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2) >
헬멧과 로브 그리고 변조한 목소리. 정체를 숨기기 최적화된 조합이기에 누구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앨런은 일단 궁금하니 질문을 던지긴 했다.
“누구시죠?”
“···내가 대답하리라 생각하나?”
부정적인 답변만 돌아오자 앨런은 녹색 궤짝을 지팡이로 두드렸다. 푸른 전기가 뱀처럼 지팡이를 휘감고 올라와서 파워슈트의 장갑을 깨물었다. 얇게 두른 마력 방벽이 잠시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로렌조 씨는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도망치라고 했지만···.’
궤짝을 가지고 이동하긴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보안 마법은 견딜 만하지만, 마법사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맞추기 쉬운 표적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보내주실 수 있나요?”
“물건을 놓고 간다면.”
“그럼 무슨 능력을 지녔는지 살펴봐도 될까요? 잠깐이면 됩니다.”
“···.”
예상 못 한 대답이었는지 마법사가 움찔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혹시 어디 아픈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치우면 꿈자리가 사나운데.”
명백한 부정의 의사. 앨런은 원래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고, 저 마법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구더기와 거래하러 왔던 10명과 급이 달랐기에 웬만하면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마법사가 대답을 재촉했다.
“결정해라. 그냥 갈지, 따끔한 맛을 볼지.”
“그만, 저놈은 우릴 무사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
“중년, 아니, 노인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좋아.”
마법사는 홀로스킨을 꿰뚫어 봤다. 그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고, 로렌조가 구더기나 상대하라고 준 물건인 이유도 있었다.
거추장스럽게 작동할 필요가 없으니 꺼버리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헬멧의 눈구멍이 이번에는 시바에게 향했다.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는 드워프는 모신교 성직자겠군.”
“헬멧 형제님은 감이 좋군요.”
감, 느낌, 눈썰미 등등···. 마법사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누구보다 마력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지녔고, 통제력과 감응력 등 어떤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신이 도둑질하라고 가르치던가?”
“정의로운 도둑이라면 다르지요. 의적이 뭔지는 들어보셨습니까?”
“정신머리가 느슨하군.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니 시작하지.”
앨런은 한순간이지만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고 착각했다. 불타는 숲의 환상이 잠시 보였다.
마법사의 마주 본 손바닥 사이에서 불씨가 이글거렸다.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뜨거워졌다.
외부온도 : 30℃
평균기온이 20도였는데 10도나 상승했다.
“자애로우신어머니모진풍파에도···.”
시바는 재빨리 경전을 읊었다. 성수로 혀가 꼬부라져도 제대로 그리고 빠르게 발음하도록 연습한 성과가 나타났다.
[자애의 포옹]
오랜만에 제대로 기도를 외웠다. 제멋대로 구절을 바꾸거나 대충 소리쳤을 때와 비교하면 방어막의 밀도가 굉장히 짙었다.
동시에 떨어지는 화염의 구체. 불 계열 마법의 대표주자인 [화염구]였다.
새하얀 방어막과 부딪치며 크게 폭발했다. 사방으로 불티가 튀고, 떨어진 빨간 눈물들은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제대로 시작하지.”
다시 한번 들려오는 쇠 긁는 목소리. 마법사의 손가락이 현악기를 튕기듯이 허공을 연주했다.
주변에 번져나갔던 불길이 마법사를 중심으로 몰려들고, 압축된 화염의 고리가 마법사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테두리가 일렁이더니 화염이 몸집을 키우고, 아래로 시뻘건 장막을 드리웠다. 마법사의 팔이 그 속으로 파고들더니 손바닥으로 불꽃을 담아냈다.
앨런은 주변 온도가 올라갈 때부터 상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열린 서랍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거미들이 주인의 팔 위로 올라왔다.
테일러의 뒤에 숨어서 손목만 움직였다. 이번에는 룬문자 연계보다는 중첩에 신경을 썼다.
[응결] 또는 [기우]로 몸이 칠해진 거미들이 식물을 이용, 몸을 숨기며 사방으로 퍼졌다.
거미들이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불을 퍼낸 마법사가 공 던지듯 화염을 발사했다. 주먹 크기였던 불덩이는 점점 커지더니, 시바의 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와 비슷한 덩치를 지녔다.
콰앙!
시바의 몸이 불길에 휩싸이며 저 멀리 처박혔다.
“콜록! 수염이!”
수염 먼저 찾는 소리를 들으니 아직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테일러는 오직 마법사만 주시하며 말했다.
“뭉쳐있으면 화력의 먹이가 된다. 내가 나서서 집중력을 조금이라도 빼앗겠다.”
테일러가 돌진했다. 그의 몸이 마법사의 헬멧 반절을 가렸으나, 앨런은 왼쪽 눈구멍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높아진 습도를 느꼈다. 원시림에서는 자연 현상이 발생하긴 하나, 원래는 비가 올 날씨가 아니었다.
‘마력을 꼼지락대던 녀석의 수작이 분명하군. 그리고···.’
