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5) >
앨런 일행은 25층으로 이동했다. 워낙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최대한 물이 없는 길로 움직여도 비 맞은 땅처럼 느껴졌다.
집단의 규모가 커서 원시림 생물의 눈에 쉽게 띄었지만, 수가 워낙 많으니 놈들이 와도 순식간에 처리했다. 주로 구더기가 움직이고 앨런 일행은 뒤에서 구경했다.
게리는 어정쩡한 위치였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스파이 역할을 자처하며 구더기들과 함께 행동했다.
앨런은 원통이 담긴 궤짝에 눈길을 줬다. 아쉽게도 무언가를 얻진 못했다. 본인의 소유라면 과격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비밀을 파헤쳐보겠지만, 에셀 마탑이 주인이라 애지중지 다뤄야 했다.
테일러가 앨런의 시선을 눈치챘다.
“아쉬우면 차라리 26층에서 며칠 머물다 올라오지. 몸도 많이 다쳤으니 회복을 핑계로 안전한 곳에 머물며 조사해도 됐을 텐데.”
“아뇨. 지금 상황에서는 뚜렷한 해결책이 없습니다. 변화가 있긴 하니 나중에 따로 살펴보면 되겠죠.”
앨런은 왼쪽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며 새로이 나타난 별문자를 떠올렸다. 안개에 가려져 있었는지, 아니면 이번 일을 계기로 새겨졌는지 모르지만, 흥미로운 연구 거리였다.
약속 장소에 도달하자 구더기들이 벌벌 떨었다. 강탈한 오파츠의 주인을 만나게 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로렌조는 말했던 대로 가장 높은 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위에 설치한 천막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그가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어내렸다. 발밑에 마법진이 빛나더니 부드럽게 착지했다.
“오파츠는?”
“여기 있습니다.”
앨런이 녹색 궤짝을 열자 용이 새겨진 원통이 보였고, 로렌조는 염동력 마법을 사용해서 물건을 손에 넣었다.
“가져와라!”
위를 향해 소리치자 부하들이 미리 잡아놨던 티타노보아를 끌고 내려왔다. 녀석은 화가 잔뜩 났는지 쉬익 소리를 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로렌조는 웬만한 통나무보다도 굵은 뱀을 눈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원통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자 티타노보아의 눈이 핑글핑글 회전했다. 그리고 얌전하게 변했다.
구속구를 해제해도 똬리를 튼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평소에 탐험가에게 쏘아내던,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듯한 적대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제대로 가져왔군. 마법사는 만났나?”
적에 관해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추측대로 내부 파벌 싸움이 맞았다. 앨런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상자를 불렀다.
“보여드려.”
삐―
상자가 머리를 잃은 시체를 앞으로 가지고 나왔다. 로렌조의 눈매가 살짝 올라갔다?
“얼굴은 봤나?”
“보다시피 얼굴을 가리는 헬멧째로 날려버려서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럼 됐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중얼거린 로렌조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사의 몸에 파란 불이 붙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전신으로 번지더니 시체가 재로 변했다.
주변에 어떤 피해도 주지 않고 오직 마법사만 태웠다. 극한의 마력 통제력 그리고 은밀성도 갖췄다는 뜻이었다.
로렌조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서 던지고, 앨런이 놓친 주머니를 상자가 집어 들었다.
“볼일 끝났으니 갈 길 가지.”
“게리 씨는 어떻게 하죠?”
“게리가 누구지?”
“제일 처음에 잡아 왔던 구더기요.”
“도구에게 관심은 없다.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니 마음대로 해.”
로렌조가 나무 위로 훌쩍 올라가고, 앨런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주머니를 열어보자 최고의 무기명채권이라 불리는 마석이 가득 들어있었다.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고 범용성이 굉장히 뛰어났다.
“저번 보수까지 합쳐서 5억쯤 됩니다. 마탑주의 제자면 재벌 2세라 그런지 손이 크네요.”
“용의 보물이라면 억만금을 주고도 사는 사람이 많으니까. 심지어 저건 원시림의 동물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잖아.”
“그리고 조용히 하란 뜻도 있겠죠.”
“네 말이 맞다. 우리도 큰돈 벌었다는 소문낼 필요 없으니 입 다물자. 특히, 너.”
“형제님,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주정뱅이니까 주의 주는 거야.”
“주정이라뇨? 어머님을 뵙기 위한 고행을 그런 식으로 헐뜯으시면 안 됩니다.”
“고행? 간이 단단하게 변하면 힘들긴 하겠네.”
“저는 자기 전에 몸에 치료 성법을 겁니다. 건강 관리를 해야 어머님의 뜻을 오랫동안 널리 전파할 수 있으니까요.”
