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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06화 (106/193)

< 조사(2) >

거래는 서로의 이견을 조율해서 자신에게 최상의 결과를 불러오려고 애쓰는 활동이다. 대부분은 급한 쪽이 손해 보기 마련이다.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로렌조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지만, 앨런은 그의 속내를 어느 정도 눈치챘다.

왜 갑자기 말을 꺼냈겠는가. 자신들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까, 혹은 일이 너무 많아서 사람의 손을 빌리고 싶어서.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로렌조는 본인의 실력만큼 안목도 까다로울 터. 잠깐의 만남으로 자신을 기억하고, 환상 마법을 꿰뚫어서 내부를 바라본 모험가라면 충분하다고 판단 것이다.

미련이 남았는지, 아니면 의례적으로 하는 말인지 은근슬쩍 물었다.

“언제 올라가지?”

“늦었으니 하루 자고 갈 생각입니다.”

원시림은 언제나 태양이 떠 있지만, 사람들은 외부의 시간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공터 모서리에 달린 시계대로라면 지금은 저녁 7시였다.

답변을 들은 로렌조가 고개를 흔들었다.

“거절해놓고 뻔뻔하기도 하군. 생각이 바뀌면 출발하기 전에 언제든 말해도 좋다.”

누가 봐도 아쉬운 사람의 태도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앨런은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명목상 로렌조의 손님이어서 이용 가능했다.

미궁에서 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음식들이 뷔페처럼 차려져 있었다. 대기업다운 저력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테일러가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원시림이 아무리 넓어도 배처럼 갇힌 공간이잖아. 먹어서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해야지.”

“아까···.”

앨런은 로렌조와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들려줬다.

“왜 우리일까요?”

“여기가 어디냐?”

“원시림의 생물을 탐구하는 연구소죠. 여기에서 생체 실험을 하면 외부의 손가락질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형제님 연구소면 더 좋지 않습니까? 마법사가 이렇게 많은데.”

“조용히···.”

테일러는 앨런의 눈치를 봤다.

마법사는 마법공학자가 될 수 있지만, 마법공학자는 마법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수요건 중 하나가 빠진 탓이었다.

그러니 마법사와 마법공학자 중 양자택일을 물어보면 대부분은 전자를 선택했다.

테일러는 앨런의 마음도 그러리라 생각했고, 웬만하면 꺼내지 않는 주제였다.

“전 상관없습니다. 뭘 만드는 게 좋고, 도구나 오토마톤의 힘을 빌려서 마법과 유사한 행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구나.”

테일러는 지하묘지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거미에 새긴 룬문자로 펼친, 언데드를 정화하는 수법은 마법과 거의 똑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연구가 특기라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관심 없으니 피살이꽃 씨앗이나 잘 챙겨서 올라가요.”

“바로 가는 거지?”

“어딜요?”

“그···, 웨스턴스카이.”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의 몸에 부착된 동작 복사 센서도 결정에 한몫···.

아니, 당당했다. 오히려 테일러의 건강을 위한 조치였다. 몸이나 매직웨어에 이상이 생기면 센서가 감지할 테고, 그럼 앨런이 바로 알 수 있었다.

“웬일로 바로 수긍하네?”

“싫으세요?”

“그럴 리가.”

테일러가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앨런은 다시 공터 벤치로 향했다. 지금이 아니면 마법사가 이렇게 바글바글한 모습을 언제 보겠는가.

마법사들도 연구실은 싫은지 공터로 자주 나왔다. 직장이니 그럴 수 있었다. 작업공간에서 받는 피로감은 어마어마할 테니 차라리 상쾌한 공기라도 마시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들도 앨런이 외부인임을 알지만, 항상 앉아만 있으니 이제는 익숙해져서 눈길도 안 줬다.

앨런은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는 편이 오히려 좋았다. 덕분에 마법사에게는 익숙하지만 외부인은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을 하고 대화를 듣기도 했다.

재밌는 상상이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많았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욕을 먹는 의견도 있었지만, 앨런은 그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때, 어떤 목소리가 앨런의 고막을 두드렸다.

“팀장님···, 왜 내려···.”

여기는 연구소고 실험 주제마다 팀장이 있으니 그들은 여럿이라도, 내려왔다고 하면 한 명을 가리켰다.

