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4) >
원시림의 푸르름이 완전히 사라진, 회색 재로 가득 찬 세상에서 붉은빛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그리고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일대에 몸을 드리웠다.
마법사가 넓게 펼쳐놓은 화염의 장벽이 사라지고 비명도 멎었다. 어쩌면 그 반대의 순서일 수도 있고.
테일러는 불을 뚫느라 새까매진 얼굴로 앨런 앞에 섰다.
“괜찮니?”
시바는 신성력을 끌어올린 하얀 손으로 앨런의 몸을 치료했다.
“형제님, 제 말이 들리십니까? 그렇다면 눈을 깜빡여주십시오. 그것도 힘들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여주셔도 됩니다.”
두 사람의 걱정과 다르게 앨런은 차분히 말했다.
“25···.”
“무슨 말이니”
“숫자요.”
““···?””
테일러와 시바는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다가,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표범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마법사였던 물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화염 마법사답게 최후도 화끈했다. 목 위가 아예 잿더미로 변해서 자신이 만든 파괴의 흔적과 함께 흩날렸다.
테일러가 그 모습을 보며 팔짱을 꼈다.
“머리가 완전히 날아갔으니 정체 파악이 어렵겠구나.”
“형제님, 시체를 가져가서 유전자 감식을 요청하면 되잖습니까.”
“힘들게 가지고 올라갔는데 등록된 범죄자가 아니라면?”
“아, 그렇군요.”
메이즈시티는 일단 범죄를 저질러야 유전 정보나 마력 패턴을 기록하기에, 마법사가 초범이라면 누군지 모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니 그런 정보 조작이야 쉽지. 진짜 악독한 놈인데 범죄 이력은 깨끗한 경우도 있다. 너도 알다시피 지상에는 갱단들이 버젓이 돌아다니잖아. 그런데 놈들이 돌아다닌다고 경찰들이 잡아가? 아니잖아.”
“속세는 참 어지러운 동네군요. 어머님의 뜻으로 물들이려면 제가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치료는 다 하고 떠드는 거야? 빨리 앨런을 고쳐줘야지.”
“전 괜찮아요.”
파워슈트에 뚫린 구멍으로 노출된 피부는 새까맣게 탔거나 수포가 올라왔지만, 시바의 치료와 요화의 식물이 시너지를 내서 새살을 돋게 했다.
앨런은 각질을 털어내며 말했다.
“마법사의 정체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았어? 누구지?”
“짐작인데, 아무래도 에셀 마탑의 사람 같습니다. 로렌조 씨가 청염을 다룬다고 했죠? 그런데 이 사람도 공교롭게 화염 마법사네요.”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부족해.”
앨런은 지팡이로 녹색 궤짝을 가리켰다.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상자가 집게발을 몸통에 착 붙이며 뒤로 물러났다.
“내부인이니 에셀 마탑에서 찾았다는 오파츠에 대한 정보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겠죠.”
“하긴···. 고작 10명에게 털린 구더기 놈들이 오파츠를 지키는 호위대를 뚫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을 테지.”
“에셀 마탑은 빛과 불을 주로 다루니, 그에 상극인 마도구를 지원했다고 하면 아귀가 어느 정도 들어맞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놈들이 들고 있던 마도구 수준이···. 아, 기간제나 일회용으로 줬겠구나.”
“네, 그러면 나중에 처리하기도 쉽죠.”
테일러의 주름이 깊어졌다. 단순히 도둑놈만 잡으면 되는 의뢰인 줄 알았더니, 에셀 마탑의 내부 싸움에 휘말린 꼴이었다.
앨런의 추측이 맞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말이지만, 수십 년간 단련된 그의 감은 신빙성이 꽤 높다고 판단했다.
“그럼 로렌조가 25층에 남은 이유는 내려오는 누군가를 막으려고?”
“아니면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어봐야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테니 의문으로 남겠죠.”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앨런, 너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은 들어봤지? 알면 알수록 깊게 엮이게 된다. 쥐구멍만 한 단체도 아니고 에셀 마탑이면 어휴···.”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핀 피살이꽃을 뜯어냈다. 황제도롱뇽의 등에 심었을 때는 씨앗이 맺히기까지 며칠이 걸렸는데, 고작 몇 분 사이에 씨앗이 매달려 있었다.
피살이꽃은 마력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는 식물이니, 도롱뇽보다 앨런의 몸이 훨씬 자라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었다.
신체를 밭으로 삼아 성장했으니 살펴볼 점이 많았다. 개인 맞춤형 약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중히 챙겼다.
상자 내부에 씨앗을 넣고 일어나니, 시바가 옆에 와 있었다.