테일러가 시바 나름의 논리를 뚫을 방법 없어서 혀만 차다가 구더기를 대놓고 응시했다.
“힘들게 데려가게?”
테일러의 말을 들은 몇몇이 움찔거렸다. 인상을 쓰는 놈들도 있으나, 앨런이 매직웨어를 건드려서 반항은 곧 죽음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이 있는데 미궁의 비료로 만드는 건 너무 편한 처사죠.”
“앨런 형제님 말이 맞습니다. 어머님도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요. 이제 제법 탐험가 티가 나지 않습니까?”
“단어 선정이 너무 저렴한데.”
“테일러 형제님이 평소에 쓰는 말을 기억했다가 따라 한 겁니다.”
“최고의 선택이야. 비속어나 은어도 섞어줘야 무시당하지 않지.”
“입단 희망자가 이렇게 많으니 알라나 수녀님이 좋아하시겠군요.”
테일러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가, 마약 카르텔을 처리할 때 봤었던 수녀를 떠올렸다. 저승사자처럼 검은 차를 타고 온 수녀의 인상은 굉장히 강했다.
“그···, 위협적으로 생긴 수녀?”
“형제님···.”
“흠, 흠.”
“사실 그분도 사나운 외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긴 합니다. 범죄자들이 말을 잘 듣는다고 좋아하시더군요.”
“머리에다 폭탄 심어놔서 그런 건 아니고? 그 수녀는 헤드헌팅이 업무냐?”
“네. 사냥도 하고, 각 지부에 보내기 전에 강도 높은 정신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뇌 확장 장치를 건드렸으니 그냥 명령하면 되잖아.”
“자신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성도 하고, 어떻게 해야 죄를 희석할지 알 수 있습니다.”
“희석?”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피를 토하는 노력을 통해 희미하게 만들 수는 있지요.”
지상으로 올라가자 요새를 지키는 군인들이 구더기의 정체를 알고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그래도 시바가 나서서 이야기하니 딱히 건들지는 않았다.
알라나는 이번에도 연락하자마자 검은 벤을 타고 나타났다. 구더기들을 트럭의 짐칸에 구겨 넣더니 엄지를 치켜세우고 사라졌다.
군인들은 납치의 현장을 목격하고도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몇몇은 웃으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분리수거 해주니 좋아하네. 수녀는 배부른 암사자 같은 표정이던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시바가 넘치는사랑병원에 오랜만에 보고하러 들러야 한다고 하고 사라지자, 테일러가 앨런의 등에 손을 댔다.
“몸 상태가 괜찮은지 검사하러 가야지. 빨리 가자. 내가 끌어줄 테니 아예 수레에 탈래?”
“어디를 그리 급히 가세요?”
“웨스턴스카이.”
“거긴 병원이 아닌데요.”
“일단 공기부터 말도 안 되게 좋고, 식물이 가득해서 심신의 안정에 도움도 되고, 처방하는 약은 식물 추출이라 몸에 잘 맞고, 주인은 웬만한 의사 뺨치는 실력을 지녔고···.”
“알겠어요. 가요.”
앨런은 이대로 두면 말이 끊이지 않을 거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도 많이 받았겠다, 탐험가들이 애용하는 대형 택시를 불러서 웨스턴스카이로 향했다. 내부로 들어가자 페어리들이 상자와 표범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거 뭐야?”
“오토마톤이야!”
“오토마톤이 뭔데?”
“나도 몰라! 얘는 다쳤잖아!”
“그런데 움직여!”
표범이 시끄럽게 재잘대는 소리에 반응해서 머리를 움직이자, 페어리들이 화들짝 놀란 새처럼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오토마톤이 뭐냐고 질문했던, 파란 나비 날개의 페어리가 앨런의 어깨에 앉았다.
“우리 잡아먹어?”
“아니.”
“그럼 쟤는?”
페어리의 작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상자가 집게발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괴물이야! 도망쳐!”
“그만.”
앨런이 명령하자 상자가 집게발을 내리고 카메라 아이만 움직였다.
“왜 멈춰? 재밌었는데!”
술래잡기로 생각했었는지 페어리들이 앨런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그러다가 동시에 한쪽을 보더니 포르르 날아갔다.
식물이 좌우로 열리며 요화가 나타났다. 다채로운 색이 가득한 정원에서도 그녀의 검은 머리는 뚜렷하게 보였다.
“일하다 말고 어디로 갔나 했더니···.”
“누님, 평안하셨습니까?”
“너도 건강해 보이네.”
요화는 테일러와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앨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황제도롱뇽의 등에서 얻은 씨앗입니다. 시체도 가져왔어요.”
“멸종위기종이라 생각을 못 했는데 미궁에는 있었구나. 따로 분류한 씨앗은 무엇이니?”