앨런은 다른 쪽을 구경하는 척하며 귀만 그쪽으로 돌렸다. 청각 강화까지 곁들이니 제대로 들렸다.

“구더기가 뭘 훔쳐 갔을걸.”

“아, 밑에서 뭘 한다고 하더니···. 보안요원을 뭘 했기에?”

“구더기만으로 불가능해. 놈들이 미친놈이긴 하지만 죽을 자리 찾아서 달려들지도 않잖아.”

“구더기‘만’으로? 네 말은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네. 그게 누군데?”

“알면 보고하고 지상으로 휴가 나갔지.”

“훔친 물건이 도대체 뭘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그러나 앨런은 하나의 단어를 잡아냈다.

‘용’

용과 드래곤.

전자는 뱀을 후자는 도마뱀을 닮았다. 물론 이런 비유 자체가 모욕일 정도로 초월적인 생명체였다.

현실에서는 찾아보려고 해도 찾기 힘든 지하인과 달리, 용과 드래곤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그들이 만든 실험실이나 보물창고, 거주지 등을 전문적으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탐색은 험난했다. 100명이 뛰어들면 99명이 실패하고, 남은 1명도 기껏해야 용이 썼던 컵, 드래곤의 비늘 광택제 같은 생활용품만 주워와서 눈에 띄는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기 애매했다.

어쨌든 앨런의 흥미를 끌기는 충분했다. 바로 숙소로 돌아가서 테일러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안에는 성수병을 든 시바도 있었다.

“복귀를 좀 미뤘으면 좋겠어요.”

“왜? 어째서? 갑자기?”

테일러는 예상보다 격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앨런의 설명을 듣고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용? 대부분 허탕이긴 한데, 미궁탐험가는 알면서도 도전하는 법이지. 그게 지금은 잊힌 낭만이기도 하고.”

테일러가 ‘나 때는~’으로 시작하고, 시바는 요즘도 비슷하다고 반박했다.

앨런은 바로 로렌조를 찾아갔다.

“마음이 벌써 바뀌었나?”

“팀원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수만 적절히 챙겨주신다면야···.”

용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었으나, 그걸 그대로 말하긴 힘들었다. 로렌조의 손아귀에서 대번에 불이 솟구칠 수도 있으니까.

앨런이 보수를 입에 담으니, 로렌조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저렇게 생각하는 편이 둘 다 좋았다. 다른 사정을 안 물어보고 적절한 대가에만 움직이면 얼마나 좋은가.

로렌조는 시간이 촉박한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어떤 물건을 발견한 장소에서 연구 중이었는데, 정체불명의 무리가 습격해서 탈취했다. 우리 쪽 인원이 24층으로 향하는 문을 따라다니며 감시 중인데···.”

“어렵겠죠.”

드나드는 모험가들을 일일이 검사할 수는 없었다. 그건 싸우자는 뜻이니까.

에셀 마탑보다 덩치가 작은 단체 소속이거나 개인이 모인 파티라면 가능은 하겠지만, 결국 자신들에게 업보가 돌아오게 되어있다.

힘이 인권인 세계이자 시대. 지금이야 에셀 마탑의 위세가 높다지만, 그렇게 억압한 사람 중에 누가 초강자가 될지 몰랐다.

게다가 에셀 마탑이 자충수를 두면 좋아할 세력이 넘쳐났다. 꼴등이 넘어지면 대부분 안타까워하겠지만, 1등이 추락하면 손뼉 칠 사람은 많았다. 추락이 아니라 흠집이어도 환장하고 달려들겠지.

“모험가의 얼굴을 확인하는 중이지만, 사실 그것만 해도 강도 높은 통제지. 그러니 빨리 해결해야 한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새벽 4시.

테일러가 출발하기 전에 뜬금없는 질문을 로렌조에게 던졌다.

“브레이커의 기지에 들러도 되나?”

“무슨 이유라도?”

“보다시피 짐이 좀 있어서 말이지. 내가 거기에 일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거든.”

“···.”

무슨 뜻인지 대번에 이해한 로렌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나를 모욕하지 마라.”

“모욕? 물건 보관과 모욕이 무슨 상관이지?”

“그건 우리 쪽에서 맡아주지. 도롱뇽도 갓 죽은 것처럼 싱싱하게 저장할 수 있다.”

