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02화 (102/193)

< 늪지대(2) >

테라굴라.

원시림 24층부터 등장하는 거대한 두더지의 이름이다. 녀석의 존재 때문에 기지들은 모두 23층에 몰려있다.

테라굴라는 미친 듯이 땅을 파고 다니며, 탐험가들이 원시림의 땅을 겨우 1m 파는 것과 달리 지하 몇 미터든지 자유롭게 움직였다.

탐험가들에게만 적용되는 지형 변화 제한 때문에 녀석을 못 잡을 수도 있겠다고 걱정하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미궁에 등장하는 생물과 괴물은 모두 탐험가를 죽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탐험가가 달아나도 인식 범위 내에 있다면 끝까지 쫓았다.

앨런, 정확히 말하면 파워슈트에 내장된 센서는 미약한 진동을 감지했다. 곡괭이로 돌을 내리찍는 듯한 소리도 희미하게나마 들렸다.

“땅속에 무언가 있습니다. 예상 조우 시간 10초.”

“테라굴라다. 바위나 나무 같은 지형지물을 활용해.”

10초는 아주 짧은 시간이고, 갑작스러운 등장은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테일러는 평생 겪은 일이라 그러려니 했고, 시바는 수도승 특유의 정신수련 덕분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겨우 호흡 몇 번, 눈 깜빡임 몇 번 하고 나자 10초가 지나버렸다. 예상과 달리 테라굴라는 지하에서만 빙글빙글 돌며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침식 공격이다. 빠르게 벗어나!”

테일러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앨런과 시바 그리고 표범은 본래 위치에서 이탈했다.

상자는 전투보다는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만든 오토마톤이라 기동성이 안 좋았고, 느린 다리 때문에 원형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머지는 빠져나가고 상자 홀로 남았는데도 테라굴라는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았다. 진동으로 적을 감지하기에 여전히 사람이 위에 있는 줄 아는 것이다.

상자가 몇 걸음만 내디디면 되는 순간.

쿠웅!

지반이 동그랗게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불쑥 솟아오르며 주변의 시야를 제한했다.

앨런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설원에서는 화염을 뿜어내서 얼어붙은 문을 녹였지만, 이번에는 바람으로 먼지를 날려버렸다.

그제야 테라굴라가 만들어놓은 난장판이 제대로 보였다. 움푹 꺼진 땅은 개미지옥처럼 변해서 발을 내디딘 자들을 계속 빨아들였다.

함정의 중앙, 가장 아래에서 대기하는 테라굴라의 발톱은 굉장히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땅을 그렇게 파고 다녔는데도 무뎌진 기색 하나 없었다.

심한 경사와 계속 흘러내리는 흙 때문에 바닥까지 도달한 사람은 창 같은 손톱에 꿰뚫리게 되리라.

시바가 가방에서 로프를 꺼냈다.

“앨런 형제님, 함께 끌어올립시다. 가만히 놔두면 설원과 똑같은 불상사가 벌어질 것 같습니다.”

“저 정도는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켜보죠.”

앨런의 말투는 결과를 기대하는 연구자와 흡사했다. 시바는 설득을 포기하고, 그냥 안으로 뛰어들어서 테라굴라를 처치할까 고민했다.

고민을 진행 중인 짧은 시간, 상자가 서랍을 열었다. 게로 비유하면 배딱지가 열린 모양새였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동그란 구체가 개미지옥의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갔다.

테라굴라는 코앞까지 당도한 쇳덩어리를 무심히 갈랐다.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깨달을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장면에 묻혀버렸다.

콰앙!

흙과 모래가 높게 솟구쳤다. 유난히 붉은색이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러면 남는 부위가 없겠는데. 마석은 무사할지 모르겠다.”

천생 탐험가라 그런지 끔찍한 장면보다는 전리품 걱정을 먼저 했다.

“자기방어 강도를 올려서 그래요. 이 경우에는 알고리즘이 버티기보다는 적극적인 공격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상자는 어느새 개미지옥 아래까지 내려가서 고기 조각을 뒤지고 있었다. 곧 녀석이 집게발을 번쩍 들었는데, 붙잡힌 돌이 번쩍였다.

마석을 받은 앨런은 바로 나침반에 흡수시켰다. 수정 안의 바늘이 핑그르르 돌더니 한 방향을 계속 가리켰다.

“가동했습니다. 드디어 25층으로 갈 수 있겠군요.”

테라굴라를 사냥한 장소에서 3시간쯤 걸어가자 문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시커먼 공간을 통과하고 나니, 시야가 뿌옜다.

25층 들어가자마자 안개가 일행을 반겼다. 습도도 굉장히 높아서 마치 물이 뺨을 그대로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흙이 섞인 물 냄새도 강하게 났다.

앨런은 다시 바이저를 닫고 테일러를 쳐다봤다.