“몸에 다른 이상은 없습니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으면 바로 말해야 합니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아까 마법 같은 걸 사용하시던데···.”
주변을 뒤지던 테일러도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웠다.
“몸 내부에 마법 구조체를 만들 수 없으니 혈액을 매개체 삼아서 룬문자를 그려봤습니다. 첫 시도라서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지만요.”
“형제님, 제가 보기엔 훌륭한 마법이었습니다.”
“마법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마법사와 달리 매개물이 필요해서 발동속도도 훨씬 느리고요.”
“에잉. 이래서 머리 좋은 녀석들은···. 룬문자만 그린다고 마법이 되나? 생각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형태를 조절해야지. 그걸 전부 이뤄놓고 별거 아니라고 빼긴.”
테일러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새로운 기술은 여벌의 목숨과 같지만, 너는 몸 상태를 생각해서라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
“피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죠.”
“어···,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었어.”
“그럼 저는 바빠서.”
앨런은 궤짝으로 다가가서 보안 마법을 이리저리 살폈다. 조금 전에 마법사를 상대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쉬워 보였다.
오파츠에 흠집이라도 생길까 봐 보안 마법을 조심스럽게 해체하는 사이, 시바가 테일러에게 물었다.
“형제님, 저 마법사 정도면 어느 정도의 실력자입니까?”
“전성기의 나보다 약~간 강한 정도?”
“진짜입니까?”
“의심이 왜 이리 많아?”
“전성기의 형제님이면 심도 4, 지금은 3. 고작 숫자 하나인데 차이가 엄청 크군요.”
시바가 침울한 얼굴로 불탄 수염을 정돈하고 있으니, 테일러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도 5에 가까웠을 거다. 오히려 그런 상대를 쓰러트렸으니 자랑스러워해야지. 그러니 힘내.”
“앨런 형제님의 활약이 컸습니다만···.”
“착각하지마. 앨런도 우리가 없었으면···, 음, 어···.”
테일러가 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을 꿈틀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들었을 거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안 하시는군요.”
“쟤라면 무슨 방법을 찾지 않았을까? 물론 거기에 다다르는 길은 훨씬 처절했겠지. 팔 하나쯤은 내줬을 수도 있고, 상자를 자폭시키는 수도 있고.”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아무것도 모른 채 주인의 옆에서 얼쩡거리는 상자가 보였다. 그리고 반으로 나뉜 표범도.
“표범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오토마톤은 영혼석만 살아있으면 되니까. 심장이 없어지면 죽고, 폐가 망가지면 질식하는 사람과는 다르지.”
그때, 딸깍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앨런은 궤짝을 열어젖히고 상아색 원통을 꺼냈다. 로렌조의 말대로 음각된 용이 원통을 휘감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재질이 금속은 아니네요.”
“뼈일 거다. 뼈, 송곳니, 비늘 등 그들의 신체를 소재로 삼은 물건이 어쩌다 가끔 나타나니까. 최근에 발견했던 물건이 뭐였더라···. 아, 비늘로 만든 빗이었다. 빗기만 해도 머릿결이 좋아지고 숱이 많아지는 녀석이라 비싸게 팔렸지.”
“원통은 그런 단순한 오파츠가 아니잖아요. 원시림의 생물을 길들이는 능력만 해도 첫 발견일 텐데요.”
“그건 모르지.”
“능력을 시험해 보려면 일단 맹수가 있어야 하는데···.”
앨런이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회색 가루만 가득했다. 원시림의 생물들이라면 분명 소란을 감지하고 접근했을 테지만, 화염이 그들도 집어삼켰으리라.
“근처의 맹수는 거의 사라졌을 테니, 지금 바로 시험하긴 어렵겠네요.”
“그건 나중에 하고 일단 몸이나 추스르자.”
“테일러 형제님의 말대로 장소를 옮깁시다. 재만 가득한 폐허는 사람이 몸을 회복하기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앨런은 천막과 파이프를 엮어서 임시 썰매를 만든 뒤 상자 뒤에 연결했다. 그 위에는 표범과 궤짝이 올라갔다.
회색 땅을 벗어나고, 풀과 나무가 무성한 대지도 건너고,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에 도착했다. 테일러가 먼저 수질을 검사했다.
“독성물질이 하나도 없어. 우선 몸에 묻은 재부터 씻어내자.”
테일러와 시바가 물에 들어가니 둘을 중심으로 시커멓게 변했다. 탐험복을 털던 테일러가 앨런을 불렀다.
“너도 씻지 그러니?”
“···.”
원통에 정신이 팔린 앨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워낙 자주 겪어서 테일러도 씻는 일에 집중했다.
