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사(3) >
홀로스킨은 얼굴이나 체형에 환상을 부여해서 정체를 가리는 마도구다. 이것저것 직접 붙여서 분장하는 쪽도 좋지만,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는 편의성을 이길 수는 없다.
앨런 일행은 로렌조가 줬던 홀로스킨을 적용했다. 앨런은 건강한 외모와 금발, 테일러는 수염이 아예 없는 중년의 얼굴, 시바는 검은 수염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모습으로 변했다.
시바가 불안한지 수염을 자꾸 쓸어내렸다.
“어머님이 내려주신 몸을 가려야 한다니···. 그리고 변장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적대적으로 변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저번에 말했지···요. 바깥손님은 자주 방문하고, 그러는 주제에 떳떳하고 싶은지 홀로스킨을 주로 착용해···요. 그러니 이상하게 보진 않겠지···요.”
“쥐를 닮은 형제님, 혼내지 않을 테니 편하게 말씀하시죠. 본거지에서 연기해야 하니 지금부터 적응합시다.”
“네. ···아니, 좋다.”
26층은 산이 많은 구역답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게다가 사람을 위한 길을 뚫려있지도 않아서 조금 전진하려면 길을 막는 식물을 치워야 했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할지라도 강도 높은 노동을 반복하면 피로가 쌓이는 법이다. 일반인의 눈에서 보면 힘들어하기까지의 시간만 따져도 충분히 괴물이겠지만.
가파른 비탈을 따라 굴러가는 돌을 피하며 우묵한 지형에 다다르자, 게리가 주변을 쓱 둘러봤다.
“우리 본거지는 절벽 아래에 있고, 여기에서 30분 정도 걸으면 목적지가 보인다.”
“너희들은 숨어.”
앨런은 표범과 상자에게 모습을 감추라고 명령했다. 표범은 빽빽한 활엽수 위로 올라갔고, 상자는 바위 사이에 숨었다.
삐―!
지시사항을 완수했다는, 어떻게 들으면 자부심이 느껴지는 비프음이지만, 앨런이 보기에는 모자랐다.
덩치가 커진 상자는 눈에 띄었고, 당연히 바위로는 몸을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
앨런은 마석 몇 개를 꺼내고, 룬펜을 들었다.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마석을 끼운 뒤, 룬펜으로 [은밀], [무음], [동화]의 룬문자를 새겼다.
상자가 집게발을 허공에 휘저었다. 앨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잘 보였지만.
“와, 씨바···.”
게리는 그게 아닌지 최고의 감탄사 중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다. 자기가 욕을 하고도 불안한 눈빛으로 앨런을 봤다.
“욕했다고 버튼 누를 생각은 없습니다.”
“후···.”
욕조차도 눈치를 봐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와 닿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은 다시 움직였다. 가파른 오르막 중간중간에는 깊게 뿌리내린 나무들이 있어서 등반이 어렵진 않았다.
한참을 올라가고 나서야 눈 앞에 펼쳐진, 고도가 높은 평평한 지대를 가로지르자 거대한 균열이 보였다. 끝과 끝이 어디인지 안 보였고,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뻗어있었다.
게리는 태양이 손길을 덜 뻗어서 시커먼 아래를 쓱 보더니, 앨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시인지 알려줘.”
“뇌 확장 장치에 기능이 있을 텐데요?”
“없으니까 묻는 거지.”
“오후 1시 20분이요.”
“마침 그 시간이군. 아래로 뛰어내려.”
갑작스러운 말에 테일러가 미간을 좁혔다. 저 아래와 게리의 얼굴을 번갈아 볼 때마다 인상이 험악해졌다.
“이게 미쳤나. 500m도 넘어 보이는데 뛰라고?”
흉흉한 기세를 직격으로 맞은 게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서 있는 장소는 바람이 안 불지만, 저 아래는 이상할 정도로 상승기류가 강해서 묵직한 장비를 갖춘 사람도 띄웁니다.”
“그럼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볼까?”
“아무 곳으로 뛰면 안 되고, 왼쪽에 튀어나온 바위와 오른쪽의 흠집 사이여야 합니다.”
게리는 거짓이 아니라는 듯 진짜로 몸을 날렸다. 급격한 속도로 떨어지며 작은 점이 되었고, 어느 구간에 들어서자 깃털처럼 천천히 낙하했다.
