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늪지대(1) >
미궁탐험가는 아무리 강하더라도 홀로 탐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동료와 함께 다니며 어둠 속을, 짙은 녹음을 돌파하며 목숨을 노리는 괴물들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얻는다.
고락을 함께 나누니 우정이 굉장히 두터워진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첫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정산 문제로 싸우다가 불화가 길어지는 등 문제가 있다면 파티 붕괴는 필연이다.
적대적인 사람에게 뒤를 맡기면 뒤통수가 근질거릴 테니까. 눈먼 총알이나 마법이 자신에게 날아올 걱정이 있으니, 목격자도 찾기 힘든 미궁에서 불안요소와 함께 다닐 필요가 없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오래 가는 파티의 동료들끼리는 좋은 관계 유지했다. 때로는 가족보다 긴밀할 수도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서로 목숨을 맡기기 때문이요, 두 번째는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전투나 절벽 같은 험지 이동을 제외하면, 지상과 비교해서 자극 자체가 극도로 낮았다.
현대 문물이 주는 극한의 자극에 길든 사람을 자연 속에 던져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무료함이 치솟고, 그걸 해결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대화였다. 동시에 사람의 내면을 알기도 쉬웠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속이는 예도 있겠지만, 사기꾼 잘못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어쨌든 탐험가들은 대화를 많이 나눴고, 길게 이어가려면 취미가 일치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그렇지 않다면 약간 지루할 수는 있었다.
“드디어 룬문자 4개를 연계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 난 차이를 모르겠는데.”
“3개와 4개의 차이는 큽니다. 의자 다리가 4개인데 하나가 잘리면 계속 흔들거리죠? 3개일 경우에는 하나가 뭉툭하게 변해도 균형을 유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3개가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4개라면 하나가 남으니 약간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음식으로 치면 조미료라고 할까요?”
“그냥 많이 다루면 좋다는 뜻이잖아···.”
“그런 관점도 있군요. 아니,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 너무 균형에만 매달리지 말고 때로는 파격도 필요···.”
테일러는 혼자만의 세상에 잠기는 앨런을 보고, 잘됐다 싶어서 얼른 멀어졌다.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시바가 채웠다.
시바는 앨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른쪽 눈은 멍하니 앞만 바라봤지만, 왼쪽 눈은 뚜렷한 초점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공 안구가 원래 남다르긴 하지만, 앨런의 것은 특히 유별났다. 가끔 보면 살아있다고 느껴졌으니까.
지금도 시바가 지긋이 쳐다보니, 잠깐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사방을 관찰했다.
‘자율성이라고 했었지.’
오토마톤은 사람을 도와야 한다,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된다, 자신을 발전시키면 안 된다 등의 원칙을 앨런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자신의 명령을 들을 것 외에는 모두 자유라고 했었지.’
시바가 물어본 건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저절로 습득한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눈 혼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표범은 얌전해서 일반적인 오토마톤과 똑같이 느껴지지만, 기웃거리길 좋아하는 상자는 좀 달랐다.
시바는 어느새 앨런의 오른쪽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리는 끝났습니까?”
“네. 금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바는 앞서가는 테일러의 등을 바라봤다. 관심 없는 모습으로 보여도, 귀 한쪽은 이쪽으로 향하리라.
“앨런 형제님이 미궁에 대해 많이 알아갈수록 테일러 형제님의 혓바닥도 자유를 얻는···.”
“혓바닥이라니!”
“원래 금제가 그런 식인가요?”
“당연히 아닙니다. 아예 말을 못 하게 막아버리지, 그런 식으로 조금씩 열어주는 금제는 처음 듣습니다.”
시바는 앨런의 눈동자 속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내뱉는 정보량이 적었다.
“수련법 개량에 도전했다가 걸린 일시적 치매가 1차 적으로 금제에 충격을 줬고, 2번째는···.”
“뇌 확장 장치 교체입니까?”
“아시네요?”
“장치 말고 뇌와 관련된 매직웨어도 없으니까요.”
“복합적인 이유로 금제가 변형 혹은 약화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야 좋지. 솔직히 말해서 머릿속에 폭탄 넣고 다니는 기분이었으니까.”
관심 없는 척하던 테일러도 마지막에 한마디를 보탰다.
20층에 도착한 일행은 궁전에 돌입하기 전에 심호흡했다. 심장 고동을 적당히 조절한 테일러가 안으로 진입했다.
“가자!”
호기롭게 외친 칼로리가 아까울 정도로 내부는 텅 비어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찌그러지거나 불탄 오토마톤 잔해가 여기저기에 널려있었다.
최근, 어쩌면 한 시간 전에 누군가가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걸 보니 1시간 안쪽으로 지나갔구나. 꼭 미사일이라도 맞은 듯한 모양새 같은데.”