앨런은 원통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원통은 롤케이크처럼 정확히 3등분으로 분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구더기의 대장들이 나눠서 보관했겠지.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로렌조에게 돌려줘야 할 물건이지만, 어차피 손에 들어왔으니 최대한 살펴보고 싶었다. 무언가 지식이나 비밀을 알아낸다면 더 좋고.
‘피를 묻혀볼까?’
파워슈트 표면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떼서 원통에 비벼봐도 변화가 없었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앨런은 팔뚝을 찌르려다가 테일러와 시바 생각이 나서 그만뒀다.
‘그건 제일 나중에 하자.’
물론 안 하겠다는 선택은 없었다.
그러다가 가장 기본적인 검사를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상한 물건을 찾으면 인공 안구가 담고 있는 검진 및 투시 기능으로 살피는 게 기본이었다.
에셀 마탑의 사람들이 안 해봤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앨런은 마력을 왼쪽 눈에 담아서 원통을 훑었다. 단순한 관찰이었다. 원래라면 어떤 느낌도 없어야 정상이지만,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거울에 생긴 김이 단숨에 사라진 것 같은···.’
앨런은 왼쪽 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인공 안구는 영혼석이기도 해서 평소처럼 별문자 입력창을 불러냈다.
표범 그리고 상자를 합친 것보다 거대한 은하수가 펼쳐졌고, 앨런은 변화를 찾아냈다.
‘배드섹터 일부가 사라졌어.’
은하수를 둘러싼 검은 안개가 약간 물러나고, 새로운 별문자가 보였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구조라 이해하긴 힘들었다.
‘원래 있던 별문자? 아니면 원통 때문에 새롭게 새겨진?’
삐!!!
생각의 바다, 아니 심해 속에 잠겨있던 앨런도 단숨에 꺼내올 만큼 높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앨런이 옆을 보니 상자가 몸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 아.”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테일러와 시바를 위협하는 20명의 구더기가 보였다.
머리털과 수염이 지저분한 절벽 패거리의 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좋은 손님인 줄 알았더니 도둑이라니.”
“잿더미로 변한 전투 현장 못 봤나?”
“봤지. 평소라면 눈만 마주쳐도 숨어야 할 마법사였겠지.”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목 위로 아무것도 없는 몸뚱이가 있었다.
“우리가 그 마법사를 쓰러트린 사실을 알면서 이런다고? 뇌에 장애가 있으니 그 병력을 가지고도 10명한테 탈탈 털리지.”
“그런데 너희도 정상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의 말이 맞았다. 텅 빈 마나하트는 배고픔을 호소했고, 혹사당한 몸은 파업하기 직전이었다.
수사자도 홀로 하이에나 무리에게 포위당하면 꼼짝없이 당하기 마련이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심지어 다치고 지쳤으니 더 악조건이리라.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무리가 슬그머니 포위망을 형성하려 했다.
“무릎 꿇으세요.”
목소리 하나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지랄. 우리가 멈추라고 멈추는 병신이냐? 꿈이 아주 커. 다들 안 그러냐? 잠깐, 니들 뭐하냐?”
절벽 패거리가 아닌 구더기가 신나게 떠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여기에 있는 구더기는 20명인데, 그중 반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뇌가 보낸 신호와 앨런의 명령이 충돌한 결과였다.
“무기는 버리고 두 손은 머리 위로 드세요.”
그 결과, 흉악한 범죄자들이 어린애들처럼 벌을 받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머지들도 생각이 많아졌다. 이미 한 번 궤멸했었는데, 같은 일을 같은 날에만 두 번 겪었다.
그때는 전투자극제로 공포를 제거하기라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물건도 없었다.
“다른 분들은요?”
앨런이 그렇게 물어도 남은 이들은 가만히 있었다.
삐!
주인의 눈짓을 받은 상자가 앞으로 나섰다. 가장 가까운 구더기를 표적으로 삼아서 전진했다.
“뭐야? 덤벼!”
구더기는 에비 사용자인지 헤드기어를 쓰고 있었다. 푸른 빛이 감돌고, 주변의 땅에서 솟아난 가시가 상자의 다리를 찔렀다.
삐!
얇고도 단단한 방어막을 발동한 상자는 간지럽다는 듯 가시를 박살 내며 전진했다. 평소와 달리 움직임도 굉장히 빨랐다.
상자는 추가 마법을 준비하는 구더기를 들이받더니 집게발로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 게눈을 닮은 카메라 아이로 다음 목표를 찾았지만, 남은 적들은 모두 무릎을 꿇은 후였다.
삐!
임무를 완수를 보고하려고 큰소리를 냈지만, 주인은 별문자에 빠진 상태였다.
깡!
집게발이 우연히 구더기의 헬멧을 후려쳤다.
< 마법사(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