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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15화 (115/193)

< 골드러시(2) >

24층 평야는 큰 전투 없이 편하게 지나갔지만, 25층은 입장부터 기분 나쁘게 시작했다.

철퍼덕!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무릎까지 물에 잠겼다. 물기를 머금은 흙은 발을 끈덕지게 붙잡아서 기동력에도 제한이 생겼다.

“시작부터 물에 빠트려놓네.”

“아침에 뽀송뽀송하게 말린 수염이!”

“선배는···.”

다양한 반응이 오가는 도중, 앨런은 머리 위로 드리우는 그림자를 따라 뒤를 돌아봤다. 시온이 투명한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온의 키가 갑자기 커졌다. 그건 착각이고, 사실 그녀는 물이 빠지지 않았다. 수면을 밟고 서 있는데, 양발바닥을 중심으로 원형의 잔물결이 일렁거렸다.

발바닥으로 마력을 분사, 물을 밀어내며 몸을 띄웠으리라. 이런 일도 마법을 만들거나 개량해서 해결하는 마법사와 달리, 일단 몸으로 해결하는 육체수련자다웠다.

“경험의 산물? 아니면 노하우를 배운 건가요? 대단하군요.”

시온의 입꼬리와 어깨가 동시에 올라갔다. 가벼운 칭찬에도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자매님은 칭찬을 좋아하는군요.”

“시바는 싫어?”

“아뇨. 저도 칭찬을 들으면 어깨가 들썩거립니다. 진심 어린 찬사를 싫어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노닥거리지말고 좀 도와라. 뗏목 만들어야지.”

테일러의 마나소드가 나무에 파고들 때 즈음, 시온과 앨런이 거의 동시에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흙이나 나뭇잎 등의 부유물 때문에 속내를 알 수 없는 물 표면에 무언가 불쑥 튀어나왔다. 노란 바탕에 길게 찢어진 검은 동공이 잠망경처럼 이쪽을 주시했다.

무언가가 물 밑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자 물이 아래로 쫘악 쏟아졌다. 분명 멀리있음에도 원근감을 무시하는 크기였다.

푸루스사우르스. 원시림에 사는, 몸길이 10m 이상의 거대 악어였다. 녀석의 무게는 5톤가량이다. 1톤 트럭이라 불리는 차의 무게가 2톤 근처니, 덩치가 얼마나 큰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무자비한 포식자가 돌진했다. 중량만 따져도 운동량이 어마어마해서, 평범한 사람을 앞에 세워놓으면 충돌 후에 문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된다.

녀석은 물에 사는 생물답게 늪지의 환경에 구애받지 않았다. 물론 이쪽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은 악어 고기다.”

“형제님, 튀김 됩니까?”

“여기가 술집인 줄 알아? 계란도, 밀가루도 없는데 당연히 안 되지. 비계를 사용해서 구울 테니 그걸로 만족해.”

사냥을 준비하는 둘의 앞으로 시온이 나섰다. 그녀의 발이 지나간 곳에는 잔물결이 남아있었다.

“네가 처리하게?”

“밥값이야.”

무릎이 살짝 굽혀지고 잔물결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그녀의 모습이 보였을 때는 이미 악어의 머리 위에 검이 심겨 있었다. 바위에 꽂힌 어떤 검을 뽑는 왕처럼 무기를 회수하자 붉은 피가 악어의 질긴 가죽을 따라 흘러내렸다.

시온이 악어의 꼬리를 끌고 돌아왔는데, 그러면서도 발은 여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았다.

“빠르기도 하지. 기록은 잘 되니?”

“네. 확실히 선배에게 부탁하길 잘했습니다. 그 어떤 대조군보다 뛰어나군요.”

“대조군? 센서 붙인 사람이 또 있어?”

앨런이 잠시 멈칫거렸으나, 다행히도 시온이 가져온 악어 덕분에 테일러의 주의가 그쪽으로 향했다.

‘파동이 선배의 기본이야.’

그녀가 몸을 다루는 시작과 끝. 가끔 부는 휘파람은 박쥐의 초음파처럼 주변을 파악하고, 육식동물의 으르렁거림처럼 사냥감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효과를 지녔다.

원래는 추측만 무성했으나, 허락받고 센서를 붙이게 되면서 명확해졌다. 물론 아는 만큼 모르는 영역도 늘어났다.

‘파워슈트를 조정하면 30% 정도는 따라 할 수 있겠어.’

작은 수치로 보이지만, 앨런의 예상대로만 흉내 내도 매우 훌륭했다. 그만큼 시온의 움직임에는 인지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신기한 사람이 참 많아.’