나눠진 시야로 보는 노인은 나이답지 않게 듬직한 덩치였다. 마력으로 노화를 저지할 정도의 실력자로 보이진 않으니 매직웨어로 신체를 도배했을 게 뻔했다.
눈에 마력이 담기며 마법사와 노인 사이에 실이 이어졌다. 해킹 시도였으나 가볍게 튕겨 나왔다.
해킹의 골자는 영혼석 내부의 별문자를 건들거나 마력회로에 간섭해서 뒤트는 것인데, 이번에는 쉬우리란 예상과 달리 방화벽을 뚫지 못했다.
마법사는 안개의 환상을 목격했다. 방화벽은 마법과 결합해서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기에 종종 그런 모습을 비춰주긴 했다.
만약에 방화벽이 용을 닮았다면? 사나운 이빨에 해커가 찢기면? 정신 혹은 육체가 다치고, 너무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었다.
해킹 저지는 분명 파워슈트를 입은 마법공학자의 작품이었다.
‘귀찮게 하는군.’
미간이 좁혀지며 마력이 들끓었다. 주인의 의지에 호응한 화염이 덩치를 키우고, 팔에 달라붙어서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사각형의 방패로 변했다.
타타타탕!
동시에 반자동 샷건에서 쏟아지는 산탄. 마석 가루로 강화한 납 구슬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벽을 뚫지 못했다.
몸을 두들기는 총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방패가 꿈틀거렸다. 빠르게 탄창을 갈아 끼우는 테일러는 이 마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화염의 응보]
피해를 입으면 그에 반응해서 되돌려주는 마법이었다. 탄창을 내팽개치고 몸을 옆으로 굴렸다.
화염의 주먹이 원래 있던 자리를 깨끗하게 밀어버렸다. 까맣게 탄 식물이 재로 변해 흩날리고, 자극을 받은 탄창은 폭발하며 사방으로 총탄을 날렸다.
“후···.”
테일러는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렸다. 납 구슬이 몇 개 박힌 통증이 뇌를 찔렀다.
마침 그 자리에 있는 부하를 발로 찼다. 사람에게 걷어차였다고 믿기 힘든 속도로 날아간 시체는 화염 고리에서 뻗어진 채찍에 얻어맞고 땅바닥을 굴렀다.
마법사의 시야가 방해받는 찰나, 시체를 방패 삼아 뛰어온 테일러가 마나소드를 빠르게 휘둘렀다.
평소의 정갈한 날이 아니라 번개처럼 불안정하게 뒤틀린 모습이었다. 고출력 모드는 부품의 수명에 악영향을 끼치나 위력은 발군이었다.
그러나 푸른 궤적은 붉은 벽에 막혔다. 고리에서 내려온 불의 커튼이 마나로 이루어진 날을 집어삼켰다.
테일러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날렸다. 마침 부하의 시체가 날아간 방향이었다.
“대우가 박하군. 상사면 부하의 최후를 책임져야지.”
“그것 말인가?”
마법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력의 구체가 온기를 잃은 머리통을 뚫고 들어갔다.
“반푼이라는 단어도 과분한 녀석들이지. 매직웨어에 휘둘리는 꼴이라니. 보여주지”
마법사의 전신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분신자살이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빈틈을 노리던 표범이 불탄 나무 위를 조심스럽게 이동하다가 떨어지며 덮쳤다.
물소의 목도 꺾어버릴 앞발과 마법사의 머리가 닿자마자.
펑!
불꽃의 기둥이 표범을 집어삼켰다. 마법사는 반응성 장갑이라 할 수 있는 [화염의 응보]를 전신에 두른 상태였다. 마치 불타오르는 갑옷을 입은 것처럼.
표범이 워낙 무거워서 날아가진 않고 그대로 추락했다. 마법사가 뒤로 순식간에 움직이더니 표범의 다리를 붙잡아서 멀리 던져버렸다.
콰직!
부러진 나무가 표범을 강타했다. 녀석은 내부 부품에 충격을 받았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제대로 된 매직웨어의 사용법이···다!”
길게 이어진 마법사의 잔상, 그 끝에는 앨런이 있었다. 명치를 찔러오는 주먹에는 단순한 물리력과 마법이 동시에 담겨있었다.
[작열권]
앨런은 뜨거움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약한 몸이 고통을 호소하는 도중에도 정신은 또렷했다.
기계 팔로 나무를 붙잡아서 멈추고 정면을 살폈다. 우려했던 추가 공격은 없었다.
시바 덕분이었다. 몸을 추스르고 헐레벌떡 뛰어온 그는 마법사의 공격에 다시 날아가는 중이었다.
성법은 회복과 보호의 이미지가 강한데, 시바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워낙 멀리 날아가서 쫓아가면 동선에 낭비가 생겼다. 그래서 마법사는 그냥 보내주며 짜증을 내뱉었다.
“바퀴벌레 같은 놈.”