“이건 제 몸에서 수확한 씨앗입니다.”
“뭐?! 그런 짓을 왜 했니?”
요화가 뾰족한 소리를 내자 주변 식물이 부르르 떨었다. 앨런은 어려운 상대를 만나서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했던 경위를 설명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나는 사람 실험은 안 해.”
“넝쿨 침대에 눕혀놓고 조사나 임상시험은 하시잖아요.”
“적법한 절차대로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임상시험이 아니라 검진이라고 해줄래?”
요화가 손뼉을 치자, 넝쿨이 튀어나와서 앨런을 강제로 눕혔다. 고개를 들려고 하니 넝쿨이 요화의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하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일단 검사받고 가. 오래 걸릴 테니 자도 되고.”
“그래, 푹 자렴.”
테일러도 한마디를 보탰다.
달아났던 페어리들이 나비 날개를 열심히 팔랑이며 촉촉해 보이는 하얀 버섯을 들고 왔다.
넝쿨 침대 위에 올려놓자 버섯이 하얀 포자를 뿌렸는데, 신기하게도 앨런의 몸에만 안착했다. 그러자 몸이 편안해지고 눈도 저절로 감겼다.
앨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투명한 지붕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깜깜했다.
앨런이 상체를 일으키자 웃는 소리가 끊기고, 테일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일어났구나? 더 자도 되는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얼른 데려가.”
“누님, 다음에 봅시다.”
“그래. 조심히 돌아가고. 아, 그 전에. 앨런.”
“네.”
“네 몸에서 키웠던 씨앗은 조사가 더 필요하니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어쩌면 개인 맞춤형 씨앗을 만들 수도 있겠다.”
어둑한 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했다. 비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가끔 관리하기에 예전보다 먼지나 더러움은 많이 줄었다.
소파에 반쯤 누운 테일러가 물었다.
“돈도 많이 벌었는데 뭐 할 거냐?”
“책 사야죠. 파워슈트도 고치고 아이들도 업그레이드하고. 외형은 멀쩡하지만 속은 엉망이라 시간도 필요하고요.”
“나는···.”
“조금만 쓰고 모아두세요.”
“왜?”
“매직웨어 교체하려면 큰 비용이 필요하잖아요.”
매직웨어의 성능이 좋을수록 가격은 제곱으로 치솟았다. 깨달음과 수련에 필요한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격이었다.
“저번에 바꿨는데 또?”
“그래야 빨리 내려가죠. 아저씨의 육체는 생각보다 매직웨어 적합도가 높아서 부담도 없고요.”
“원래 탐험이 끝나면 돈 떨어질 때까지 몇 달 동안 쉬는 게 일반적인 탐험가 생활인데···.”
방문을 열고 나온 시바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대사제님이 계약을 잘못해서 혹사당하냐고 묻더군요.”
“시바도 똑같은 생각이라고 하잖아.”
“그와 별개로 실력이 쑥쑥 느니 신기하다고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수도원처럼 빡빡한 생활이 싫어서 느긋한 파티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저는 이쪽 체질인가 봅니다.”
“들으셨죠?”
“시바, 너마저···.”
테일러는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시바의 사격에 침몰했다.
*
앨런은 별문자 중급 해석본을 모조리 구매했다. 한 달 동안 집에서 한 걸음도 안 나가고 활자를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테일러는 침대에 누워있는 앨런을 보고 책상도 힐끔 쳐다봤다. 거미 한 마리가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앨런, 앉아만 있지 말라는 말이 누워서 보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도 몸을 좀 움직여야지. 정 나가기 싫으면 간단한 체조도 하고.”
몸을 일으킨 앨런이 맥락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카탄이 별문자를 해독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 의미를 몰랐죠.”
“음···. 완전 다른 체계였으니까. 비슷한 문자도, 그림도 없으니 어떻게 구색 맞추기도 힘들었지.”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잘 아시네요?”
“내가 젊었을 때는 카탄이 살아있었거든. 심심하면 신문이나 뉴스에 대서특필 되어서 찾아보긴 했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카탄 본인의 능력으로 해독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어떨까요?”
“그것만 해도 대단하지. 설마?”
“어쩌면 용의 도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직접 만났다기보다는 그들이 남긴 물건을 통해서요.”
“어떻게 알았니?”
“이 눈이요. 용이 남긴 원통에 반응한 걸 보니 그게 확실하겠죠.”
앨런이 왼쪽 눈을 가리켰다.
“제자의 제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대를 이어 만들었거나, 배운 기술을 적용했을 겁니다.”
“그럼 다음 목표는?”
“26층, 테일러 수련법을 찾았다던 유적에 먼저 가보죠.”
< 마법사(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