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 속 천재공학자-116화 (116/193)

< 골드러시(3) >

비밀통로를 만드는 대표적인 목적은 보통 회피나 범죄다. 범죄가 목적이라면 눈에 띄는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을 테니 제외하면, 회피만 남는다.

암살자 혹은 다수의 집단에 쫓길 경우를 가정했다는 의미다.

앨런은 종이 한 장 끼워 넣기 힘들 정도로 딱딱 들어맞는 벽돌을 매만졌다.

“다른 이유로 통로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평범한 건축물은 아니겠군요.”

“내가 신전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잖아. 게리인가 뭔가 하는 구더기 놈도 그랬고.”

“내부구조에서 경건함이라도 느끼셨나요?”

“난 그런 건 몰라. 대신 집회를 위한 장소 혹은 어떤 의식을 행했으리라 추측되는 방이 존재하니까 하는 말이지.”

“조각상이나 성화는요?”

“그런 건 기억에 없구나.”

둘의 목소리가 비밀통로 내부를 은은히 울렸다.

통로는 어둡지만, 미로나 동굴과 달리 검은 안개가 없어서 헤드 랜턴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로만 컴퍼니의 눈을 피해서 들어왔으니 기왕이면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으니까.

“형제님, 위에서 살피니 탐험가 형제님들을 계속 들여보내던데 어차피 못 알아보지 않을까요?”

“비밀통로에서 나가는 모습만 안 들키면 그러겠지. 이제 다 왔다.”

막힌 길에 다다르자 테일러가 앞으로 나섰다. 들어올 때와 달리, 이번에는 기억이 선명한지 바로 버튼을 찾았다.

벽을 순서대로 누르자, 차곡차곡 쌓여있던 벽돌들이 소리 없이 이동해서 양쪽에 밀착했다.

앨런은 그 안에 어떤 마법적 혹은 기계적 설계가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선배는 뭐가 느껴지세요?”

“아니. 근데 그게 중요해?”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앨런과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심지어 강하기까지 한 그녀가 모르는 신비가 적용되었다는 뜻이다.

마음 같아서는 벽에 딱 달라붙어서 관찰하고 싶지만, 작은 지식에 매달리다가 큰 진리를 놓칠 수도 있어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까 테일러와 로만 쪽 사람이 언쟁을 나눌 때 입장한 탐험가가 10명이 넘었으니, 피라미드 내부에는 경쟁자가 매우 많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어두운 통로 저편이 밝아졌다. 1자 통로라 피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일단 천천히 이동했다.

저쪽도 이쪽을 인식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얼굴이 자세히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선두에 선 탐험가가 입을 열었다.

“아, 뭐야. 또 탐험가잖아. 우린 이쪽으로 갈 테니 따라오지 마슈.”

“로만 새끼들 통제는 개뿔. 사람을 얼마나 많이 집어넣었는지 심심하면 마주치잖아.”

“그 새끼들이 늘 그렇지 뭐.”

그들은 짜증을 부리며 사라졌다. 허탕만 쳤는지 아니면 누가 벌써 물건들을 다 집어갔는지, 그들의 뒤를 따르는 플로팅 왜건은 텅 비어있었다.

테일러가 다시 앞장서며 말했다.

“예전에도 텅 비어있었으니 놀랍지도 않아.”

“수련법을 찾았다는 방에 먼저 가보죠.”

“그건 이쪽이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흘렀는데도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구나.”

그 말대로 테일러는 복잡한 교차로가 나와도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반구형 천장을 지닌 동그란 방이었다. 네 방위로 통로가 뚫려있어서 어디에서든 들어올 수 있었다.

“또? 영감님, 우리가 먼저 왔어요.”

“주워 먹을 것도 없어 보이니 그냥 같이 있지?”

“하나같이 뻔뻔해서는···.”

먼저 도착했던 탐험가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꺼지라고 위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테일러의 말대로 아무것도 못 찾았다는 의미였다.

앨런은 방의 벽면에 새겨진 조각을 살폈다. 통로가 4개라 벽도 4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2개에는 용이, 나머지에는 드래곤이 새겨져 있었다.

‘분명 조각이 없다고 하셨는데···.’

테일러의 발언은 불쑥 솟아오른 호기심에 떠밀려 사라졌다.

돌조각임에도 비늘 하나하나가 광택을 내뿜었고, 발톱은 무엇이든 꿰뚫을 듯 살벌했으며, 부리부리한 눈에는 생명력마저 느껴졌다.

심지어 앨런이 움직이면 용의 눈동자도 따라왔다. 진짜 움직이는 건 아니고 착시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흥미로운데.’

