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산맥(8) >
앨런은 절벽 지층 사이에 보이던 콘크리트와 유사하던 구조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퇴적암이 우연히 비슷한 형태로 쌓였을 수도 있지만, 유적의 시설 일부가 불안정한 공간문에 휩쓸려 통째로 사라진 부분을 목격한 직후여서 찜찜함이 남았다.
지식을 게걸스럽게 찾는 앨런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회복과 관광을 핑계로 하쉬가 제공한 숙소에 묵으면서 링스의 도서관에 방문했다.
“어서 오십시오. 링스 시민이시면 무료, 아니라면 이용료가 부과됩니다.”
갑자기 나타난 홀로그램 여성이 앨런을 맞이했다. 방문객과 반대인 성별의 안내 홀로그램이었다. 영혼석으로 구현한 약인공지능이자 대화형 서비스였다.
“시민이 아니시군요. 도서관 이용료와 안내요금을 동시에 내시면 할인받을 수 있습니다.”
앨런은 이용료만 지불하고 책의 숲을 거닐었다. 책꽂이마다 가득한 책표지는 빳빳하고 반짝였다. 관리를 잘했다기보다는 사람의 손때가 덜 묻은 모양새였다.
삼라만상과 기억수정의 보편화로 책은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나 옛 감상을 선호하는 사람도 존재해서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앨런은 어떤 방식을 특히 선호하진 않았다. 새로운 지식만 있다면, 그곳에서 재미를 찾을 수만 있으면 됐다.
이곳이 마치 대형할인점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필요한 물건은 하나였는데, 계산대 앞으로 가면 카트 하나에 물건이 가득해지는.
여기저기 관심을 끄는 책은 많지만, 함부로 손을 뻗으면 본래의 목적에 다가가지도 못한 채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갈 수도 있었다.
‘지리학 코너.’
목적을 상기하고, 정면을 보면서 원하는 책만 찾았다.
‘하얀산맥의 지형 및 자연환경 연구.’
테일러나 시바가 봤으면 기겁할 두께의 책이었다. 요즘 누가 책을 읽냐고 한마디를 남기기도 하리라.
정보나 지식이 필요하면 기억수정 혹은 정보전송만 하면 되는 시대였다. 뇌 확장 장치는 그걸 위한 기반이었다. 해킹의 위험이 있지만, 편이성은 단점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사용자 비율, 99%.’
앨런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테일러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력수련법은 뇌 기능을 점점 강화했으니까. 동방대륙의 상단전 수련처럼.
2가지 일을 동시에 시작했다. 왼쪽 눈으로는 삼라만상에 접속해서 정보를 살피고, 오른쪽 눈으로는 도서관의 책을 읽었다.
내용을 동시에 비교하고, 무엇이 틀렸는지, 무엇이 가설인지 찾아본다. 남들의 시선에는 멍하니 책장만 빠르게 넘기는 모습으로 보이리라.
앨런은 교차검증을 통해 핵심을 짚어냈다.
‘빙하기. 산맥 이전에는 평평한 지형.’
며칠 동안 얻은 지식은 하나로 수렴했다. 어쩌면 설원은 과거에 존재했던 시대일지도 모른다고.
“3줄 요약해주면 안 되겠니?”
숙소에서 앨런의 장황한 설명을 듣던 테일러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뱉은 말이었다.
“여기는 빙하기에 눈으로 덮인 설원이었어요. 그러다가 융기해서 산이 되었죠.”
“마력의 간섭은? 땅의 정령왕이나 대지계열 초월 마법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런 것까지 확인할 순 없었어요. 어쨌든, 제가 봤던 콘크리트 유사 구조는 융기 때문에 파묻혀있다가 솟아올랐을 확률이 높습니다.”
쉽게 말하면 위쪽 층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안쪽에 감추어둔 부분이 솟구쳤다는 뜻이다.
“오토마톤 외장갑이 부서지고 인공 근육이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생각하세요.”
“시설이 과거에 실존했다는 뜻인가?”
“아마도요?”
“빙하기가 언제였다고? 5천만 년 전? 이건 대발견이야! 고대문명의 존재를 최초로 찾았잖아.”
“아니죠.”
“왜?”
“증거가 없잖아요. 그리고 위험해요.”
게다가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하쉬가 추가 보수를 주며 유적탐사를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이건 유적보다 큰 사건이었다.
앨런의 말을 들은 테일러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맞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 역시 탐험가의 피를 지니고 있었다. 발견 자체가 너무 즐거운 나머지 잠시 사고가 멈춘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말로만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답답하다고 머리 뚜껑 열어보려는 미치광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 괜히 어그로 끌어서 신변에 위험이 생길 일은 만들지 말자.”