더 깊이 내려갈수록 저런 탐험가 혹은 괴물을 만날 확률이 높아졌다. 앨런에게는 관찰을 통한 정보 습득 자체가 즐거울 따름이다.

앨런은 죽어서도 위압감을 풍기는 거대한 악어를 보며 룬펜을 꺼냈다. 가죽이 단단해서 룬문자 그리기 좋았다.

[부유]와 [부력]을 새기자 시체가 물 위로 붕 떠올랐다. 악어를 통째로 사용해서 만든 뗏목이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4명이 타도 남네요.”

“저녁에 먹을 건데? 음식으로 장난치면 안 돼.”

“이러면 됩니다.”

앨런이 [보존]을 크게 새겼다.

“냉장고나 시간 계열 마법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원시림에서도 3일은 멀쩡할 겁니다.”

“충분하고도 남지.”

테일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앨런이 말한 3일은 썩기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갓 잡은 싱싱함을 유지하는 기간이었다.

같은 룬문자라도 누가 그리냐, 마력을 얼마냐 불어넣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앨런은 뇌 확장 장치에 기대서 수리만 할 줄 아는 마법공학자와 달랐다. 굳이 설명하면 같은 운전자인데, 앨런은 차량의 부품도 직접 만들고, 개조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어는 홀쭉해졌고, 반대로 탑승자들의 배는 든든해졌다. 특히 시온이 대만족했다.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프랑수아나 제이크가 밥 안주대?”

“회장님을 이름으로 불러?”

시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손에 들린 포크마저 위협적으로 보였다.

“퇴사했잖아. 월급 주는 사람도 아니니 그냥 동네 아는 사람이지.”

“아···.”

시온이 바로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분은 이상한지 못마땅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늘같이 떠받드는 회장이 누군가에겐 단순한 아저씨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짧은 여정을 함께한 악어를 일별하고 26층 도착했다. 이젠 테일러가 길을 안내할 차례였다.

“유적이 어딨더라. 엄지손가락처럼 불쑥 솟은 봉우리를 지나서···.”

앨런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이동하는 도중에도 머릿속에 연구실을 펼쳤다. 시온이 있으니 정찰은 그녀에게 맡기면 됐다.

그러다가 멈춘 테일러와 살짝 부딪쳤다.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다친다.”

“왜 멈추셨어요?”

“저기 보이지? 이것 참···.”

테일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산 아래를 가리켰다. 천막이 여기저기 서 있고, 그만큼 탐험가의 수도 많았다.

“유적은 원래 숨겨져 있었다고 하셨죠?”

“그랬는데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저렇게 뿅 하고 나타났구나. 그러니 구더기 놈들도 아지트로 사용했겠지.”

천막 중심에는 어두운색 계통의 작은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문으로 탐험가들이 드나들었다.

“저게 전부는 아니고 빙산처럼 지면 밑으로 깊이 묻혀있어. 그런데 저걸 어쩌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네요. 원시림 생물을 길들여서, 그것도 하필 사람이 많은 23층에서 타고 다니니 소문이 날 수밖에 없겠죠.”

용의 유물을 얻은 에셀 마탑이 철수하고, 귀찮게 구는 구더기도 궤멸 상태였다. 평소에는 26층을 빠르게 지나치는 탐험대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보물에 눈이 먼 사람들이 모였으니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앨런 일행이 아래로 내려가니, 근처의 탐험가가 경쟁자를 보는 것처럼 눈으로 레이저를 쐈다.

천막을 쳐야 할지 바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도중, 덩치 3명이 다가왔다. 골렘 의체까지 장착해서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가운데에 있는 남자가 숫자가 새겨진 철판 조각을 앨런에게 내밀었다.

“어이, 번호표 받아라.”

“번호표요?”

“같이 탐험하는 동료들끼리 마찰이 일어나면 손해지. 그래서 우리 로만 컴퍼니가 유적의 책임자로 나섰다.”

“좋은 일 하시네요.”

앨런이 받으려 하자 덩치가 손을 쑥 빼고 반대쪽 손바닥을 내밀었다.

“우리는 탐험도 포기하고 질서 유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 자발적인 기부가 있으면 힘이 날 것 같은데···.”

“얼마나요?”

“1천만 코인. 마석이나 다른 전리품도 받는다.”

앨런이 고개를 돌려서 상자를 쳐다봤다. 1천만 코인과 유적에서 얻을 수도 있는 지식이 저울에 올라갔다. 앨런의 마음속에 있는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뻔했다.

상자를 손짓으로 부르려는 찰나, 테일러가 앞으로 나섰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꺼져!”

