 소리를 내며 가정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추가 보수도 싹 날아갔다.

슬픔 속에서 앨런만 멀쩡했다.

“안 속상하니?”

“물질에 너무 얽매이지 마세요.”

“마음에 와닿는 구절입니다. 앨런 형제님처럼 욕망을 멀리해야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땡중이 그런 말 할 자격이 돼? 그리고 의뢰보수가 높다고 받아온 사람이 누구였더라.”

앨런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테일러가 시바의 귓가에 말했다.

“앨런이 저런 모습 한두 번 봐?”

“형제님, 제가 뭘 놓쳤습니까?”

“배부른 맹수 같은 눈빛이잖아. 자기는 별문자를 머리에 집어넣었으니 만족했다 이거지.”

“지극히 옳은 결과입니다. 정신적 충만은 물질적 탐욕보다 훨씬 건전하고 상위의 개념입니다. 테일러 형제님도 본받아서···.”

“아! 그만! 노인네 그만 괴롭혀라.”

유적과 이어진 문을 찾을 수도 없는 마당에 전리품이 사라졌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산등성이에서 천천히 내려가던 앨런이 질문을 던졌다.

“왜 사라졌을까요?”

“시간 고정 및 반복 유적이 아니었을까?”

“일정한 시간대를 계속 되풀이···. 영구히 복원하는 미궁과 비슷하네요.”

“다르지 않겠니?”

“어떻게요?”

“그건 삼라만상에서 찾아보아라. 나도 몰라.”

“유적은 어떻게 되었···.”

앨런이 말을 함과 동시에 하쉬와 로이스의 대화가 들려왔다.

“방금 통화했는데 유적의 입구가 몽땅 사라졌다고 하더라.”

“네? 혈족의 무덤에 뿌릴 금가루도 못 얻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으니 잊자.”

앨런은 비실비실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황량한 느낌을 주는 절벽은 겹겹이 쌓인 지층으로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시간이 만든 그림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라 암벽 등반을 시도했던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볼트가 이곳저곳에 박혀있고, 로프도 있었다.

절벽을 관찰하던 앨런의 눈이 움직였다. 일부분이 크게 확대되었다.

지층 하나에 꼽사리 낀 불청객이 있었다. 풍화를 직격으로 얻어맞았지만, 앨런의 눈은 이렇게 정의했다.

<분석>

종류 : 콘크리트

자연이 만든 콘크리트 유사 구조일까, 아니면 등반가들의 소행일까.

앨런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하얀산맥(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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