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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09화 (109/193)

< 마법사(1) >

앨런은 언덕 위에서 전투를 넓게 관망했다. 본래대로라면 100명이 넘는 구더기들이 겨우 10명인 무리를 압도해야 하지만, 전투의 양상은 정반대였다.

‘마법사가 많아.’

에비 사용자가 아니라, 본연의 능력으로 신비를 부리는 마법사의 비율이 높았다.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밀어붙이면 되잖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마법사는 신체단련을 멀리하는 직종이고, 덕분에 느릿한 이미지를 지녔으니까.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하루 20시간 동안 땀 흘릴 필요 없이, 신체를 매직웨어로 바꿀 시간만 있으면 됐다.

1초를 자르고 잘라서 움직이는, 극한까지 단련하는 육체 수련자가 아니니 그 정도면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런 이유로 저들에게는 마법사와 전사의 경계가 흐릿했다. 고속으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뇌 확장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마법을 연산하고, 상대가 방심했다 싶으면 화력이 충만한 공격을 이리저리 날려댔다.

대포가 기동성과 자의식까지 지녔으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구더기들은 전투자극제로 호전성을 키우고 공포심을 잠시 날려버렸으나, 슬슬 약효가 떨어질 때가 다가온다. 현대의 전멸 기준을 벌써 넘어섰으니, 무슨 일이 발생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앞으로 10분 정도.’

앨런은 구더기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를 가늠했다. 저 정도의 마력이 활성화되어 있다면, 전투자극제가 효용을 잃기까지의 시간이 짧았다.

방패가 사라지기 전까지 수상한 무리에게 최대한 피해를 누적시켜야 했다.

앨런은 가장 외곽에서 적들을 밀어내는 근육질의 마법사를 응시했다. 눈에 마력이 몰리며 시야가 확대되고, 단순한 초점 조절을 넘어서서 매직웨어까지 꿰뚫어 봤다.

좌우로 무수히 교차하는 선들이 보였다. 이것은 일종의 방화벽으로, 너머에는 별들을 품은 은하수가 있었다.

앨런이 마력을 투사하면 은하수 내부에 블랙홀을 만들 수도 있고, 별들끼리 충돌시켜서 깨버릴 수도 있다. 이것이 해킹의 기본 골자나, 첫 번째 시도는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거리가 좀 있는 편이고, 적들의 방화벽이 예상보다 두꺼운 탓이었다. 게다가 이번 시도로 인해 적들도 앨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허공에 붉은 공이 떠오르고 길쭉한 창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앨런이 있는 장소로 무섭게 쏘아졌다.

‘오른쪽 바위 뒤로.’

예전이었다면 발이 너무 느려서 꼼짝없이 맞겠지만, 지금은 파워슈트를 입고 있었다.

다리를 가볍게 움직이니 몸이 앞으로 급격히 쏠렸다. 등에 달린, 문어 다리를 닮은 2개의 기계 팔도 주변의 나무를 붙잡아서 신체를 앞으로 쏘아냈다.

순간적으로 풍경이 뒤바뀐다. 물감이 덜 마른 캔버스를 유리창에 대고 한쪽으로 밀어버린 것처럼.

일그러지는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앨런의 눈은 그 속도에 금방 적응해서 뚜렷한 초점을 되찾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앨런은 시야 한구석이 여전히 붉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있는 장소에는 단풍 따위가 존재하지 않느니, 저건 마법이라는 뜻이었다.

마법사가 쏘아냈던 화염의 창이 자잘하게 분리되더니, 화염의 비로 변해서 사방을 두드렸다. 나무와 풀에 불이 붙어서 주변이 불바다로 변했다.

앨런의 위치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으니 주변을 통째로 불태우려는 속셈이었다.

파워슈트는 뛰어나진 않아도 내열 기능이 있으니 공격이 그것으로 끝이라면 좋겠지만.

지이잉!

앨런의 고막이 정체불명의 소리를 감지했다. 마력이 실린 음파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 끝에는 투명한 구름만 있었다.

‘아니, 뭔가 있다.’

눈에 마력이 더 담기자, 허공 일부분이 일그러졌다. 4개의 회전날개를 지닌 정찰 드론이 상공에 숨어있었다. 녀석은 앨런이 있는 위치를 향해 기묘한 파장을 뿜어냈다.

‘들켰다.’

일종의 표적 마법이다. 이것으로 마법사들은 앨런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했다. 2명이 뒤로 빠지더니 손가락을 복잡하게 꼬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로 내려간 시바에게도 그들의 수상한 행동이 보였다.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그게 아냐. 공격을 쉽게 흘려내던 방어막이 부서졌으니, 위협적인 존재라고 파악한 거다.”