목적을 달성한 테일러는 순순히 물러났다. 두 무리는 갈라져서 이동했고, 거리가 상당히 멀어지자 시바가 물었다.

“형제님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여기에선 너무 순진해도 병이야. 위에선 아무리 착해 보여도 여기에선 악마가 될 이유가 충분해.”

“앨런?”

“네.”

“손가락만 튕겨도 죽을 아이가 귀중한 지식이 담긴 책을 가지고 있어. 어떻게 할래?”

“값을 치를 테니 보여달라고 부탁하겠죠.”

“절대 안 된다고 하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다른 사람은 모른다.”

앨런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렸다.

“일단 그대로 두고 거미를 붙여둘 겁니다. 금방 빼앗길 테니 제가 읽어보고 다시 돌려줄 겁니다.”

“문제를 변형하면 안 되지. 출제 의도를 벗어났잖아.”

“가정부터 그릇되었으니 답도 그에 걸맞아야죠. 요즘 어떤 애가 기억수정 놔두고 책을 읽습니까?”

테일러가 앨런을 스윽 보더니 다시 시바에게 말했다.

“어쨌든 조심 또 조심이야. 그늘 없는 대기업이 있겠어? 게다가 미궁은 증거 수집도 불가능해.”

“무슨 말인지 잘 알았습니다. 속세는 호락호락하지 않고, 어머님의 말씀대로 오직 힘만이 정의를 관철할 수 있군요.”

“경전에 그런 말이 있다고?”

“명상 중에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명상이 아니라 수면이겠지. 됐다.”

앨런과 로렌조의 일행은 서로 모르는 척하며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차피 문은 하나이기에 누가 봐도 이상하진 않았다.

로렌조의 말과 달리 24층으로 향하는 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순간이동할 때도 있어서 로렌조도 별말 안 했다.

평야를 지나고, 늪이 곳곳에 있는 25층 중간쯤에 멈춘 로렌조가 앨런 일행을 기다렸다.

“구더기. 분명 놈들과 거래하는 세력이 있을 거다.”

아무리 먹고살 수는 있다지만 계속 원시림에 머무는 것 자체는 힘들었다. 현대 문물에 깊숙이 녹아들다 못해 중독된 사람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갱단과도 거래하는데 구더기라고 다를 바 있겠는가. 로렌조의 말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로렌조가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뒤에 있던 남자가 등을 떠밀리며 나왔다. 낚시로 잡았던, 쥐를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이제 네 역할을 해라.”

“···시벌. 끄아아!”

남자는 욕하다가 목 뒤를 잡고 비틀거렸다. 그새 뇌 확장 장치를 교체한 것이다. 남자는 이제 도망칠 수 없었다.

“이놈이 안내할 거다. 다시 한번 설명하지, 찾아야 할 물건은 용이 음각된 길이 50cm의 금속 원통이다. 우리가 더 접근하면 놈들에게 비상이 걸릴 테니 여기서 대기하겠다. 만약 쫓기는 일이 발생하면 이곳까지만 도망 오면 된다.”

로렌조는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25층에서 가장 큰 나무라서 위치를 찾기 쉬웠다.

앨런은 25층을 지나서 산이 많은 26층에 도착했다. 굴곡이 많으면 정찰하기 어렵고, 그건 숨기 좋다는 의미였다.

앨런은 입을 꾹 다문 남자에게 물었다.

“함께 일하게 됐는데 통성명이나 하죠. 이름이 뭔가요?”

“닥쳐.”

앨런은 버튼 달린 장치를 보여줬다. 버튼은 두 개였는데, 하나에는 번개 모양이, 나머지에는 해골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게리.”

“게리, 앞장서세요.”

게리는 앨런을 빤히 쳐다봤다. 네 이름은 왜 안 알려주냐는 눈빛이었지만, 앨런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장치를 흔들었다.

잘못된 만남으로 시작되었으니, 후의 관계도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심심하다고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게리.”

“···.”

“게리?”

“왜?”

“앞으로 갈 곳에 관해서 설명해주세요.”

존댓말이 더 짜증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리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26층에는 3개의 무리가 있다.”

“추악한 형제님들이 많군요.”

게리는 이를 갈면서도 앨런이 장치를 흔들자 순순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먼저 가야 할 곳은 내가 속한 조직의 본거지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바깥손님들도 자주 방문하니 이상하게 보진 않을 거다.”

< 조사(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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