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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03화 (103/193)

< 늪지대(3) >

늪지대의 수면 위로 솟은 나무는 거대하고 길쭉길쭉했다. 굵은 가지도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나무를 건물에 비유하면, 줄기는 기둥이고, 가지는 천장이었다. 테일러의 말대로 몸이 날래다면 뛰어다닐 수 있었다.

마력사용자, 그중에서도 육체를 단련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당연히 날랬고, 몸 쓰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매직웨어를 사용해서 수준을 높이 끌어올릴 수 있었다.

접근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는 모르겠으나, 날다람쥐처럼 가지 위를 가볍게 뛰어다녔다.

앨런이 손을 내밀자, 팔뚝 장갑이 열리며 마탄발사기가 삐죽 튀어나왔다. 장전한 마탄은 확산탄. [분리], [추적], [폭발], [발화]를 새겨서 대충 방향만 맞게 쏘면 높은 명중률을 자랑했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공격을 준비했다. 손아귀에 타오르는 화염, 휘도는 바람, 결집하는 암석 등이 보였다.

에비를 사용하면 고성능일 테고, 마법사라면 숙련된 전투원이었다. 특히 선두에서 달리는 사람이 뿜어내는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주변의 마력이 그의 손아귀에 머무는 불꽃을 두려워했다. 어떻게든 달아나려 하지만, 남자의 마력통제력은 도망치는 녀석들을 잡아 와서 자신의 불꽃을 키웠다.

겨우 손바닥에서만 놀던 화염은 손등을 지나 팔꿈치까지 옮겨붙었다. 처음에는 빨간 불티만 휘날렸는데, 그것도 점점 하얗게 물들었다.

“화염의 성질을 변화하는 마법사다. 어려운 상대니 긴장해라.”

테일러가 앞으로 나섰다. 앨런의 앞을 언제든 가릴 수 있으면서도 시야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위치선정이었다.

앨런은 마탄을 언제 발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저쪽도 마법이라는 원거리 공격 수단을 사용하는데, 아직 하나도 발사하지 않았다.

불청객들은 부채꼴로 자리를 잡고 앨런 일행을 쳐다봤다. 두 무리는 겨우 3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마력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초근거리나 마찬가지였다.

공격의 기미가 없어서 서로 겨누기만 했다. 잠깐 대치를 이어가니, 저들의 눈이 파랗게 빛나며, 서로 의견을 나눴다. 미궁에서도 단거리 통신은 가능했다.

자세히 보니 옷도 말끔했다. 말끔하다는 뜻은 옷이 체형에 맞고 지상에서 내려온 티가 난다는 의미였다. 앨런 일행도 마찬가지였고.

범죄자일 확률은 낮아졌다. 원시림에 숨어 사는 구더기들의 옷은 많이 해지거나 누덕누덕 기웠을 테니까. 아니면 시체에서 뺏었거나.

이제는 어깨까지 번진 백염(白炎)을 지닌, 흐릿한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얼굴이고, 너무 평범해서 특징을 말하기도 곤란했다.

“서로 오해가 있었군.”

“그럼 왜 접근했지? 미궁의 불문율 중 하나는 ‘다른 탐험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인데.”

“우리가 쫓던 마력이 이 근처로 흘러왔다.”

남자는 테일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무언가를 쫓아왔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앨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꽁꽁 묶여서 저항 의지도 상실한 황제도롱뇽을 쳐다봤다. 녀석의 근처에는 뱉어낸 새끼손가락이 있었다.

갑자기 저들이 들이닥쳐서 신경을 안 썼는데, 다시 보니 마력을 품고 있었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마력이었다. 마력감지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눈치챌 수 있는.

앨런의 등에 달린 기계 팔이 손가락을 보기 좋게 집어 들었다.

“혹시 이겁니까?”

남자는 도롱뇽의 체액과 피가 묻어있는 손가락을 목격하자 눈매가 사나워졌다.

“당했군. 도마뱀처럼 손가락을 미끼로 삼을 줄이야.”

“쫓을 생각이십니까?”

“이미 늦었다. 미끼를 던지고 멀리 달아났겠지. 이대로 철수한다.”

부하와 대화를 나눈 남자는 함께 온 무리에게 거침없이 명령했다. 지시대로 따르는 모습에는 군기가 가득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키워진 전투집단일 가능성이 컸다.

“우리는 이대로 물러나겠다. 이 근처는 위험하니 그쪽도 복귀하길 추천하지. 손가락은 우리가 가져가겠다. 혹시 쓸 일 있나?”

“그럴 리가.”

불청객들은 왔던 걸음처럼 뛰어서 사라졌다. 산에 구름이 걸려있듯이, 나뭇가지에 머무는 안개가 그들의 모습을 집어삼켰다.

테일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큰일 날뻔했다. 누군지 알겠니?”