사람의 뼈나 겨우 부러트리는 무속성 마법, 매직미사일 같은 말랑한 공격이 아니라, 작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지워버리는 미사일을 뜻했다.
앨런 일행은 궁전 내부의 화려한 복도를 걸었다. 먼저 진입한 탐험가의 흔적이 가득했다.
오토마톤을 이루는 금속이 잘게 찢어진 모습을 보니, 이곳이 미궁이 아니었다면 궁전은 벌써 무너지고도 남았을 정도였다.
“에비로 사용한 마법일까요?”
“지나치게 위력적이야. 에비라면 굉장히 비싼 녀석을 썼겠지. 그만한 재력이 있다면 강력한 탐험가라는 뜻일 테고.”
삐―!
새롭게 태어난 상자는 묘하게 신난 기계음을 내며 뒤를 따라왔다.
6개의 다리, 뚱뚱한 몸통, 집게발, 게눈을 닮은 카메라는 예전과 똑같았다. 원시림을 주파하기 위해 다리를 달아서 그런지, 몸을 바짝 세운 게 혹은 거미를 연상케 했다.
예전에는 드럼통 하나 크기였는데, 지금은 3개를 합친 덩치였고,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얕보면 안 된다. 체급 자체가 지닌 운동량이 상당했고, 몸체가 커지며 자연스럽게 추가적인 기능이 달렸으니까.
집게발은 오토마톤의 부품도 간단히 뜯어내는 위력을 지녔고, 마력로가 커진 만큼 방어능력도 튼튼해졌다.
눈에 띄진 않지만 가장 큰 변화는.
“상자 옆은 따뜻하군요.”
시바는 선천적으로 열기를 좋아하는 드워프라 그런지 상자 옆에 붙어있었다.
원인은 상자 내부에 설치한 소형 마력 용광로였다.
설원에서 상대했던 매머드는 오토마톤을 만드는 오토마톤이었고, 그러려면 금속을 가공하는 능력 혹은 설비가 내부에 존재해야 했다.
용광로는 그중 하나였다. 합금을 분리해서 더 귀한 금속만 남기고 나머지는 처분했다.
삐―!
상자는 개펄의 게처럼 집게발로 자꾸 무언가를 주워서 몸속에 집어넣었다. 상자가 걸어오는 길 뒤로는 필요 없는 금속 조각이 떨어졌다.
‘저건 고칠 필요가 있겠어.’
앨런은 복도에 떨어지는 금속을 살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추적의 빌미를 줄 수 있으니까.
누군지 모르는 선객 덕분에 편하게 이동했다. 덕분에 궁전의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호수는 새까만 물과 암석으로 막힌 천장만 아니면 전체적인 풍경은 뛰어났다. 회랑에 둘러싸인 정원도 조경 솜씨가 우수했다.
그런 분위기는 대전까지 이어졌다. 근위병도 온데간데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선객이 전리품을 모두 챙겨갔다.
아쉽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근위병의 파워슈트는 강화복으로 개량할 수 있는 시작점 혹은 기초였으니까.
“형제님, 쉬다 갈 겁니까?”
“걷기만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지. 가자.”
앨런은 대전을 홀로 지키는 쓸쓸한 옥좌를 지나쳤다.
그러고 보니 하얀산맥에서 봤던, 불타다 만 해골은 인간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런데 동면장치는 굉장히 컸지. 지하인이 들어가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앨런은 지하인의 평균 신장을 떠올렸다. 2.2m인 남성 오크와 비슷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마도구나 장비는 모두 큼직큼직했다.
‘셸터를 지하인이 만들었으면, 그 해골 뭐지? 어린 지하인? 아니면 공격자?’
아직은 속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원시림을 보면 옛날 생물은 모두 커다랬으니까. 그냥 지하인과 키가 비슷한 다른 종족일 수도 있었다.
옥좌 옆에 생겨난 검은 문을 통과하자 태양 빛이 머리를 두드렸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니, 어둠과 헤드 랜턴에 적응한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인공 안구가 아닌 앨런의 오른쪽 눈만.
왼쪽 눈은 옆으로 움직였다. 근처에서 일단의 무리가 휴식 중이었다. 문의 이동 방향을 볼 때, 그들이 궁전을 청소한 파티가 분명했다.
테일러가 작게 읊조렸다.
“에셀 마탑의 탐험대다.”
에비로 마법을 사용하려면 주문이 각인된 기억수정이 필요하고, 에셀 마탑은 그 분야에서 큰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다국적 대기업이며, 기억수정 자동 삭제 주문을 개발해서 계속 돈을 소모하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했다. 덕분에 에비 사용자들은 기억수정이 먹통이 될 때마다 신품을 구해야 했다.
