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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08화 (108/193)

< 조사(4) >

구더기도 사람이다. 미궁의 갱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도 인권이 존재한다는 담론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도 사람이니 생각 정도는 한다는 뜻이다.

미치광이들이기에 에셀 마탑이 소유한 오파츠를 훔치는 일에는 아무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엔도르핀, 도파민 등 호르몬의 과다 분비 혹은 불법 약물의 사용으로 뇌가 약간 맛이 갔겠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이들은 걱정거리가 있으면 힘으로 해결하길 선호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매직웨어와 마도구를 정비해야 했다.

앨런에게 매직웨어를 점검받으러 온 구더기들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지 입을 쉴 새 없이 놀렸다.

“에셀 마탑은 별것도 아닌 일로 들쑤시고 다닌단 말이지.”

“맞는 말이군. 오파츠가 그렇게 많은데 혼자만 독차지하면 되나? 나누어 써야 기쁨도 두 배인데 인정머리 없이···. 사실은 자기들이 더 하면서 우리한테만 지랄이야.”

“이 아저씨, 말이 좀 통하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야. 우리랑 잘 맞는데 함께 하실?”

“그래도 바깥 공기가 좋지.”

테일러가 앨런 옆에서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구더기의 대화를 유도했다. 바깥소식이 어떤지 알려주면 눈을 빛내며 듣고, 자신이 아는 이야기를 적절히 풀어냈다.

평범한 대화 같아도 일종의 거래였다. ‘내가 말했으니, 이번에는 당신 차례야.’ 같이.

가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분명 호수 애들이 잡혀가는 게리를 24층 평야에서 봤다고 했는데···.”

“에셀의 속임수겠지. 마도구로 밥 빌어먹고 사는 놈들인데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속아서 죽은 놈들이 병신이지.”

“그럼, 그럼.”

회사로 치면 재입사, 군대로 치면 재입대인 테일러는 브레이커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서 잘 녹아들었다. 덕분에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건질 수 있었다.

구더기 조직끼리는 사이가 괜찮고, 절벽 아래의 길이 대충 어떻게 이어졌고, 에셀의 정보를 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고 등등.

앨런은 왼쪽 의수 점검을 마치고, 구더기의 텅 빈 어깨에 그대로 끼워 넣었다. 단단히 결합하고 마력 회로를 활성화하니 푸른빛이 은은하게 흐르다가 사라졌다.

구더기치고는 깨끗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어깨를 휘휘 돌렸다.

“애들 말대로 실력이 좋아.”

남자는 게리처럼 중간 간부였다. 앨런이 마법공학자로서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모르니, 먼저 부하들을 보내고 나중에 방문한 것이다.

“이름이 뭐라고?”

“노박이요.”

“노박, 우리랑 함께 일해볼 생각은 없나?”

“밑에 있으면 최신 정보를 접하긴 힘들죠. 대신 자주 내려오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팔에서 느껴지는 힘이 장난 아니네. 저번에 내려왔던 놈이 고쳤을 때는 계속 삐걱 소리가 나서 거슬렸는데, 이번에도 그런 거 아니겠지?”

“죽을 때까지 써도 될 겁니다.”

“하하하!”

간부는 앨런의 말을 농담으로 이해하고 웃으면서 사라졌다. 시간을 보니 저녁 9시, 이제는 올 사람도 없었다.

중앙 통로에 간이 작업장을 펼쳤던 앨런은 도구를 정리하고 숙소로 향했다.

앨런은 대충 만든 의자에 풀썩 앉다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는 테일러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마지막에 네가 했던 말. 분명 거짓말은 아닌데 뭔가 좀 그래···. 나는 사정을 아니 오싹하게 느껴지더라.”

“걱정도 많으세요.”

“내일이면 결판나겠다.”

구더기와 정체불명의 무리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은 내일이었다.

그동안 게리가 속한 절벽의 조직원들은 모두 매직웨어 점검을 받았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앨런을 찾아왔다.

만남을 앞두고 왜 그랬을까.

“이놈들도 예상하는 거지. 어떤 식으로든 싸우게 될 거라는 걸.”

“대담하긴 하네요. 그러다 죽으면요?”

“나만 아니면 되잖아.”

“추악한 형제님들은 어지간히 미쳤군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구석에 누워있던 시바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시바는 성직자 명함을 잠시 내려놓고 무투가 행세를 해서 구더기 사이에서도 미치광이 취급받는 중이었다.