“어이, 늙은이. 손주 재롱 볼 나이인데 왜 여기까지 내려왔지? 혹시 자식 놈이 뒈져버려서? 이거, 내가 아픈 곳을 찔렀군.”

“덩치만 키운 보물 고블린이···.”

보물 고블린은 착용한 매직웨어에 비해 실력이 형편없는 탐험가를 일컫는 은어였다. 왜 보물이 붙냐면 쓰러트리고 매직웨어를 강탈하면 되니까. 근처에 고블린이 있다면 덩달아 광역 피해를 받는 언사였다.

가슴이 매우 뜨거워지는 훈훈한 인사가 오갔지만,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다.

“언제까지 말싸움만 하냐!”

“붙어라! 붙어라!”

구경꾼이 너무 많고,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이니 이 악물고 덤빌 필요도 없었다.

앨런은 끝나지 않는 대립에서 눈을 돌렸다. 피라미드 주변은 로만 컴퍼니 소속 탐험가들이 통제 중이었다. 워낙 악명 높은 단체라 다른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그래서 순서를 무시하겠다고? 먼저 온 탐험가들이 있으니 차례를 지켜라!”

그렇게 외친 덩치가 한발 물러섰다. 그 효과는 굉장했다. 입장료에 반발했던 테일러는 졸지에 파렴치한 새치기 범이 되었다.

로만 컴퍼니의 전적이 워낙 화려해서 안 믿는 눈빛도 섞여 있었으나, 사람은 이성적이면서도 이성적이지 않았다.

많은 적대감을 느낀 테일러가 몸을 돌렸다.

“그냥 돌아가시려고요?”

“가긴 왜 가. 따라와.”

피라미드에서 멀어지자 테일러가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온,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야지. 브레이커의 이름은 어디에 팔아먹고.”

“시온이 누구야?”

그녀는 어느새 변장을 마친 상태였다. 앨런에게 홀로스킨이 자꾸 들통나는 게 분한지, 이번에는 다른 마도구를 사용했다.

“도플갱어 가면?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여간 로만 저 새끼들은 도움이 안 돼.”

“제가 얼핏 들으니 탐험대마다 입장료가 다르더군요.”

“앨런 네 말대로 만만해 보일수록 비싸게 받아먹겠지. 아마 대기업 탐험대가 왔으면 그냥 들여보냈을 거다.”

“좋은 생각 있으세요?”

테일러가 앨런을 보며 씩 웃었다.

“구더기들이 책을 두는 선반을 발견했다고 했지? 거기까지 가는 길을 누가 뚫어놨을 것 같니?”

“아저씨겠죠.”

“그래, 나다. 그때는 위험한 함정과 괴물도 많아서 다른 길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지.”

“보고 안하고 혼자 먹으려는 노력?”

시온이 내뱉은 말에 테일러가 잠시 움찔했지만, 헛기침으로 양심의 가책마저 털어냈다.

“험!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려는 노력이라고 해주겠니? 어쨌든 유적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있다. 번호표? 좆까라 그래. 언제부터 탐험가가 질서를 지켰다고. 여긴 언제나 선착순이야.”

“그건 맞는 말.”

시온마저 동의했다. 도플갱어 가면 덕분에 주근깨가 생긴 그녀가 앨런을 응시했다.

“마석을 진짜 주려고 했어?”

“돌에 룬문자를 새겨서 속일 생각이었죠. 정직하게 돈 버는 놈들도 아니니 챙겨줄 마음도 없었습니다.”

“잘했어.”

왠지 아이를 칭찬하는 어른의 표정을 짓던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잠깐, 뒷문? 보고서에 그런 정보는 없었어. 고의로 누락시켰어?”

“넌 또 왜 그래? 프랑수아한테 물어봐 수련법의 존재도 아는데 유적도 모를까. 그리고 신고해봐야 공소시효도 지났어.”

“앗!”

시온이 따지려 했으나 테일러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이끼와 덩굴로 몸을 치장한 거대한 암석이 있었다.

“여기가 비밀통로다.”

“신전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증거군요. 동족끼리의 분쟁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종족과의 싸움?”

“우리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테일러가 앨런의 말을 적절하게 끊고 암석을 매만졌다. 10분 뒤, 시온이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언제 돼? 자신감 있게 나서더니···.”

“오랜만이라 그래.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왜 이리 부족한지. 쯧쯧.”

이마에 맺힌 땀과 굳은 표정을 보면, 테일러도 말과 달리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잠시 후,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됐다.”

수십 톤은 가볍게 넘을 듯한 바위가 아무 소리 없이 열리고, 벽돌로 채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 골드러시(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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