테일러는 엄지로 언덕을 가리켰다. 이름은 빠져있어도 누구를 말하는지는 분명했다.

“그럼 도와야죠?”

“누가 누구를? 진짜 돕고 싶으면 앞의 마법사에게 집중해. 자세히 보면 놈들의 화력도 많이 죽었어. 빼빼 마른 놈 보이지? 간다.”

테일러가 구더기 사이에 몸을 숨기며 앞으로 이동했다. 시바는 성직자인 사실을 숨기고 있기에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어느덧 앨런이 예상한 10분이 되었다. 구더기들의 움직임이 짙은 크림처럼 늘어졌다.

“시발. 이게 뭔 짓거리야?”

처음에는 욕이었다.

“뒤 말고 앞을 봐!”

몸을 사리는 간부들이 호통을 쳐도 다른 곳을 보는 눈동자가 늘어났다.

교환비는 처참했다. 이쪽은 50명이 죽었는데, 마법사는 겨우 2명이 쓰러졌을 뿐이다. 사람이라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투자극제가 주는 고양과 흥분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차가운 공포와 뜨거운 생존본능이 채워졌다.

마법사들도 그걸 알기에 도주로를 열어뒀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기 마련이니까.

“정신 차려! 마법의 위력이 줄었잖아! 할 수 있다고!”

누군가가 호통을 쳐보지만 한 번 흔들린 기세는 점점 힘을 잃어갔다.

“누구 좋으라고!”

“그러면 니들이 앞에 나서든가!”

약발이 떨어지자 곳곳에서 이탈자가 생겨났다. 욕심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으나, 삶에 대한 욕구가 그것을 뛰어넘었다.

뒷줄에 있던 구더기들은 몸을 뺄 수 있었지만, 전열에 있는 것들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마법이 번쩍거리는데 어디로 눈을 돌린단 말인가.

“개자식들아!”

있는 힘껏 소리치지만, 돌아오는 건 후드 아래로 마법사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는 모습뿐이었다. 숫자의 힘만 믿던 무리가 와해되면, 남은 건 일방적이고 편한 사냥이니까.

마법사는 욕을 하는 구더기를 끝낼 생각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그의 손에서 이글거렸다.

순간 옆에서 느껴지는 위기감. 채찍에 부여했던 마력이 뛰어난 마력통제력에 의해 왼손으로 이동했다. 원형 방어막이 마법사의 좌측에 나타났다.

이미 전의를 잃은 구더기는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자신을 향해 샷건을 겨눈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고작 총 때문에?’

전투 때문에 감각이 이상해진 탓으로 생각할 뻔했지만, 마법사가 쌓아온 본능은 다르게 판단했다. 저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방어막이 두꺼워졌다.

콰앙!

그러나 작업을 끝내기도 전에 샷건의 총구에서 화염이 뿜어졌다. 마탄보다는 급이 낮지만, 산탄도 앨런이 직접 제작한 물건이었다. 더군다나 돈 욕심도 크게 없어서 쉘 하나하나에는 마석 가루가 듬뿍 들어갔다.

첫 발에 방어막이 깨지고.

콰앙!

두 발에 피부가 터져나갔다.

마법사는 그 끔찍한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왜 보이는···.’

그게 생각의 마지막이었다. 몸과 깔끔하게 분리된 머리는 어딘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테일러는 자신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구더기를 단숨에 도륙 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생각한 바를 실행하려면 마법사들을 전부 처리한 후여야 했다.

테일러가 만든 균열로 구더기들이 밀고 들어갔다. 전열에 있는 놈들은 등을 보였다가는 사망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샷건의 탄창을 갈며 앨런이 있을 법한 장소를 바라봤다.

그곳은 거의 불바다였다. 쓰러지는 나무 사이로 앨런의 형상이 언뜻언뜻 보였는데, 땅에 대고 마탄을 발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러지 하는 순간 불이 주춤하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연막탄이 터진듯한 장소에서 굉장히 새빨갛고 가느다란 선이 마법사들이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쿵!

무언가가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동료들을 믿고 앨런을 향해 마법을 퍼붓던 2명이 동시에 쓰러지는 소리였다.

갑자기 3명이 당하자, 마법사들의 인원도 확 줄어버렸다. 화망이 반절로 줄어드니 개개인이 받은 부담은 2배로 늘어났다.

