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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20화 (120/193)

< 시립대(2) >

렉터의 인상은 희미했다. 생김새처럼 존재감 또한 매우 약해서 멍하니 있다 보면 그가 있다는 사실마저 깜빡할 정도였다.

마력이 너무 많아서 몸이 약한 앨런과 달리, 렉터는 마력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빈약해 보였다.

그의 얼굴도 빛날 때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카페인을 섭취할 때였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넘어가면 그제야 피부가 윤기를 되찾았다.

“내가 진짜 커피 때문에 산다.”

“선호하는 음식으로 활력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죠.”

“그래 봐야 다음에 쓸 활력을 미리 당겨쓰는 거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독한 피로가 또 온몸을 기어 다니겠지.”

렉터는 업무 내용을 알려주기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앨런을 데리고 대학 내부에 입점한 카페를 찾았다. 카페인 충전도 일은 일이었다.

카페는 미궁학과 건물 근처에 있기에, 주차장에서 해부 수업을 듣던 학생도 드문드문 보였다.

커피를 반쯤 마신 렉터가 일어나라고 눈짓을 보냈다.

“처음에는 교수님의 마수에 빠진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피해자요?”

“교수님이 너무 열정적이라 아랫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거든. 좀 설렁설렁해도 되는데 눈치가 보여서···.”

오로스 교수는 심도 5의 실력자. 나이가 많다고 해도 젊은 사람의 활력을 아득히 초월했다. 심지어 몸 튼튼하기로 유명한 오크니 더 할 말이 있을까.

“그래서 많이 피곤하긴 한데, 대신 성과는 좋아.”

“열심히 일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와야죠. 그게 정상입니다.”

“유토피아적인 발언이야. 그리고 내가 한 말 오해하면 안 돼. 교수님은 깐깐하신데 좋은 분이니까.”

“오해할 부분이 있었나요?”

“그럼 됐고.”

미궁학과 건물의 외관은 벽돌로 마감해서 옛 정취를 느끼게 했지만, 내부는 전혀 달랐다. 골렘들이 물건을 옮기고, 학생들은 부양 발판에 몸을 맡기고 빠르게 이동했다.

앨런은 새 형태의 골렘이 운반하는 종이가방에서 커피 냄새를 맡았다. 렉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배달시키면 편한데 그러면 쉴 시간이 없잖아. 내 마음 알지?”

“네.”

“이해한 거···, 맞지?”

“왜 이리 주눅 들어 계세요?”

앨런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렉터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널 보면 왠지 교수님들 같아서 나도 모르게···.”

본능으로 학습했다는 의미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히 많은 고난을 겪어왔으리라.

대화가 끝나자마자, 렉터가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 위치는 미궁학과의 지하, 바로 앞에는 커다란 원형 문이 존재했다.

“여기가 오파츠 보관소야. 능력이 밝혀진 오파츠도 있고, 아직도 불명인 물건도 있지.”

렉터가 문에 손바닥을 대자, 푸른 파동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일종의 보안 확인 절차로, 파동에 담긴 마력은 침입자를 없앨 무기로 바뀔 수도 있었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중성적인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렉터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보물고를 지키는 인공정령이야. 우리는 지능 말고 정령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니 너도 기억해둬.”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죠.”

“잠깐, 잠깐. 여긴 안타깝게도 외부인 출입 금지야.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앨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 안에 수많은 보물이 잠들어있는데, 두 눈으로 즐길 거리가 저렇게 많은데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외부인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괜히 들어갔다가 범죄자 낙인이 찍히면 여러 애로사항이 꽃피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얼굴만 봐도 실망감이 느껴지네.”

렉터가 그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갔고, 앨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 근육이 대체로 축 처진 것 같았다.

잠시 후, 렉터가 큰 상자를 들고 나왔다. 외부에 그려진 룬문자를 보면, 오파츠를 보관 및 운반하기 위해 특수 설계한 물품임을 알 수 있었다.

“외부와의 마력을 차단하기 위한 상자군요. 변조 방지는 중요하죠.”

“오···. 어떻게 알았어? 다른 탐험가들은 오파츠만 들고 다니면 되는데 귀찮게 그럴 필요가 있냐고 묻던데.”

