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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04화 (104/193)

< 늪지대(4) >

“주입한 마력에 강하게 반발하는구나. 최소 심도 3 후반이다.”

심도 5로 추정하는 로렌조에게서 벗어났으니 더 강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조차 속일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를 지니고 있거나.

“기습당했으면 골치 아플 뻔했어. 그렇다고 나한테까지 독차를 먹일 줄은 몰랐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도 속여야 하니까요. 아저씨가 조금만 이상한 기색을 보였으면, 시바 씨가 있다고 해도 의심부터 했을걸요.”

확실히 성직자들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이 있긴 했다. 그러니 구더기로 추정하는 남자도 망설임 없이 주는 음료를 마셨으리라.

테일러가 골치 아프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방심했다가 손쉽게 잡힐 만큼 독은 전통적인 암살 방법이었다.

사람이 존재하는 한 계속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육체를 파괴하는 물질이 내부로 침투하면 대응하기 어려웠다.

눈이 회까닥 돌아간 남자는 간혹 발작을 일으켰다. 입에서는 거품이 계속 끓어올랐다.

“일반인이었으면 근육 마비로 인한 호흡 곤란으로 죽었을 거다. 정신 차리려면 아직 멀었으니 좀 지켜보자.”

“네.”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남자를 데리고 바로 돌아가긴 곤란했다. 적어도 피살이꽃의 꽃봉오리가 열리거나, 씨앗이 맺혀야 했다.

앨런은 상자에게 꽁꽁 묶어놓은 남자를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배를 깔고 앉은 상자는 생명체에는 관심이 없기에 살살 찌르는 시도조차 안 했다.

앨런은 도롱뇽이 있는 나무로 건너갔고, 함께 온 테일러도 다시 늪을 향해 낚싯바늘을 던졌다.

“로렌조 씨는 마법사라서 마력감지 능력이 강력할 텐데 어떻게 달아났을까요?”

“짐작하는 방법이 하나 있지. 귀식대법이다.”

“꼭 동방대륙에서 유래한 명칭 같네요.”

“맞아. 가사상태로 위장하는 기술이지.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호흡과 심장박동이 매우 느려져서 적은 열량으로 며칠, 숙련자는 한 달을 버틸 수도 있다.”

“물속, 어쩌면 진흙 속에서 일주일을 버텼겠군요. 지독함이 생존경쟁에서 유리하긴 하죠.”

다른 나무를 보니 시바가 남자의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있었다. 호흡 곤란으로 죽으면 안 되니, 그 부분만 치료하는 것이다.

“로렌조 씨는 위험하다고 돌아가라고 했었는데, 무슨 뜻일까요?”

“그건 저 녀석이 깨어나야 알 수 있겠지. 아니면 그냥 겁주려고 했던 말일 수도 있고.”

다음날.

황제도롱뇽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피살이꽃이 활짝 열릴 무렵 남자가 깨어났다.

눈을 뜬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도 목소리가 너무 크면 늪지의 생물이 모여든다는 사실을 아는지, 적당히 음량 조절을 했다.

일행이 다시 하나의 나무 위로 몰려들었다. 남자는 납치범에게 붙잡혀서 트렁크에 갇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앨런 일행은 천하의 악당이었다.

“당신들 미쳤어? 아니, 구더기구나! 먹을 음식이 부족하다고 나까지 구워 먹으려는 건가?!”

“그건 너겠지. 로렌조가 알려줬다.”

테일러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대답을 돌려줬다. ‘로렌조’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남자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가면을 써도 저것보다 변화가 적으리라.

신문은 테일러가 맡았다.

“이름.”

“···.”

“구더기는 맞지?”

“···.”

“너 같은 놈들에게 묵비권은 아까운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어렵나?”

테일러는 성문처럼 닫힌 입술을 개방하는 여러 방법 알고 있으나, 앨런과 시바가 보고 있어서 꺼림칙했다.

앨런에게 맡기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물고문을 하거나 불로 지질 것 같은데, 맡기자니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고.

이마의 주름이 한층 깊어질 무렵, 앨런이 제안했다.

“이런 것에게 심력 낭비하지 말고 위로 데려가죠. 에셀 마탑도 23층에 작은 연구기지를 보유하고 있으니, 거기에 두면 로렌조 씨가 알아서 처리해줄 겁니다.”

“그가 쫓았으니 뭔가 있는 놈이긴 한데···. 지금은 네 말이 맞다.”