게리가 아래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앨런도 움직였다. 설령 속임수더라도 활공 기능이 있으니 문제는 없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자폭 장치를 미리 꺼내고 뛰어내렸다.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파워슈트의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다면 눈꺼풀 들어 올리기도 힘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어느 지점을 통과하자 위를 향해 솟구치는 바람이 거세지더니 몸이 천천히 내려갔다.
앨런은 뒤이어 내려온 테일러를 쳐다봤다.
“올라가는 일만 쉽다면 몇 번 경험해보고 싶네요.”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아뇨, 바람의 압력으로 인한 마력발전이 가능한지 실험해보고 싶어서요.”
테일러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토하는 시늉을 하는 게리를 보고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절벽 아래는 황량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메마른 바위만 보였다. 미궁답게 바람이 그렇게 부는데도 풍화 작용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올 의미가 있을까. 처음에는 도전하는 탐험가가 있겠지만, 다음부터는 피해가리라.
앨런은 게리를 따라가며 물었다.
“바람은 항상 부나요?”
“지상 시간으로 낮 1시부터 2시까지. 아까 내가 말했던 지역만. 왜 그러는지는 나도 모르니 묻지 마.”
“까칠하긴. 앨런이 잘 대해주니 편하냐?”
“아닙니다.”
앨런이야 반말을 해도 그냥 넘기지만 테일러는 아니라서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야 했다. 뇌 바로 아래에 폭탄이 있으니 참아야지 어쩌겠는가.
에셀 마탑의 마법사 얼마나 악랄한지 스위치가 부서지거나 본인이 만지면 저절로 폭발했다. 그러니 게리 앞에는 명령에 따른다는 선택지만 존재했다.
아래로 내려오고 끝이 아닌지, 또 걸어야 했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하자, 게리가 동굴로 쏙 들어갔다.
복잡한 길을 따라 또 한 시간을 걸으니 앞이 막혔다. 착시로 그렇게 보일 뿐, 바위 뒤에 교묘하게 가려진 공간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공동이 보였다.
팟!
갑자기 강한 빛이 정면에서 뿜어졌다. 게리가 미리 말해준 내용이라 앨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살아있었구나!”
빛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살아있지. 새꺄. 눈깔 고장 났냐?”
인공 안구는 망가지기도 해서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빛이 약해지고, 탐조등 옆에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지 머리카락과 수염에 기름과 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호수 애들이 네가 잡혀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탈출했어?”
“그 새끼들이 하는 말 그대로 믿어? 난 계속 늪에 숨어있었어. 이거 보이냐?”
게리가 새끼손가락이 없는 왼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게 로렌조 새끼한테서 무사히 도망치려고 바친 대가다.”
“잘됐네. 이번 기회에 귀 파는 기능 달린 손가락으로 달아.”
“지랄···.”
“그런데 뒤에는 손님? 불알 떨어지게 도망가놓고 잘도 데려왔네.”
해후의 시간이 끝나자 털보가 앨런 일행을 관찰했다. 게리는 헛기침을 하더니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설명했다.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약속 지점에 들렀더니 방문객이 있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지.”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성실했다고?”
“닥쳐.”
게리 덕분에 신뢰도가 올라갔는지, 털보는 무슨 용무로 방문했냐고 묻는 형식적인 검문만 했다. 앨런이 마법공학자라고 하자 뛸 듯이 기뻐하기도 했다.
구더기도 매직웨어를 사용하는데, 아래에 처박혀서 사니 고장 나면 바로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수리기사의 방문을 환영하는 것이다.
“형씨. 자격증은 있나?”
“없는데요.”
“음···, 좋아.”
무자격이라고 하니 오히려 좋아했다. 하긴, 자격증 있는 마법공학자가 무슨 이유로 미궁까지 내려와서 구더기를 수리해주겠는가.
“파워슈트가 멋지네. 어디서 구했어?”
“맘에 안 드는 분이 있어서 강제로 벗겼죠.”
“그런 기부자면 나도 만나고 싶네.”
“좋은 곳으로 가서 만날 수 없을 겁니다.”
근위병의 슈트를 빼앗았으니 앨런의 말에는 거짓 한 조각 담기지 않았다. 이번 답변도 마음에 들었는지 털보가 입꼬리를 쫙 찢었다. 썩은 이빨이 보여서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게리의 본거지는 굵은 통로를 기반으로 두고, 사방으로 잔가지들이 뻗어있는 형식이었다. 굵은 통로는 시장, 식당, 도축장 등 온갖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앨런은 원시림 생물의 가죽을 벗기는 구더기들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꽤 많군요.”