순식간에 마법사를 해치운 누군가는 언덕 위에서 계속 무언가를 쏘아대지, 구더기들은 희망이 생겼다고 미친 듯이 달려들지.

마법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신체가 길쭉한 마법사가 녹색 상자를 들어 올리더니 냅다 뛰기 시작했다.

육식동물은 등을 보인 초식동물에게 유독 끌리는 법이다. 구더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남은 4명이 화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며 길을 막아섰다. 얼마나 무리를 하는지 몸 곳곳에 박은 매직웨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테일러와 시바는 슬그머니 뒤로 빠져나가서 앨런과 합류했다.

“당연히 쫓을 거지?”

“네.”

셋은 게리를 남겨두고 전장을 이탈했다. 아니, 전장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열이 파괴당한 마법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으니까.

상황 파악을 위해 남은 게리는 잠자코 있었다. 절벽 패거리의 두목, 그러니까 자신의 전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쫓아가자.”

“미쳤수?”

“정신이 나갔구만. 뒤지려면 혼자 뒤져. 아니지. 너부터 죽자.”

단시간에 너무 많이 죽어서일까. 구더기들이 두목을 향해 칼을 돌렸다. 다른 패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이렇게 줄어든 이상 통합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 전에 책임자를 효수할 필요가 있었다.

“잠깐! 에셀 마탑이 그렇게 매달리는 물건이다! 구매자만 잘 찾으면 신분을 세탁할 수 있어!”

슬금슬금 다가오는 20명의 눈에 불이 붙었다. 이들도 구더기가 되고 싶어서 됐겠는가. 원시림에서 도적질하느니, 차라리 지상의 뒷골목에서 구르는 편이 훨씬 나았다.

“도망친 마법사는 분명히 잡힐 거다. 그러면 남은 3명. 유물을 노리는 놈들을 너희끼리 처리할 수 있나?”

두목은 앨런 일행의 실력을 들먹이며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앞장서.”

“이번에도 뒤로 빼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전 대장은 순순히 선두에 섰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요구에 따라야 하지만,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기회가 생기리라 생각하며.

어차피 이들도 모두의 신분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라면 가능하겠지.’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전 대장은 그 점을 노리고 있었다. 점검받은 매직웨어는 아직 팔팔했다. 평소보다 화끈거리는 느낌이 아주 좋았다.

게리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이 자리의 20명 중에 절벽 패거리만 10명이었다. 그 말은 반절의 머리에 폭탄이 심어졌다는 뜻이었다.

그 시각, 앨런 일행은 절벽을 넘는 중이었다. 상자를 들고 도망친 마법사는 비행 마법을 사용해서 쉽게 넘어갔지만, 이들은 로프를 반대편에 걸고 외줄 타기 하듯이 이동했다.

마지막에 넘어온 테일러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러다 놓치겠는데.”

“어쩌면 이미 잡혔을 수도 있죠.”

“왜?”

테일러는 앨런이 바라보는 뱡향을 유심히 바라봤다.

“나무밖에 없는데?”

“형제님, 저기는 상자와 표범이 있는 방향입니다.”

“설마?”

테일러는 마법사가 급하게 도주하느라 이리저리 꺾인 나뭇가지를 따라 움직였다. 그 방향이 묘하게 앨런의 예상과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저 앞에서 붉은 신호탄이 폭발했다.

“더 빨리!”

한참을 내달리던 테일러가 우뚝 멈춰 섰다. 앞으로 넘어진 마법사의 머리 쪽에는 붉은 물이 고여있고, 근처에는 가만히 앉아있는 표범이 보였다.

“언제 명령 내렸어?”

“아까 마법사가 도주하기 전에 [표적]을 찍어놨습니다. 덕분에 쉽게 잡았네요.”

“일단 들고 빠져나가자.”

“잠깐만요.”

앨런이 테일러를 제지하며 옆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녀석은 가만히 있는 듯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함부로 만졌다가 보안 마법에 당한 것 같네요.”

“괜찮을까?”

“사람이라면 기절했겠지만, 오토마톤이고 충분히 강화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앨런의 말대로 곧 상자가 집게발을 딱딱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오파츠가 담긴 녹색 상자 근처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빠르게 살펴볼게요. 잠깐만 기다리···.”

앨런은 보안 마법을 살피려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테일러와 시바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을 풀어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누군가가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잠시 후, 수풀이 흔들리더니 녹색 로브와 헬멧을 착용한 사람이 나타났다.

“주인이 있는 물건을 건드리려고 하면 쓰나.”

변조한 티가 나는,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들렸다.

< 마법사(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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