회복하고 돌아와도 다시 날려주면 그만이었다. 몇 번 반복하면 동료들은 잿더미로 변할 테니까.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척에 보지도 않고 팔을 뻗었다.
똑!
그리고 떨어진 물 한 방울. 화염의 결집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 탓일까. 갑자기 서늘함이 느껴졌다.
[불꽃 걸음]
화염과 신체 강화 계열을 섞은 마법이었다. 이동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고, 주변에 불을 지를 수도 있었다.
마법사가 있던 자리에 마나소드를 내려치던 테일러가 입맛을 다셨다.
“호기롭게 막을 줄 알았더니 내빼긴. 널 버리고 도망친 애미도 그보단 빠르진 않았을 거다.”
정신력을 조금이라도 깎으려는 패드립이었다. 그동안 앨런 때문에 자제했지만, 봉인이 살짝 풀렸다.
불의 마법을 다뤄도 마법사는 냉정한 이성의 결정체. 분노를 가라앉히며 비 내리는 하늘을 잠시 쳐다봤다.
순수한 물방울이었으면 몸에 닿기도 전에 기화했으리라.
“왜 대답을 안 해? 설마 진짜냐?”
귀찮게 하는 노인은 무시하며 마법사도 못 되는 마법공학자를 봤다. 파워슈트는 약간 파인 가슴 부분과 그을음 빼면 멀쩡했다.
“열등한 종자가 마법사를 흉내 내는 거냐?”
“마법이 너희의 전유물인가?”
앨런답지 않은 차가운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당연한 소리를···.”
마법사의 목소리는 폭음에 묻혀버렸다. 대화의 틈을 노린 마탄이 후드득 떨어졌다.
주인의 발사에 맞춰서 상자도 배 부분에 튀어나온 마탄 발사기로 [빙결]이 빽빽하게 쓰인 마탄을 쏘아냈다.
화염의 갑옷이 접점 사그라들었다. 겨울도 아닌데 원시림이 얼어붙었다. 재가 섞인 얼음은 새까맸다.
다시 돌아온 시바가 방어막을 잔뜩 두르고 돌진했다.
“위험···.”
앨런이 말리기도 전에 시바는 팔을 내질렀다. 주먹이 마법사의 헬멧에 닿기 전.
화르륵!
화염의 고리가 깨지더니 몸집을 부풀렸다. 충격을 받은 시바는 다시 날아갔다.
해방된 화염은 우리를 탈출한 맹수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빗방울에 주춤거리면서도 계속 덩치를 부풀렸다. 특히 앨런을 향해 적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화염이 지나간 자리, 재가 가득한 장소에 작은 불씨들이 피어올랐다. 밭에 심은 식물의 새싹이 단체로 올라오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그냥 밟고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약하게 보였지만.
콰앙!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가차 없이 폭발했다.
“큭!”
파워슈트를 입은 앨런의 몸도 휘청일 정도로 위력이 상당했다. 시야가 마구 흔들리는 도중에도 마법사를 그 안에 담으려고 했다.
마탄을 그렇게 쏘아댔는데도 마법사는 멀쩡했다. 로브가 조금 찢어지긴 했으나, 이건 옷깃만 스쳐도 이기는 대련이 아니었다.
다시 흐릿해지는 모습, 발자국 모양으로 짓눌리는 잿가루,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
‘온다.’
앨런은 왼쪽 눈과 마력의 흐름을 통해서 마법사의 위치를 잡아챘다. 분명 알고는 있으나 약한 몸으로는 마법사의 속도에 반응하기 어려웠다.
수십 미터를 찰나에 주파한 마법사가 어깨로 앨런을 들이받았다. 마법사답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그 무엇보다 효과적이었다.
“형제님!”
“네놈!”
두 사람의 고함을 들은 마법사가 머리를 살짝 꺾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반응이 격렬하군. 약점이 있어도 없는 척 숨겼어야지. 정신 수양이 저렇게 모자라서야···.”
마법사가 뿜는 마력이 점점 증대했다. 온도도 실시간으로 치솟았다.
테일러와 시바가 접근했을 때 마법사가 폭발했다. 정확히 말하면 주변의 화염이 몰려들었다가 사방으로 힘을 분사했다.
그 충격에 두 사람은 밀려났지만, 마법사가 단단히 붙잡고 있는 앨런은 그러지 못했다. 마력이 빠르게 녹아내렸고, 파워슈트의 단단한 외장갑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앨런은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면서도 마법사를 관찰했다. 에비로 사용하는 마법에서는 볼 수 없는, 섬세한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꽤 오래 버티는군. 마력로가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궁금해지는군.”
“더···.”
“뭐라고?”
“더···, 보여줘. 다른···, 마법도.”
앨런은 열기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처음 느끼는 마력의 운용에 매료되었다. 아귀가 딱딱 들어맞으면서도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하? 정신이 나갔군.”
마법사는 그러면서도 출력을 높였다. 꺼림칙한 녀석을 얼른 녹여버리고 싶었다.
< 마법사(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