‘매직웨어도 없이?’라는 반응이 주류를 이뤘다. 시바는 인공 안구나 뇌 확장 장치 빼고는 순수 육체긴 했으니까.

“네가 말할 단어는 아닌 것 같다만.”

“어머님이 빚은 육체의 위대함을 모르시는군요.”

“그러면서 권갑 끼잖아.”

테일러는 인공 안구나 뇌 확장 장치는 매직웨어 취급도 안 했다. 그 둘은 일종의 생활필수품이었다.

“권갑이 아니라 패션 아이템입니다.”

“나한테 훨씬 단단한 소재로 만든 권갑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냐고 물어봤던 사람이 누구더라? 어딘가의 드워프였는데.”

그 사이, 앨런은 구더기에게 에셀 마탑의 일을 전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고민했다.

‘오파츠의 존재를 알았을까? 아니면 뭔가 하고 있으니 그냥 방해하려고?’

후자라면 심보가 고약하다고 넘어가면 되지만, 전자라면 생각을 달리 해야 했다.

‘에셀 마탑과의 충돌이 부담스러워 남의 손을 빌렸겠지.’

보통 이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면, 나중에는 사냥개를 삶으려 든다. 구더기들도 본능적으로 아니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고.

아니면 원시림의 생물을 길들이는 오파츠를 보고 욕심에 눈이 멀어서 빼앗으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아스 혹은 마법 계약 때문에 오파츠를 우선 넘기겠지. 그 후에는 강탈하려고 할 테고.’

다음 날 아침, 절벽의 조직원들은 대장을 필두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대장은 나가기 전에 게리에게 지시했다.

“늪지대에서 고생했으니 이번에는 남아있어. 이사해야 할 수도 있으니 여기 남은 애들 데리고 작업하고 있어라.”

게리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몸을 돌렸을 때 보인 표정은 썩어있었다. 배려가 아니라 귀찮은 일을 떠맡았으니까.

구더기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은신처 중 하나인 동굴에는 10명이 남았다. 앨런 일행과 게리를 합치면 넷이니, 거의 반절이 숨겨진 적이었다.

게리는 중앙 통로로 부하들을 불러모았다. 여섯 명의 예비 일꾼은 너저분한 물건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개새끼들. 이럴 줄 알고 어제 정리 안 하고 죄다 쳐 잤구나.”

“여길 청소할 바에는 차라리 마탄이나 맞고 말지.”

“게리 형님, 우선 뭘 할까요?”

게리는 유달리 살갑게 대하는 구더기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사이, 앨런 일행은 구더기들의 뒤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왜 부르시는···. 끄···!”

구더기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단검 끝이 목을 뚫고 옆으로 빠져나왔으니 성대가 멀쩡하겠는가. 피거품을 뿜던 남자가 그대로 쓰러졌다.

“···?”

“!!!”

갑작스러운 돌변에 남은 5명은 눈만 끔뻑거렸다. 충격이 너무 커서 뇌가 사고 활동을 멈춘 것이다.

그래도 미궁에서 목숨을 걸며 도적질한 보람은 있는지, 신체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상황도 아니고 청소를 위해 모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장비가 있겠는가. 주무기는 모두 각자의 숙소에 있었다.

더욱이 제대로 된 무장이 있다 해도 앨런 일행의 상대가 되겠는가.

테일러 역시 마나소드로 둘의 목을 깔끔하게 날렸고, 시바는 정권으로 상대의 척추를 부숴버렸다.

펑!

앨런이 바라본 두 명의 몸에서는 폭발이 일어나더니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게리는 그 모습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테일러나 시바의 무력보다는 앨런이 보여준 실력 행사가 훨씬 두려웠다.

눈에 보이는 외부의 힘으로 당했으면 차라리 낫겠지만, 저건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철석같이 믿어왔던 자신의 신체가 배신하는 것이다.

이래서 마법사와 엮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일반인의 사고 능력이 사무용 컴퓨터라면, 마법사는 슈퍼컴퓨터였다.

그 힘으로 매직웨어를 해킹하면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방화벽이 튼튼한 매직웨어를 쓰면 되겠지만, 그런 물건이 구하기 쉽겠는가.

열린 바이저 너머로 앨런의 무심한 눈동자가 슬쩍 보였다. 살인에 대한 희열, 사람을 죽였다는 고뇌, 피를 봤다는 혐오감 등 마땅히 보여야 할 감정의 조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리.”

“네!”