로렌조가 정식으로 의뢰한 건 아니나, 이쪽이 성의를 보이면 합당한 보상으로 돌려줄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모습을 보니, 좋은 선택 같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피살이꽃이 시들고 씨앗이 맺혔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도롱뇽이 아니었으면 훨씬 오래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캠프를 차리지 않고 단출하게 생활해서 빠르게 떠날 수 있었다.

테일러는 낚시로 모은 마석을 나침반에 흡수시켰다. 원시림의 물고기가 마석을 품으면 동족보다 훨씬 커져서 손맛도 좋고, 구분하기도 편했다.

“그럼 가 볼까.”

테일러는 왔던 방식대로 뗏목 위에서 노를 저었다. 나무 위에서는 으르렁거리던 남자도 조용했다. 소란을 피우면 동물들이 몰려들 테고, 묶인 상태이니 물속에 처박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리라.

문을 통과하기 전, 앨런은 미약한 숨만 내뱉는 황제도롱뇽을 쳐다봤다. 재배용 피살이꽃은 판매용과 다르게 숙주의 생명력을 무자비하게 흡수했다.

힘겨워하던 녀석은 문을 통과하자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모습처럼 편해 보였다. 이처럼 미궁의 괴물이나 동물이 층을 넘어갈 경우, 생명을 잃거나 가동을 정지했다.

앨런이 탐험가 생활 초반에 만났던 기사 오토마톤은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특이한 존재였다. 그러나 확률의 문제일 뿐, 미궁 전체로 보면 가끔 나타나긴 했다.

도롱뇽을 방부처리 능력이 있는 천으로 감싸고 상자에게 건넸다. 상자 뒤로는 녀석의 동력과 연결된 플로팅 왜건이 둥둥 떠서 따라다녔다.

24층은 봉우리와 숲이 많은 23층, 늪지대투성이인 25층과 달리 초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 뜻은 멀리까지 잘 보인다는 의미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점점 커지는 점들을 확인한 앨런은 남자를 쳐다봤다. 잘못을 숨기려고 애쓰는 아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호기라도 있나요?”

“이제 알았어? 너무 늦었다.”

남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마도구라면 제가 벌써 포착했을 테니, 저들은 이곳에서 그쪽을 기다리고 있었겠죠.”

“그게 중요한가? 지금이라도 풀어주면 목숨은 부지하게 해주지. 너는 마법공학자니 우리를 따라오고.”

“안타깝지만 프리랜서라서 스카웃 제안은 받지 않습니다.”

앨런은 손짓으로 상자를 불렀다. 녀석은 주인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남자를 집게발로 들어 올려서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방패처럼.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구더기들의 의리는 어떤지 볼까요?”

“이, 이 잔인한···.”

남자가 치를 떨거나 말거나, 상자가 자세를 푸는 일은 없었다.

그 사이, 점들이 구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기동력이 좋아서 오토마톤이나 탑승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원시림의 생물, 그것도 털코뿔소를 타고 있었다.

앨런이 잠시 남자를 쳐다봤다. 탐험가를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고 드는 생물을 어떻게 길들였을까. 그는 총알받이 역할이 싫었는지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거나 말거나, 앨런은 팔을 앞으로 뻗었다. 저번에 장전만 해놨던 확산탄은 이번에 자유를 얻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더니 대낮에도 즐길 수 있는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물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불꽃은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주변에 내려앉았다.

장비가 그을리고, 코뿔소의 털에 불이 붙었다. 길들여진 코뿔소는 고통을 호소하며 땅바닥을 굴렀다. 등에 타고 있던 기수가 납작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전투를 준비하던 테일러가 약간 힘 빠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확산탄이라며? 불이 안 꺼지는데?”

“백린탄 성분도 조금 섞었습니다. 마석 가루를 듬뿍 넣어서 그런지 잘 타오르네요.”

남자는 동료들이 죽어서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방패 역할을 할 필요가 없어서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확산탄이 적 상당수를 퇴근시켰지만, 아직 남아있는 구더기도 많았다. 그들은 화염을 뚫고 근처까지 접근했다.

동시에 진동까지 느껴졌다. 개미지옥을 만드는 두더지, 테라굴라였다.

두더지는 앨런을 노렸다. 기수 하나를 반절로 쪼개던 테일러가 이쪽으로 오려고 했지만,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땅이 푹 꺼지며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개미지옥 가운데에 자리한 테라굴라가 뾰족한 발톱으로 앨런의 몸을 노렸다.