특히 앨런이 주목한 점은 용과 드래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겨진 사람의 형상이었다. 사슴뿔의 용과 날렵한 드래곤의 밑에 새겨진 사람들은 춤을 췄고, 양 뿔의 용과 쌍두 드래곤의 밑에 새겨진 사람들은 엎드려있었다.

‘선함과 악함? 공존과 지배? 보상과 처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결론 내릴 수는 없었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탐험가들이 떠나가고,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를 두드렸다.

“벽에 새겨진 조각 말이다.”

“말씀하세요.”

“내가 예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에셀 마탑은 이걸 보고도 철수했다고?”

“철수하고 난 다음에 생겼든지,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겠죠. 소문이 났을 텐데도 탐험대를 안 보냈으니 후자 같습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테일러가 앨런의 어깨를 감싸고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입을 열기 전에 잠시 뒤를 돌아봤는데, 시온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중요한 얘기니 저리 가.”

“너무해.”

“너무하긴. 다른 놈들은 네가 불쌍한 표정 지으면 홀리겠지만, 나한테는 어림없어.”

테일러의 손짓에 시온이 반대쪽 벽에 가서 붙었다. 그러면서도 귀는 이쪽을 향했다.

“안 되겠다. 거미로 연결해서 말하자.”

앨런의 등에 매달려있던 거미가 테일러의 어깨로 옮겨가서 케이블을 목 뒤 포트에 꽂았다.

[들리지?]

[네.]

[처음에는 유적이 나타나서 흥미 때문에 오자고 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조각을 보니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로렌조 씨에게 건넨 원통을 처음 만졌을 때, 정체불명의 별문자가 나타났습니다. 해석본 중급을 모두 뒤졌는데도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었죠. 그런데 아저씨가 알려준 수련법에는 반응했습니다.]

[음···. 건진 건 있니?]

[아뇨.]

[천천히 해라. 탐험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시시한 분야였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매달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네.]

거미가 다시 앨런에게 돌아왔다. 시온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려달라고 무언의 눈빛을 발사했지만, 앨런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흥!”

“저, 저. 애도 아니고···.”

시온이 아이처럼 성질내는 모습에 테일러가 혀를 찼다.

주변을 둘러보던 앨런은 원래도 인자한 얼굴이지만 훨씬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시바를 발견했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이유 모르는 흥겨움이 샘솟고 있습니다. 어쩌면 컨디션이 굉장히 좋은 날인가 봅니다.”

“성수 마셨나 확인해봐.”

“테일러 형제님, 그런 편견은 좋지 않습니다. 성수가 마음의 양식인 건 사실이지만, 제가 아무 때나 마시겠습니까?”

“맞아.”

시온이 시바의 편을 들자 테일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그그긍!

방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원시림에 자연현상이 발생하긴 해도, 지진은 여태껏 관측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건 피라미드 자체에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시온이 눈을 감자, 그녀를 중심으로 강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어. 서둘러.”

이번에는 시온이 선두였다. 지금껏 지나왔던 길을 빠르게 역주행했다.

비밀통로 앞에 도착하자 테일러가 벽을 눌렀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옆으로 나와.”

테일러가 비키자마자 은빛 호선이 그 자리를 채웠다. 눈으로 보기 힘든 속도의 연격이 벽돌을 긁어내려도 매끈한 표면 그대로였다.

“이익!”

발끈한 시온이 훨씬 찬란한 검기를 뿜어냈지만, 앨런이 그녀를 만류했다.

“파괴 가능한 유적이 있고, 아닌 유적도 있죠.”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위에 출입구가 있으니 이번에는 그쪽으로 가요.”

앨런의 말대로 위로 향했지만, 보이는 건 안절부절못하는 탐험가들과 가로막힌 문뿐이었다.

피라미드 상부에 존재하는 문이 모두 닫혀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흙에 가로막힌 상태였다.

“흙 주제에 왜 이리 단단해.”

“왜긴. 미궁이니까.”

보기엔 부드러운 흙이지만 검으로 긁어도, 총으로 쏴도, 마법을 날려도 변화가 없었다.

“어떤 새끼야?! 도대체 뭘 건든 거야?!”

누군가의 고함이 통로에서 메아리쳤지만 공허할 뿐이었다.

앨런은 차분한 마음을 유지했다. 여기에서 바로 빠져나갈 능력은 없어도, 1백 년 넘게 쌓인 통계를 믿었기 때문이다.

미궁에는 침입자를 배제하는 함정과 괴물들이 사방에 널려있으나, 모순되게도 활로는 무조건 존재했다.

‘학자들이 아직도 미궁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이유지.’

자격을 시험한다기엔 너무 위험했고,

무언가를 보호한다기엔 길이 존재했다.

앨런의 상념은 웅성거림에 의해 깨졌다.

“모두 아래로!”

“로만 놈들이 통제하던 장소에서 사달이 났겠지.”