“브레이커나 다른 대기업들도 고대문명의 존재를 알고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나?”
테일러의 말대로 힘 좀 쓴다는 조직이나 단체는 자신들만의 탐험대를 조직해서 미궁을 내려갔다. 엄청 깊이 내려갔다가 복귀하면 반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기도 했다.
미궁은 탐험가를 쫓아내려고 적대적인 괴물을 계속 뱉어낸다. 반복적인 전투와 정체불명의 공간이 주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다.
“그걸 뛰어넘어서라도 얻고 싶은 게 있는 걸까요?”
“욕망, 희망. 사람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끝까지 나아가는 동물이지. 미궁은 두 요소를 끝없이 자극하고.”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앨런은 창문 앞에 서서 태양을 보다가 절벽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기도한다고 침대 위에 누웠던 시바가 눈을 살짝 떴다.
“형제님, 정 궁금하시면 등산 한번 하시죠.”
“괜찮습니다. 암벽등반가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장소니 밝혀질 건 다 밝혀졌겠죠.”
“그런데 콘크리트가 그리 오랫동안 버틸 수 있나요?”
“암석들로 둘러싸여 보호받다가 최근에 드러났을 수도 있습니다. 절벽 아래를 보니 깨진 바위가 꽤 많았습니다. 건물 자체에 마력이 흘렀으니 보호조치가 있었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퇴적암을 보고 오해했을 수도 있지만, 앨런은 착각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는 편이 훨씬 재밌으니까.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자, 앨런도 몸을 돌렸다. 테일러를 지긋이 바라보자, 뭔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왜? 오늘 머리 많이 썼잖아.”
“원시림 아래는 설원 지형이죠?”
“···.”
앨런의 질문과 동시에 테일러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는 유적 내부의 설원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미궁에서 ‘추위’를 겪어봤다고 했었다.
“지금 모습을 보니, 금제 발동 조건에는 인식 여부도 있나 보네요.”
“···.”
“최면을 통한 무의식적인 발설이면, 음···.”
앨런은 고개를 드는 호기심을 접었다. 금제는 뇌에 영향을 끼쳤다.
“아저씨가 여럿도 아니고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겠죠.”
“···!”
테일러는 입을 다물고 배신감 느껴지는 표정을 지었다.
*
메이즈시티로 돌아간 앨런은 매머드의 영혼석을 토대로 상자의 별문자를 추가했다.
매머드는 특이한 오토마톤이었다. 녀석이 품고 있던 자폭새는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매머드는 오토마톤을 만드는 오토마톤이었다. 육상항모이자, 걸어 다니는 제조공장이었다. 원래라면 부서진 오토마톤을 수거해서 고친 후, 재투입시켰을 것이다.
‘그 모습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전투가 몸 성히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매머드는 발전소의 과부하로 망가졌고, 폭발은 영혼석 일부도 오염시켰다.
별문자 배열이 삐뚤어지거나 없어진 부분은 앨런이 직접 찾아야 했다. 지금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약속한 대로 테일러를 업그레이드해 줄 시간이었다.
우선 상자의 영혼석을 거미에 넣어주니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행동방식은 여전한지, 표범의 외장갑을 툭툭 건드렸다. 표범은 묘하게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눈을 돌린 앨런은 견적 사이트를 테일러에게 보여줬다.
“시술소 찾아가기 전에 매직웨어를 먼저 구매해야 하니,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수정해주세요.”
“여기 제품은 진동이 너무 강해서 나사가 조금씩 풀리더라. 이건 가성비 끝판왕인데 누수 이슈가 있었어. 지금은 고쳤으려나?”
견적을 새로 짜던 테일러가 홀로그램 창에서 고개를 들었다.
“네가 직접 수술하면 돈이 남지? 그 돈으로 더 상위의 제품을 사자.”
“안됩니다. 매직웨어는 저의 영역이지만, 신체는 아닙니다. 의사가 필요해요.”
“울파도 야매는 야매잖아.”
“실력 없는 야매는 고객의 클레임에 죽었죠. 그리고 울파 씨 정도면 면허 있는 시술자와 똑같습니다. 오히려 경험은 훨씬 풍부하겠네요.”
흥미는 훌륭한 동기부여의 수단이고, 목숨의 위협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 언제나 손님의 총구가 머리로 향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시술을 할 테니, 울파의 집중력을 따라갈 수 있는 시술자가 몇이나 될까.