카가각!

벌집 모양의 마력 방벽이 발톱을 밀어냈다. 외장갑에 닿지 않으니 불똥이 튈 일도 없었다.

앨런은 녀석의 발톱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어릴 때부터 그는 몸치였다. 분명 앞에 있는데도 잡기가 어려웠다.

“후···.”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아예 몸으로 두더지를 들이받았다. 어설픈 동작이어도 파워슈트의 육중한 무게와 출력이 실리니, 녀석이 무 뽑히듯이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앨런은 마운트 상태로 녀석의 발을 붙잡았다. 그리고 발톱을 꺾었다. 암석을 분쇄하는 발톱이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파워슈트를 겉멋 때문에 입고 있겠는가? 이름에 포함된 ‘파워.’도 그냥 붙인 말은 아니었다.

외장갑 밑에 도사린 인공 근육은 착용자의 전신을 휘감았고, 충격을 완화해주며, 같은 동작이라도 몇 배의 출력을 뿜어냈다.

앨런이 뽑아낸 발톱을 두더지의 목에 꽂고 개미지옥을 빠져나갔을 때, 살아남은 구더기들은 이미 달아나고 있었다.

구더기의 의리는 딱 이 정도 수준이었다. 뜻이 맞아서 모이긴 했으나, 언제나 자신의 목숨이 최우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잡으러 가고 싶으나,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기엔 기동성이 부족했다.

23층과 점점 가까워지니 아직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남자가 식은땀을 죽죽 흘렸다. 로렌조를 만나기는 싫은지 거래를 요청했다.

“로렌조가 왜 나를 잡으려고 했는지 알겠지? 날 풀어준다면 길들이는 기술을 알려 주겠···.”

“잠깐만요.”

앨런은 남자의 입을 막고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런 기술이 있다기보다는 유적이나 오파츠의 힘을 빌렸겠죠. 어쩌면 로렌조 씨가 내려온 이유 중 하나겠네요. 유적을 공격했거나 오파츠를 훔쳤는데, 하필 에셀 마탑의 소유였죠? 이간질 시도는 좋았습니다.”

주인이 정해진 물건은 보물이 아니라 돌로 취급해야 했다. 욕심은 더 큰 화를 불러오기 마련이고, 길들이는 기술은 너무 눈에 띄었다.

심지어 에셀 마탑주는 제이크 마셜 회장과 동급의 실력자였다. 눈 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수가 있었다.

앨런의 추측이 거의 들어맞았는지 남자가 똥 씹은 표정을 짓고는 처음처럼 입을 다물었다.

앨런은 테일러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남자를 생포해간 보수로 유적이나 오파츠를 구경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까요?”

“되겠니?”

“잘 설득하면 혹시 모르죠. 미궁의 괴물을 다룰 수 있는 신비는 어떤 형태일지 기대됩니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면 거절하겠지만, 겉만 구경하게 해달라고 하면···.”

“글쎄다.”

테일러는 묘하게 부정적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23층으로 향하는 문이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로렌조가 허가한다고 하자. 그럼 우ㅔ···, 아니 제약 공방은?”

테일러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다행히 못들은 듯했다. 저런 더러운 귀에 요화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기 싫었다.

그런 이유로 앨런의 눈에서 번뜩이는 묘한 빛은 볼 수 없었다.

“씨앗이니 천.천.히 가도 되겠죠.”

“그럼 쓰나. 혹시 모를 변형도 생각해야지.”

“유통기한이 기이인 물건이라 괜찮을 겁니다.”

완고한 태도에 테일러가 지원군을 요청했다. 너도 한 마디 하라는 뜻으로 시바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약식 기도만으로 되겠어? 성수는?”

“어머님께 대한 정식 기도는···.”

테일러의 기대하는 표정은.

“···꿈에서 드리면 되니 장소는 상관없습니다.”

망가졌다.

묶인 남자가 사이좋은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 얼굴도 안 봤는데 지들끼리 결정하고 자빠···. 컥!”

표범의 앞발에 귀싸대기 맞은 남자가 단단하고 하얀 조각을 뱉어냈다. 앨런이 그에게 충고했다.

“허락 없이 말하면 때리도록 명령했으니 조심하세요. 이빨이 사라진 건 안타깝지만 다시 박을 수 있잖아요. 그렇죠?”

존댓말로 저러니 더 화가 났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맞은 턱주가리가 아파서 참았다.

< 늪지대(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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