“개새끼들. 다 뒤졌다.”

로만의 인원보다 실력이 떨어져도, 숫자가 용기를 심어줬는지 용기백배한 탐험가들이 아래로 내려갔다.

“마침 잘 됐어. 예쁘게 썰어줘야지.”

“···?”

앨런은 시온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쁘다와 썬다는 말이 공존할 수 있는지 잠시 고민했다. 시선을 눈치챈 시온이 변명하듯 말했다.

“죽인다는 뜻은 아니고 팔다리만 슥삭. 무슨 말인지 알지?”

“다짜고짜 그러지 말고 상황을 보면서 집행하시죠.”

“그럴게.”

시온이 순순히 수긍하자, 뒤에서 걷던 테일러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집불통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던 녀석이···.”

“앨런 형제님과 마음이 잘 맞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잘 맞긴, 내가 봐도 극과 극인데. 아니면 둘 다 천재라 그런가?”

“네?”

“그동안 원숭이만 보다가 사람을 만나서 반갑겠지.”

“형제님, 비약이 너무 심하십니다.”

“아냐, 네가 몰라서 그래.”

테일러는 제이크 마셜을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태도로 유명한 그의 젊은 시절을.

분명 주위 사람들에게 잘 해줬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 딱 그어져 있었다. 테일러는 그가 가끔 보이던 눈빛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위의 존재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우월감이나 혐오감도 아니었다. 그저 나와 너희는 다르다는, 그런 마음가짐에서 뿜어지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열등감이 빚어낸 기억의 왜곡일 수도.’

테일러는 손바닥으로 양 뺨을 큰 소리가 나게 찰싹 때렸다. 어느덧 탐험가 무리는 로만 컴퍼니가 막아놓은 통로까지 도달했다.

통로 뒤쪽을 보고 있던 덩치 하나가 몸을 돌렸다.

“뭐야? 여긴 통제구역이다! 썩 물러나!”

“누구 마음대로? 꺼지려면 너나 꺼져!”

한마음 한뜻으로 외치니 덩치가 주춤거렸다. 로만 컴퍼니 소속이 일반 탐험가보다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둘이나 상대할 수준이었다. 그러니 수십에 달하는 인원을 어떻게 막겠는가.

이름값도 안 통하자, 쭈그러든 덩치가 몸을 돌려 달아나고, 탐험가들이 뒤를 쫓았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용과 드래곤이 새겨진 커다란 문이 있었다.

앨런이 테일러를 바라보자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는 없던 장소라는 뜻이었다.

덩치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는데, 그 틈을 살짝 엿본 탐험가들이 숨을 멈췄다. 헙! 소리가 매우 크게 들렸다.

“미쳤다!”

“시발! 이거지!”

광란에 빠진 탐험가들이 내부로 돌격했다. 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을 홀린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보물산. 딱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피라미드와 달리 하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방이 보물로 가득했다.

앨런은 잠시 시바를 쳐다봤다.

‘이래서 기분이 좋아 보였나?’

그게 맞다면 살아있는 금 탐지기나 다름없었다. 노예가 명문화된 시절이었다면 막대기에 꼭꼭 묶여서 탐지기 대신 끌려다녔으리라.

보물 한가운데에서 희희낙락하던 로만의 탐험가들이 호통을 쳤지만.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나?”

“진짜 한 판 붙어?”

황금에 마음을 빼앗긴 탐험가들의 기세를 찍어누를 순 없었다.

그러나 금빛이 붉게 물들진 않았다. 워낙 보물이 많으니 암묵적 합의를 통해 서로에게서 등을 돌렸다.

“우리도 얼른 챙기자.”

“잠시만요.”

앨런은 한곳을 쳐다봤다. 건드는 사람도 없는데 금화가 홀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짤랑 소리를 내며 금화가 사방으로 흩날리더니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동상이 튀어나왔다.

퐁!

미리 대비하고 있던 앨런이 마탄을 날려서 탐험가를 구해줬다. 마탄의 폭발에 휩쓸린 동상은 금화로 변하며 무너졌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라는 건가.”

앨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물산 곳곳에서 동상이 몸을 일으켰다. 크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으나, 끝을 모르고 계속 나타났다.

앨런의 앞에도 황금창을 든 동상이 나타났다. 앨런은 시온의 동작을 시연할 기회라 생각했지만.

휙 하고 관심 없다는 듯 지나친 녀석은 시온과 시바만 공격했다.

“어, 어. 형제님?”

“얘들 이상해···.”

등을 보인 동상 하나를 부순 테일러가 미간을 좁혔다.

“왜 이러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죠. 테일러 수련법 때문에 우릴 아군으로 인식하나 봐요.”

< 골드러시(3)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