“에셀 마탑의 로렌조 씨죠?”

“어떻게 알았지?”

“21층에서 봤을 때, 그가 풍기는 마력의 기운을 기억해뒀습니다. 뜨겁고 강렬하고 사나워서 쉽게 떠올렸습니다. 환상 마법으로 얼굴을 가렸군요.”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에 몸을 숨겼던 표범이 슬그머니 내려와서 엎드렸고, 시바는 이쪽 나무로 넘어왔다.

“확실히 요즘 마법사들은 무섭군요. 전사처럼 움직이니 단점이 아예 사라졌습니다.”

“마법사들이 맨날 연구만 해서 그렇지, 그들도 건장해질 수 있다. 요즘은 다른 수단이 워낙 많아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지.”

육체를 단련할 시간이 아깝다? 그러면 신체를 매직웨어로 대체하면 됐다.

생물합성학과 소재공학으로 만들어진 인공 폐는 육체에 활력을, 고강도 및 고탄력 소재와 정밀마력공학이 어우러진 인공 근육은 힘을 더해줬다.

수면 마취로 잠깐 잤다가 일어나면 뛰어난 육체가 주인을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육체를 강화할 수 있으니, 우직하게 단련하는 사람을 은근히 깔보는 일부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오로스 교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극한까지 강화된 근육은 마법과 똑같았다.

앨런은 로렌조와 부하들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무슨 일일까요?”

“21층에 막 도착했을 때, 녀석의 살벌한 기색을 느꼈잖아. 지금 등장도 그와 연관된 일이겠지. 구더기가 에셀 마탑의 탐험대나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탐험가를 공격했으려나.”

“인간 이하의 형제님들은 간이 참 크군요.”

“미쳤으니 미궁에서 시체 파먹으며 연명하겠지. 계속 없애도 또 나타나는 걸 보면 참 질긴 놈들이야. 구더기 공급망을 따로 준비해놨나···.”

“그럼 우리는 할 일 하죠.”

앨런은 로렌조가 돌아가라고 했다고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목적을 지니고 왔으니, 해결해야 속이 시원했다.

불안하다고 지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아무리 빨라도 이동에만 2주가 넘게 소요되었다.

앨런은 죽음을 수용한 황제도롱뇽에게 시선을 주었다. 탐험가가 있어도 얌전했고, 그건 미궁의 생물답지 않은 태도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던가. 오늘의 가설이 내일의 정론이 되고, 과거의 진실은 희대의 거짓말이 되는 장소가 미궁이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짜릿함이 탐험가들을 유혹하는 미끼이자, 계속 내려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앨런은 기계 팔로 도롱뇽의 목과 꼬리 부분을 붙잡고, 자유로운 손으로는 등에 있는 식물을 채취했다. 그럴 때마다 테일러가 설명을 보탰다.

“그건 마비이끼. 이건 혼몽수초. 보라색 꽃은 독부레옥잠.”

“이름이 죄다 살벌하네요.”

“그래도 미궁 요리할 때 조금씩 넣으면 짜릿한 감칠맛을 더해줘.”

“독극물이잖아요. 이거 먹으면 혀가 파랗게 물든다거나, 근육이 경직될 텐데요.”

“그럴 때는 이게 있지.”

테일러가 하얀 수염처럼 보이는 식물을 가리켰다. 작은 바람에도 하늘하늘 움직이고, 뒤가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식물은 아니고 버섯이다. 명칭은 하얀털동충하초. 부정적인 효과를 제거하고, 나머지는 체외로 배출하게 도와주지.”

“도롱뇽은 벌레가 아닌데 등에 동충하초가 자라네요.”

“너도 보다시피 녀석의 등은 무언가 자라기 좋은 텃밭이잖아. 정 궁금하면 요화 누님에게 물어보러 같이 가자. 어때?”

혼자 가기 어려우니 동행하자는 수가 빤히 보였다. 앨런은 애를 태울까 고민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심어보자. 황제도롱뇽이 지닌 생명의 비밀이 치료의 열쇠가 되면 좋겠구나.”

앨런은 깨끗해진 황제도롱뇽의 등에 피살이꽃 씨앗을 심었다. 점액질 가득하고 말랑말랑한 피부는 씨앗이 닿자마자 집어삼켰다.

평소에는 피부에 접촉하면 마력을 양분 삼아 꽃을 피우는데, 지금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앨런은 페어리들이 신나서 떠들던 대화를 떠올렸다.

“요화 사장님이 판매용이 아니라 재배용 씨앗을 줬네요. 판매용과 달리 느긋하게 자라고, 혼자서도 씨앗을 맺는다고 하더라고요.”

씨앗을 심은 등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니, 테일러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설마···.”

“···?”