“50명 정도 되니까.”
구더기들은 한 번씩 이쪽을 쳐다보고, 게리에게 반가움이 담긴 욕설을 내뱉은 후 작업에 열중했다.
게리는 손님방이라고 부르는 구멍으로 앨런을 안내했다. 침대라고 놓여있는 거적때기를 보니, 그냥 땅바닥에서 자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난 두목에게 보고해야 하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
“훔쳐 간 원통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오세요.”
“상황 봐서···.”
게리가 사라지고, 앨런이 방을 관찰하다가 테일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코를 손으로 막고 있었는데, 안쪽에 감춘 얼굴도 마찬가지로 찡그리고 있었다.
“냄새가 그렇게 심하나요?”
“구더기 새끼들은 후각이 없는 게 분명해.”
“그나저나 오파츠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네요. 연구가 안 끝났다고 했으니 숨겨진 능력이 더 있겠죠?”
“무슨 능력?”
“원시림 생물 길들여서 타는 모습 보셨잖아요.”
“형제님, 혹시 뇌가 아프시면 저와 손잡고 교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갑시다. 말씀드려서 싸게 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깜빡한 거지 치매가 아냐!”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테일러는 매직웨어로 인해 발생한 일종의 주화입마에 걸렸었기에 치매라는 단어나 뉘앙스에 굉장히 민감했다.
테일러가 자신도 누님에게 마스크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도중, 게리가 돌아왔다.
“어디에 있대?”
“그게···.”
게리가 머리를 긁적이자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테일러가 으르렁댔다.
“손목 잘리기 싫으면 긁지 마.”
차려자세로 변한 게리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 봤으니 가치도 얼마나 될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각 조직의 대장들이 나눠 가졌습니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겠죠.”
가만히 듣던 앨런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파츠가 쉽게 나눠집니까?”
“되니까 나눠 가졌겠지. 하나하나는 쓸모가 없어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합쳐야 해.”
“골치 아프군요.”
대장을 기습하자니, 이곳에 상주하는 인원이 마음에 걸렸다. 단번에 때려잡지 못하면 사방에 뚫린 탈출구를 통해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멀리 도주할 테고 소문이 나면 다른 조직이 더 깊은 곳으로 숨는다.
“한 가지 방법이 있어.”
“?”
“우리에게 오파츠의 위치를 알려주고 마도구도 줬던 사람이 5일 후에 와. 그때는 두목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소는 압니까?”
“알아.”
“굉장히 협조적이군요.”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로렌조, 그 양반에게 제발 말 좀 전해줘.”
“알겠습니다.”
게리는 얼굴에 화색을 띠더니 다시 방을 나갔다. 그가 데려온 손님이니 함께 있어도 되지만, 따로 움직이며 추가 정보를 모아야 했다.
앨런이 테일러에게 물었다.
“왜 저럴까요? 로렌조 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뭐가 좋죠?”
“에셀 마탑도 정화봉사단 같은 조직을 운영해.”
“형제님, 정말입니까? 에셀 마탑도 세상의 깨끗함을 위해 힘쓰는군요.”
“아니, 노예를 부린다고.”
당연히 법률에 노예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았다. 훨씬 가혹한 처지에 놓은 사람도 수두룩했고.
“최빈국들이 있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절대 발전해서는 안 되는, 국민이 힘을 지녀서는 안 되는.”
“자원강탈 말이군요.”
“합법적 거래로 권리를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상황 열악한 곳에서 노예로 부린다는 뜻이었다. 밥만 주면 되니, 마석으로 오토마톤을 굴리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혔다.
“뇌 확장 장치에서 시계 기능을 왜 뺐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군요. 노예는 시간을 따져가며 일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럼 시작할까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니?”
“마법공학자라고 소개하고 들어왔잖아요. 좀 있으면 점검받으러 올 테니 조금씩 손댈 계획입니다.”
“왠지 익숙해 보이는구나.”
“카르텔 조직원 상대로도 해봤으니까요.”
“아, 맞다. 그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니?”
“과부하로 폭발했을 겁니다. 5일 후 거래 장소에는 부하들을 우르르 끌고 가겠죠?”
< 조사(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