주문한 매직웨어가 배달 오려면 시간이 걸리니, 앨런은 다른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피살이꽃 씨앗을 담는 작은 목함을 챙겨서 일어나니, 어느새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테일러가 따라붙었다.
“어디 가세요?”
“메이즈시티는 너무 위험하단다. 그러니 내가 따라가마.”
“안 그러셔도 되니 쉬고 계세요.”
“어허! 어른이 그러자면 ‘네.’하고 수긍하면 돼.”
평소보다 빠르게 걸은 테일러는 모노레일에 냉큼 올라탔다.
롤러코스터처럼 빌딩 사이를 누비는 모노레일은 제약 공방이 가득한 구역에서 멈췄다. 웨스턴스카이의 문을 열자 녹음이 시야에 가득 찼다.
다시 미궁에 내려갈 시간이니, 몸을 점검하고, 필요한 약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한 달에 씨앗 2개가 필요하니, 할인이 없다면 600만 코인이 고정적으로 빠져나간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나, 무료 건강검진을 어디에서 이렇게 자주 받을 수 있겠는가.
테일러는 꽃잎 물총을 쏘는 페어리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리플렉스 액셀 특유의 잔상이 길게 이어졌다.
앨런은 느긋하게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뻔했다. 검진실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테일러가 있었다.
“누님, 저 왔습니다.”
“동생. 어서 와. 앨런이 오랜만에 와서 검사가 끝나려면 6시간 정도 걸릴 텐데, 지루하지 않을까?”
“페어리들을 도와주면 시간이 금방 지나서 괜찮습니다.”
테일러의 허리춤에는 못 보던 벨트가 있는데, 거기에는 호미와 정원 가위 등 식물을 가꾸기 위한 도구가 주렁주렁 꽂혀있었다.
“어머, 그냥 옆에서 자도 되는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팔을 걷은 테일러가 밖으로 나갔고, 요화는 웃으며 배웅했다.
뒤늦게 도착한 앨런이 그녀를 쳐다보자.
“자기가 하고 싶다는 데 말릴 필요가 있을까? 원예는 마음도 평화롭게 가꾸는 좋은 취미란다. 동생도 재밌다고 하니 잘된 일이지.”
정작 앨런이 집으로 쓰는 창고에는 식물 하나 없었다. 내면에서 싸우는 악마와 천사를 쫓아내고 밖을 쳐다보니, 테일러는 작업실 근처만 돌아다녔다. 꿍꿍이가 훤했다.
그러는 사이 넝쿨 의자가 몸을 부드럽게 받쳤다. 알맹이 빠진 파워슈트는 옆에 우뚝 서 있었다.
요화가 파워슈트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그렇게 작던 아이가 벌써 이런 장비도 다루네.”
“그때도 성인이었습니다.”
“나한테는 한참 아기지.”
민들레 홀씨가 몸 이곳저곳에 붙어서 나풀거렸다. 홀씨가 측정한 정보는 나무판의 이끼 그래프로 표현되었다.
고개를 까닥거리던 요화가 입을 열었다.
“원시림 23층까지 도달했지? 안정적인 탐험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뻔했다. 그 누군가는 쪼그려 앉아서 땅을 열심히 파고 있었다. 초능력 혹은 선천마법을 사용하는 페어리들은 수작업이 신기한지 옹기종기 모여서 구경했다.
“···네.”
“피살이꽃을 개량하고 싶은데, 미궁의 기운을 받은 씨앗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혹시 도와줄 수 있을까? 당연히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게.”
“23층이면 쉽죠.”
“거기는 기지들이 대지의 혈을 막고 있어서 형편없겠지. 내가 원하는 장소는 더 밑이야.”
“미궁도 풍수지리가 적용되나요? ···뭐, 층에 따라 마력 농도가 다르긴 하죠. 몇 층 정도를 원하세요?”
“25층 아래로 생명의 늪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앨런은 다시 테일러를 바라봤다. 가끔 안개와 함께 나타나는 늪에는 희귀한 생물이 산다며, 귀중한 정보이니 함부로 떠벌리지 말라고 했었다.
‘저래서 브레이커가 금제를 걸었을까?’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그 정도로 중요했으면 금제가 말을 못 하게 막았으리라.
잡념을 털어낸 앨런은 다시 요화를 마주 봤다.
“거기에 심어서 한 달 정도 관찰했다가 씨앗이 맺히면 다시 가지고 와주렴. 너무 길면 보름이나 일주일도 괜찮아.”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테일러가 평균적인 의뢰비용까지 말해주진 않았는지, 요화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 하얀산맥(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