“늪의 존재는 귀중한 정보라면서요?”

“훌륭한 이야기꾼은 청중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는 법이지.”

“···.”

“100% 거짓말은 아니니 싸늘한 시선은 좀 치워주지 않겠니?”

앨런이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림짐작해도 늪의 규모는 굉장히 거대했다. 25층까지 도달한 탐험가라면 못 찾을 수가 없는 덩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따 알려줄 테니 기대해라. 일단 환경에 적응부터 해야지.”

테일러가 아래를 가리켰다. 물이 워낙 많아서 지면이 부드럽다기보다 질척했다. 탐험화 밑창이 아래로 서서히 파고드는 중이었다.

식물이 있는 장소는 그나마 나았다. 그러나 빠지는 속도를 늦춰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앨런 일행은 미리 챙겨온 밑창을 신발에 붙였다. 밑창에 달린 끈을 강하게 묶어서 탐험화와 단단히 연결했다. 밑창은 평범해 보여도 [부유], [부력]이 적용된 마도구였다.

운신이 자유로워진 일행은 계획대로 나무를 자르고 뗏목을 만들었다.

“뭔가를 제대로 하려면, 저 앞에 보이는 물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뗏목이 있어야 해.”

“형제님, 상자와 표범을 태우시게요?”

“우리도 타야지. 밑창도 마도구라 계속 사용하면 마력 소모가 커.”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 헬기 로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피를 빨아먹고 사는 악독한 모기의 등장이었다.

늪지대는 물이 정체된 장소라 모기가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수도 많고, 원시림이라 크기도 컸다.

손바닥 크기의 혐오생물이 웽웽거리며 날아다니니, 매사에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던 시바도 학을 뗐다.

“혐오스러운 생물들···.”

“언제는 만물을 사랑하자며.”

“모기는 예외입니다. 어머님도 졸면서 그들을 만들었을 겁니다.”

“신성모독이다!”

“형제님이 그러시면 안 되죠.”

뗏목을 만들면서 모기까지 쫓아내니, 분위기가 매우 어수선했다.

그래도 결과물은 꽤 훌륭했다. 앨런이 용의 눈을 그리듯이 룬문자까지 새기자, 표범이나 상자가 올라타도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였다.

“마법공학은 언제 봐도 신기하군요.”

“신비와 연료인 마력은 어떤 현상에 작용하는 물리법칙을 쉽게 뒤틀 수 있으니까요. 배워보실래요?”

“저는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길도 힘겨워서 사양하겠습니다.”

“숙취 때문에 힘들겠지.”

어딘가에서 넓적한 나무를 구해온 테일러가 뗏목 위로 뛰어올랐다. 나머지도 탑승하자 어설프게 생긴 노를 저었는데, 생김새와 달리 뗏목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시바가 능숙함을 보이는 테일러를 구경했다.

“형제님.”

“왜?”

“오늘 보니, 탐험가가 아니라 만능일꾼 같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야영, 사냥, 등반, 채집 등 모든 일의 기본은 할 줄 알아야 탐험하기 편하니까.”

늪에는 명칭을 알 수 없는 나무가 가득했다. 빽빽한 나뭇잎 때문에 시야가 멀리 뻗어 나가지 못했다. 음산한 안개도 한 몫 보탰다.

앨런은 빌딩을 연상케 할 정도로 굵고 높은 나무를 올려다봤다.

“생명의 늪이라고 하셨는데, 이름과 달리 유령 나오게 생겼네요.”

“수도승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성직자는 예로부터 악령의 하드카운터다.”

물론 원시림에서 유령이 나올 일은 없으니 그냥 농담이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는 점점 거대해졌다. 과장 좀 보태서 개인 주택 하나를 위에 설치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테일러가 뗏목을 멈췄다.

“운이 좋게 몸에 물 묻힐 일은 없었구나. 그럼 올라가자.”

말을 마친 테일러는 줄기와 덩굴 등을 잡으며 나무를 탔다. 앨런은 움직임을 그대로 기억했다가 파워슈트의 근력을 이용해서 올라갔다.

표범은 발톱을 이용해서 혼자서도 잘 따라왔고, 상자는 로프를 이용해서 끌어 올려줘야 했다.

3명과 2대가 올라가자 나무의 윗부분이 꽉 찼다. 가지끼리 얽혀있는 옆의 나무도 이용하면 공간은 훨씬 넉넉하리라.

상자는 이동하기 어려우니 앨런과 테일러 그리고 표범이 넘어갔다.

“꼭 새들의 둥지와 비슷하게 생겼네요.”

“그래서 여기 오는 탐험가들은 나무 위에서 생활해. 안쪽은 나무도 빽빽하고, 가지도 많은 편이라 이동하기도 편하고.”