“마법공학도 배우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구나.”

“네?”

“미궁을 탐험하면서 동시에 머리에는 지식을 쌓는 것 말이야. 마법공학자는 지상에서도 알아주는 직업이라 미궁에 내려가는 사람이 적은데, 넌 특이하네.”

“마법사들은요?”

“그 사람들은 소속된 조직을 위해서만 지식을 사용하잖아. 특유의 우월주의도 강하고.”

렉터는 바퀴가 달린 원반 형태의 골렘 위에 상자를 내려놨다. 골렘은 바퀴를 굴리며 뒤를 졸졸 따라왔고, 계단이 나타나면 비행하기도 했다.

“너도 공고를 봐서 알겠지만, 다시 업무를 설명할게. 내가 챙긴 오파츠를 가지고 미궁으로 갈 거야. 마법공학자니 왜 그런지는 알지?”

“오파츠를 실험하기 위해서겠죠.”

“정답이야. 그곳에서만 능력을 발휘하거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날 때가 있거든. 내일 새벽 출발이라 그때 오라고 하고 싶지만,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뭡니까?”

예상과 달리 오파츠를 볼 수 없어서 힘이 빠졌지만, 그렇다고 받은 의뢰를 대충 처리할 순 없었다. 렉터의 말대로라면 조만간 미궁에 내려가서 실컷 볼 테니, 지금은 그의 말을 들어줄 차례였다.

“지금 오토마톤에 대한 커리큘럼이 진행 중이야.”

“혹시 저보고 수리하라는···.”

앨런이 잠시 말을 멈췄다. 오토마톤 수리는 시간 보내기 좋은 취미였다.

“쉽네요.”

“그런 부탁은 아니···.”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렉터가 눈을 돌리다가 씩 웃었다. 본인은 밝게 웃은 것 같아도, 퀭한 표정이 더해지자 음침하게 보였다.

“생각보다 재밌는 탐험가네. 일단, 작동 정지한 오토마톤을 낱낱이 분해하며 어떤 기능을 지녔나 확인할 거야.”

“수리도 하나요?”

“하긴 하는데 네 생각이랑은 좀 다를걸. 학생들도 마법공학을 배우긴 했는데 일선에서 활동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 그래서 룬펜이 아니라 대기업에서 만든 수리키트를 사용하는군요.”

수리키트라고 거창한 물건은 아니고, 단순히 별문자를 미리 입력한 영혼석과 간단한 수리 도구를 담았을 뿐이다. 키트로 수리한 오토마톤은 전투 능력을 거세당한 단순한 기계로 변했다.

“언제 봤어? 아니면 원래 알고 있었어?”

“아까 테라굴라 해부할 때, 학생 하나가 들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눈썰미가 좋구나. 너는 마법공학자니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순 있겠지.”

앨런과 렉터는 실험실이라 적힌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책상 별로 학생 몇몇이 앉아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늑대 형태의 오토마톤들이 오늘의 교보재였다.

렉터가 이것저것 준비를 마치고 창문 쪽으로 바짝 붙자, 오로스 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멀쩡한 외장갑을 맨손으로 뜯어내며 각 기능에 관해 설명했다.

“···그럼 나머지는 렉터 조교가 진행할 겁니다.”

오로스 교수가 나가자마자 렉터가 앞으로 나섰다.

“오늘의 수업 내용은 내가 미리 보냈지. 혹시 못 받은 사람?”

어떤 학생이 손을 들자, 렉터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났다. 뇌 확장 장치를 통한 정보의 전달이었다.

렉터는 그새 어수선해진 교실을 보며 손뼉을 강하게 쳤다.

“자, 집중.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끝내는 순서대로 보내줄 거다. 오로스 교수님이 했던 말 기억하지? 알고만 있다고 지식이 아니야. 외부로 표출할 수 있어야지. 그럼 시작해.”

렉터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뇌 확장 장치를 통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지만, 그게 진정한 습득이던가. 몸으로 완벽히 체현할 수 있어야, 그제야 이해했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마력이 관여된 학문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리고 여기는 온갖 신비가 넘쳐나는 미궁을 연구하는 학과였다.