누군가를 바라보면 그쪽도 이곳을 들여다보기 마련. 에셀 마탑의 인원들도 이쪽을 발견했다.
테일러가 양 손바닥을 보이며 천천히 멀어졌다. 각자 갈 길 가자는 신호였다. 그들의 모습이 식생에 완전히 가려질 즈음에 테일러가 말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푸른 머리 남자 봤니?”
“네.”
“에셀 마탑주의 제자 중 하나인 로렌조다. 머리 색깔처럼 청염을 다루는 마법사지.”
“궁전을 깨끗이 청소한 사람이군요.”
“내가 은퇴하기 전에 심도 5였는데 몇 년 사이에 더 강해진 것 같네.”
“그럴 수도 있죠.”
앨런의 시큰둥한 태도에 테일러가 열을 냈다.
“탐험가면 관심 좀 가져라. 로렌조가 얼마나 강력한 마법사인지 알아? 그가 다루는 청염은 뼈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지상 가면 유명 탐험가에 대해 다루는 소식지라도 가져다줄까?”
“아뇨. 시간 아까워요.”
“그럴 줄 알았다.”
앨런은 좋게 말하면 자신의 일에 대한 집중력이 높았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사에 관심이 적었다.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떤 분야든 잘하는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살고도 남는 세상이니까.
“탐험이라기엔 분위기가 흉흉하던데, 무슨 일로 내려왔을까요?”
“글쎄다···.”
테일러 역시 살벌한 기색을 느꼈지만, 대답해줄 어떤 단서도 없었다.
“평범한 탐험인데 기분이 잠깐 나빴거나, 로렌조가 직접 참가할 정도의 일이 생겼거나?”
수련 없이도 마법을 펼치게 해주는 에비의 보급으로 마법사의 수는 크게 줄었다. 유입이 줄어들면 인재도 적어지기 마련이나, 이상하게도 마법사의 경우에는 ‘진짜’들의 비율이 높아졌다.
애초에 마법은 재능의 영역이고, 마법사가 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법에 이끌리니,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탐험이라면 괜찮겠지만, 문제가 생겼으면 보통 일은 아니겠죠.”
“우리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네.”
앨런은 걸음을 옮기며 마나하트를 다친 리자드맨 카크다를 떠올렸다. 에셀 마탑의 탐험대를 만나자, 그곳에 취업하기 위해 탐험 경력을 쌓던 카크다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몸조리 잘하라고 보수도 양보해줬으니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데니스의 연락처를 알고 있으니 지상에 올라가면 통화할 생각이었다.
“앨런···.”
“네.”
“들었지? 몇 시간이 걸리든 빡세게 사냥하고 23층까지 내려가서 쉬자.”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앨런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테일러와 시바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마력 파장 탐지기 가동은 덤이었다. 앨런의 어깨 위로 솟은 작은 안테나가 천천히 회전했다.
다행히 마석을 금방 모으고, 문끼리의 거리도 가까워서 20시간 만에 브레이커의 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휴식 없는 강행군을 할 가치는 있었다. 노숙의 불편함과 터가 다져진 장소에서의 편한 수면은 큰 차이가 존재했다. 불침번 세울 필요도 없고, 일단 마음부터 편했다.
벽이 주는 안정감은 의식주라는 단어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인간 생활에 필요한 3가지 요소 중 하나로 예전부터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니까.
괜히 선조들이 동굴, 하물며 식물 줄기만 대충 엮은 움막집에서 거주했겠는가.
충분히 잔 앨런은 보통 때와 약간 다른 소란스러움을 들으며 일어났다. 원시림은 언제나 태양이 떠 있어서 밤낮의 구분이 없지만, 오늘은 유독 시끄러웠다.
마침 테일러가 천막을 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났구나.”
“무슨 일이에요?”
“탐험가들이 구더기를 잡아왔거든. 정보 좀 빼내고 처형할걸.”
구더기는 시체에 꼬인다는 이미지가 유독 강했다. 그런 이유로 탐험가를 죽여서 무언가를 빼앗는 범죄자를 구더기라고 불렀다.
놈들은 나무가 많아서 숨기 좋고, 식량도 구하기 쉬운 원시림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매년 방역 조치를 하는데도 항상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 사람의 어두운 욕망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테일러 형제님, 구더기를 만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당연히 없애야지.”
“지상이었으면 정화봉사단의 일꾼을 늘릴 좋은 기회인데 아쉽군요.”
“그거 무기징역이잖아. 차라리 사형이 낫지 않을까?”
“나쁜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어머님을 뵈러 가게 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살계를 어깁니다.”
시바가 텐트를 나가고, 테일러가 앨런을 보며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 늪지대(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