끝부분에 걸터앉은 앨런은 늪을 관찰했다. 여전히 장애물이 많았지만 높은 장소로 올라와서 아래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잘 보였다.

이쪽을 인식하지 못한 생물들이 활발히 돌아다녔다.

카르보네미스.

육식성 거북으로 등껍질 길이가 성인 남성의 키와 비슷했다. 녀석의 입은 절단기와 비슷했다.

푸루스사우르스.

거대 악어로 다 크면 10m가 넘었다. 작은 개체들이 눈만 빼꼼 내민 채 아래를 돌아다녔다.

티타노보아.

아나콘다를 아기로 만드는, 10m가 넘는 녀석은 나무를 이용해서 움직였다. 나무가 워낙 크다 보니 묵직한 뱀이 매달려도 미동조차 없었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거대하네요.”

10m짜리 생물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그 시절의 생존경쟁은 도대체 얼마나 치열했을까.

“그래서 지식이 중요합니다.”

“?”

뜬금없는 발언에 테일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체급이 좋고 힘이 강한 오크도 동물과 비교하면 약하지···는 않겠군요.”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약한 사람이 문명을 이루고, 행성의 지배자가 된 이유는 지식 때문입니다. 전수, 개량, 학습 등 여러 부수적인 요인이 있지만, 핵심은 지식이죠.”

앨런은 눈 초점이 흐려진 테일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요화의 요청대로 피살이꽃을 키우려면 흙이 필요했다.

“아까 올라오기 전에 챙길 걸 그랬습니다. 늪지의 흙이니 영양이 풍부하겠군요.”

“잠깐 기다려봐. 내가 해준 이야기 기억하지?”

“황제도롱뇽이요?”

황제도롱뇽은 등에 수생식물을 키우는 최대 2m의 생물이었다. 원시림의 다른 생물과 달리 도망치기도 했다.

300년도 쉽게 견뎌내는 생명력의 비밀을 푼다고 제약회사나 생명연구소에서 시체를 비싸게 사기에 포획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다.

현실의 황제도룡뇽은 멸종 직전이라 손대면 큰일 나니, 주로 미궁에서 잡아야 했다. 물론 발견할 수 있다면.

“찾기 힘들어도 기왕 실험할 거면 그 녀석이 좋겠지. 내가 잡아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봐.”

“네.”

앨런은 일단 대답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공기 좋은 곳으로 요양 왔다고 생각하며, 안 되면 그냥 흙으로 실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테일러는 어떻게 챙겨왔는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피라냐를 닮은 작은 물고기가 펄떡거렸다.

“그냥 실험할까요?”

“이 생선은 구워 먹어도 되고, 날로 먹어도 돼. 기생충 걱정은 없다.”

테일러는 엉뚱한 대답을 돌려줬다. 아직은 기회를 달라는 소리였다. 아니면 낚시가 재밌어서 그럴 수도 있고.

“미궁 창조자도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군요.”

“왜?”

“저였으면 같은 종의 반절만 독을 집어넣고, 독이 없는 생물의 반절에는 치명적인 기생충을 가득 집어넣었을 겁니다.”

“너 자꾸 끔찍한 소리 하면 생선 없다.”

“안 먹어도 괜찮습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요.”

앨런은 아로마아의 생선들을 떠올렸다. 카르텔이 지배하는 도시 앞바다의 생선들은 유달리 통통했었다.

“오, 강하게 나오는구나. 굽는 냄새 맡고도 참을 수 있나 보자.”

그때 앨런이 무언가를 포착했다. 이곳으로 헤엄쳐 오는, 작은 악어 크기의 생명체가 있었다.

“왔다. 왔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비밀의 미끼를 준비했지.”

테일러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1m 크기의 황제도롱뇽은 낚싯바늘을 덥석 물었다.

끌려 올라온 녀석은 입으로 꾸루루 소리를 내더니 무언가를 뱉었다. 사람 손가락이었다.

테일러의 얼굴이 하얘지고, 앨런이 그를 책망하듯이 쳐다봤다.

“특제 미끼가 손가락이었어요?”

“잠깐! 아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까 말한 대로 생선은 안 먹겠습니다.”

테일러도 한숨을 쉬며 지금껏 잡은 물고기를 모두 나무 아래로 던졌다.

앨런은 도롱뇽이 헤엄쳐 온 방향을 주시했다. 손가락이 나왔다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이 실패로 끝났거나, 사나운 무리가 탐험가를 고의로 공격했거나.

후자는 여러모로 골치 아파서 차라리 전자가 나았다. 그러나 미궁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면 배신당하기 쉬웠다.

나무를 타고 접근하는 그림자가 여럿 보였다. 차라리 원숭이였으면 좋았겠지만, 자세히 보면 두 발만 사용해서 나뭇가지를 밟고 다녔다.

< 늪지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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