학생들은 수리키트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도구나 부품을 꺼냈다. 우선 늑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앨런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렉터가 슬쩍 물었다.

“지루해?”

“아뇨.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네요.”

“재밌는 탐험가네.”

구경조차 업무의 일환이었다. 오토마톤을 다루는 자리다 보니, 앨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이유 치고는 설비가 좋은데요.”

앨런은 천장에 붙어있는 동그란 물체에 눈길을 보냈다. 화재감지기 옆에 붙어있는 마도구는 사고가 발생하면 등록된 인원에게 방어막을 부여했다.

“그래도 모든 걸 마도구에게 맡길 순 없지. 이쪽도 행정적인 절차라는 게 있으니까.”

“탐험가보다는 차라리 오로스 교수님이 훨씬 믿을 만하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적재적소가 있는 법이지. 그게 본인이 지닌 가치고. 단순히 말하면 교수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은 값어치가 달라.”

앨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지금 렉터가 내뱉은 말은 냉혹하면서도, 세상을 꿰뚫는 진실이기도 했다.

“내 말이 좀 심했나?”

“아뇨.”

사실 앨런은 별생각 없었다. 지금 당장 뒤처질 수는 있지만, 계속 노력하다 보면 앞서간다는, 아니, 큰사람이 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추월도 좋지만, 함께 가도록 해라.’

‘왜요?’

‘넌 사람이니까. 혼자 살 수 있겠니?’

그게 부모에게 배운 삶의 방식이었다. 한때는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웠는데 이제는 매우 괜찮아졌다.

마침 늑대 하나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좋아했지만.

‘글쎄···.’

앨런이 보기에는 영 아니었다. 우선 느껴지는 기세가 거칠었고, 마력은 인공 근육에 주로 몰려들었다. 저건 공격을 하겠다는 신호였다.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앨런이 해킹으로 별문자를 헤집자, 늑대가 풀썩 무너졌다.

여유 시간을 꿈꿨던 학생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실패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흠···.”

렉터는 묘한 눈길로 앨런을 쳐다봤다.

“플러스 1점.”

“···?”

“자체 평가니 너무 신경 쓰지 마.”

말을 마친 렉터는 손을 번쩍 든 학생에게 다가갔다.

“렉터 형, 다 했어요.”

“마이너스 1점. 조교님이라고 불러.”

“또 이상한 소리···. 혹시 어제도 밤새웠어요? 그러면 빨리 죽는다니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기 마련이었다. 앨런은 고개를 돌려 다른 학생들이 잘하고 있나 확인했다.

*

다음날 새벽, 앨런과 렉터 그리고 학생들이 미궁에서 만났다.

“오로스 교수님은요?”

“어제 내려가셨어.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마.”

렉터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탐험가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앨런처럼 이번 의뢰를 받았다.

“목적지가 8층이니 너무 어렵지도 않을 테고. 그나저나 파워슈트가 멋지네.”

탐험가라고 하기엔 호리호리한 인상이었던 어제와 달리, 지금의 앨런은 굉장히 듬직했다. 학생들도 그 차이를 느꼈는지, 이쪽을 보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뒤에 따라온 오토마톤은 뭐지? 처음 보는 녀석인데.”

“제가 만들었어요. 주로 운반을 담당합니다.”

표범은 아직 작업이 덜 끝나서 집에 남겨놨다. 테일러가 안 그런 척하면서도 가끔 먼지를 털어주니, 아무 문제 없으리라.

“별문자의 조예가 깊구나. 어제 해킹했던 것도 그렇고···.”

“아셨네요.”

“내가 미궁학과 조교야. 아무나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아?”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오로스 교수가 애송이를 조교로 데리고 다닐 리가 없었다.

렉터는 플라스틱 원통을 닮은 오파츠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주사기 배럴처럼 생긴 오파츠 보이지? 이번에 갈 장소에서 찾았어. 마석에서 뽑아낸 마력을 바로 액화 마력으로 변화시키더라. 거기에 가서 이것저것 실험해볼 거야.”

앨런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저 오파츠는 생명체의 생명력을 뽑아내서 마력으로 변환하는 물건이었다. 지금은 다른 파츠가 소실되어서 제 기능을 못 하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약 같았다.

< 시립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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