“씨앗을 빼돌리려는 음흉한 생각을 했니? 누님이 너를 믿고 씨앗을 맡겼는데 그러면 되겠어? 내가 평소에는 아무 말 안 하는데 이번에는 어른으로서 따끔하게 충고해야겠다.”

“그런 상상을 하는 형제님의 머릿속이 더 음흉합니다만.”

“사람의 말을 그렇게 곡해하면 쓰나.”

“형제님, 명백과 곡해는 같은 뜻이 아닙니다.”

나이든 탐험가와 나사 빠진 성직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앨런은 계속 도롱뇽을 관찰했다.

씨앗을 심은 자리에 작은 새싹이 자라났는데, 이름처럼 붉은색이었다.

황제도롱뇽은 등에서 식물이 자라는데도 괜찮아 보였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모양새에서 도망치려는 속셈이 느껴졌다.

시바를 다른 나무로 쫓아낸 테일러가 말을 걸었다.

“동글동글하게 생겨서 귀엽지? 흉악한 놈들만 봤더니 더 귀엽구나.”

“그렇다고 풀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피살이꽃이 다 자라면 도롱뇽도 함께 챙겨가야죠. 문을 넘는 과정에서 죽겠지만요.”

“냉혹한 녀석.”

테일러의 장난 섞인 말처럼 앨런은 근거 없는 비방에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수상(樹上)생활 일주일 째.

화려한 붉은 꽃봉오리가 생겼다.

새끼손가락 때문에 낚시를 관뒀던 테일러는 다시 찌를 아래로 드리웠다.

“지금쯤이면 소화 끝났겠지.”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

황제도롱뇽은 미궁 생물이라 그런지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피부가 마르려고 할 때 물만 부어주면 충분했다.

보습을 도와주던 중, 낚싯대를 빌려서 심심함을 달래던 시바가 큰소리를 냈다.

“월척입니다! 어머님이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셨군요.”

“큰놈인가 보다.”

어느새 나무를 건너간 테일러가 엎드려서 밑을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떨떠름한 얼굴로 시바를 쳐다봤다.

“일용할 양식? 위험한 드워프였네.”

낚싯바늘에는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 걸려있었다.

“형제님, 농담은 나중에 하고 일단 건져냅시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지? 분명 안 보였는데···.”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떴다. 초점이 뚜렷한 눈으로 옷에 걸린 바늘을 쳐다보고, 낚싯줄을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깨어나셨군요! 도와드릴까요?”

시바가 그렇게 외치자,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깨어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나무를 탔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도 풍겼다.

남자의 행색은 굉장히 추레했다. 조금 전까지 늪지에 푹 젖어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머리에 붙은 수초를 떼어내며 말했다.

“덕분에 정신 차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아, 성법 걸어드릴까요?”

“어머님의 은혜가 미궁까지 비치는군요. 감사합니다.”

“혹시 가르침을 따르는 형제님이십니까? 이거 참, 즐거운 우연이군요.”

시바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마음이 들뜨기 쉬웠다.

그 사이, 앨런이 따뜻한 음료를 만들어왔다.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평소처럼 오토마톤이나 만질 줄 알았더니 웬일이냐?”

“어려운 사람이 보이면 도와야죠.”

“수상한데···.”

인정이라는 단어가 실종된 세상에서 쉬우면서도 어려운 말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으나 실천이 어려웠다.

그러나 테일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런은 어려운 처지인 사람을 도와주긴 하지만, 지금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는 성격은 아닌 까닭이었다.

어쨌든 차를 끓여왔으니 정성을 봐서라도 마셔야 했다. 늪에서 체온을 빼앗긴 남자도 따뜻한 컵을 받아들었다.

컵이 텅 비고, 남자와 이야기를 하려던 테일러가 눈을 부릅떴다. 안면근육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차에, 무슨···.”

테일러는 혀가 굳었는지 말을 제대로 못 했다. 앨런은 떡 벌어진 입에 하얀 버섯을 가득 넣어줬다. 불만스러운 눈으로 우적우적 씹고 나니, 잠시 후에 경직이 풀렸다.

“도대체 차에 뭘 넣은 거냐?!”

“알려준 독초 전부요.”

“앨런, 그런 걸 전부 때려 넣는다고 미궁 요리가 되는 게 아냐. 정성과 손맛이 담겨야···.”

“아뇨. 저길 보세요.”

테일러는 그제야 함께 차를 마신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자가 그를 치료해주려는 시바를 막고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없더군요.”

소매가 길어서 관찰하기 어려웠으나, 앨런은 그가 몸에 붙은 수초를 떼어낼 때 발견했다. 그도 다른 나무에 있는 앨런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시바 씨도 좋았습니다. 성직자가 있으니 경계심이 약해지네요.”

“저는 속이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냥 제압하려고 했으면 어려웠을 텐데, 덕분에 쉽게 잡았습니다.”

< 늪지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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