“긴장 푸세요.”

앨런이 자폭 스위치를 들고 있지 않은데도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 나갔다.

“하아···.”

처지를 자각한 게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갔다. 이제는 뒤가 없었다. 로렌조에게 오파츠를 바쳐서 자비를 구걸하든지, 아니면 동료였던 자들의 칼에 죽든지.

게리는 집이었던 동굴을 나서기 전에 통로를 슥 둘러봤다. 이제 은신처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으니, 한 시간이 흐르면 모든 흔적을 미궁이 집어삼키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게리가 앨런을 쳐다봤다.

“저기···.”

“말하세요.”

“밖에 숨겨둔 오토마톤은 사라지지 않았을까요?”

“마력을 부여한 마석을 충분히 넣어뒀으니 괜찮습니다.”

“본인의 마력을요?”

“당연하죠. 광산이나 오토마톤에서 채굴한 마석을 썼다가는 미궁이 집어삼키잖아요.”

게리는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생각했지만, 앨런은 워낙 마력이 흘러넘치니 잠깐의 수고만 들이면 됐다.

동굴을 빠져나가자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앨런을 맞이했다. 고개를 드니, 갈라진 틈 사이로 푸른 하늘과 태양이 보였다.

게리는 말없이 절벽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도마뱀처럼 올라가기 시작했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방법 없냐?”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게리의 말투는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해졌다. 같은 존댓말이라도 뉘앙스가 달랐다.

“매번 이래?”

“네.”

게리는 대답은 단호했다. 일반인도 조금 단련하면 500m 암벽을 50분 내로 주파하니, 매직웨어와 마나하트로 강화한 사람이라면 훨씬 쉬울 터였다.

거기에 앨런이 그려준 [인력], [경량]까지 더해지니 원숭이는 저리 가라 할 속도로 절벽을 올라갈 수 있었다.

게리를 따라 움직이는 도중 테일러가 물었다.

“표범이랑 상자는 안 데려가?”

“목적지와 반대 방향이고 거리까지 머니까요. 그들의 거래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니 빨리 따라가야죠.”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상자 안에 마석을 충분히 넣어놨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3달, 평소처럼 움직이면 일주일 정도겠네요.”

“많이도 넣어놨네.”

게리는 토박이답게 거침없이 움직였다. 먼저 간 대장이 뚫어놓은 식물은 아직 회복하지 않아서 편히 갈 수 있었다.

언덕 하나를 올라가기 전, 게리가 뒤를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다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저쪽 보시죠.”

게리가 가리키는 장소에는 은신처에서 봤던 구더기 하나가 있었다. 분명 주변을 감시하라고 놔둔 것 같은데, 정작 눈은 거래 현장 쪽으로 향했다.

앨런이 미리 심어둔 마력을 통해 조작하려는 찰나.

콰앙!

성대한 폭발음이 들리며 구더기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덕분에 앨런 일행은 쉽게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아래의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구더기들과 녹색 패턴의 위장 로브로 몸을 가린 사람들이 부딪치고 있었다.

“왼쪽이 호수, 가운데가 절벽, 오른쪽이 유적 패거리입니다.”

“유적이요?”

게리의 물음에 앨런이 반응했다.

“숲 가운데에 돌로 만든 신전 같은 건물이 있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중심에는 책을 두는 빈 선반만 있었다고 하더군요.”

테일러가 앨런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눈이 마주치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테일러 수련법을 발견했던 장소 같다는 의미 같았다.

그 사이, 로브를 입은 무리가 구더기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피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겨우 10명이 100이 넘는 사람을 압도했다. 구더기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앨런은 슬슬 개입할 필요를 느꼈다. 이대로 구더기들이 도망간다면, 수상한 무리는 오파츠가 담겼으리라 예상되는 녹색 상자를 들고 사라질 테니까.

앨런은 일단 언덕 위에 남고, 나머지는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팔을 들어 올리자 마탄 발사기가 총구를 내밀었다. 수상한 무리의 중심에서 마법을 준비하는 사람을 겨누고.

퐁!

소리는 귀여웠지만, 단번에 마법사의 방어막을 망가트렸다. 아쉬운 점은 그게 끝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구더기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절벽 패거리의 대장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게리가 손님들과 함께 오고 있었다.

“게리 네가 어떻게?”

말과 달리 굉장히 반가워 보였다.

게리는 사신이 방문했으니 좋아할 때가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남남이었다.

< 조사(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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