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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21화 (12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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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까지 내려가는 길은 쉬웠다. 원시림의 중반도 가뿐히 넘기는 앨런에겐 오토마톤이 너무 약했다.

정확히 말하면 디테일이 부족했다. 오토마톤의 금속 육체가 지닌 단단함만은 원시림 생물의 몸과 비슷했으나, 움직임이 뻔했다.

생물이 지닌 관절의 한계를 넘어서면 뭐하나. 살의가 없으니 정신적 압박도 없고, 포악함과 교묘함이 빠진 공격은 귀여웠다.

여유가 생긴 만큼 좋은 연습 상대긴 했다. 시온의 움직임에 익숙해질 시간이었다.

파워슈트에 입력했으니 알아서 동작을 재현해주겠지만, 부담을 감당해야 할 사람은 앨런이었다.

실전에서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얼마만큼의 반동이 올지 정확히 파악한다면, 충격 흡수장치나 룬문자로 보강하기 편했다.

‘지금이 선배의 15%.’

앨런의 몸이 전례 없는 속도로 튀어 나갔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면서도 매우 날랬다.

아르마딜로를 닮은 녀석은 적을 발견하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물론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위해서. 단단한 금속 구체 표면에 흉악한 돌기가 솟아올랐다.

녀석이 구르기 시작하려는 순간, 이미 도착한 앨런이 발바닥으로 녀석의 움직임을 막았다. 가시를 피해 가볍게 밀었고, 잠시 공백이 생긴 순간에 자세를 잡아서 발등으로 강하게 때렸다.

졸지에 축구공이 된 녀석은 뒤를 따르던 오토마톤들의 진형을 무너트렸다. 그 사이로 파고든 탐험가들이 마력로 주위의 회로를 끊으며 전투는 손쉽게 끝났다.

앨런은 찌르르 울리는 뼈와 근육을 달랬다. 나름 조절을 했기에 망정이지, 최대치인 30%까지 흉내 냈으면 근육이 파업할 수도 있었다.

‘30%여도 대단하지. 그 정도만으로도 예전에 상대했던 마법사를 압살하니까.’

사실 30%도 앨런의 추측일뿐, 시온의 진짜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몰랐다. 애초에 피라미드까지의 여정에서 나타난 적들은 그녀의 진심을 끌어내지도 못했으니까.

‘왼쪽 다리에 균형조절기를 더 부착하면 되겠어.’

앨런은 자체 피드백까지 마치고 다시 길을 걸었다. 막다른 통로에 도착하자 렉터가 벽을 이리저리 눌렀다. 그럴 때마다 일정 부분이 쑥쑥 들어갔다.

미로와 동굴에서 가끔 발견되는 비밀통로였다. 지금은 대학 인원이 내부에 있어서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두 빠져나온다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안개가 사라졌다. 덕분에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확인할 순 있었다. 현대의 건축물과 유사한 건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단순히 비밀통로에 숨겨진 공터라고 치부하기엔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다.

사람들이 도착하자 오로스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렉터 군 그리고 탐험가분들 고생했어요. 일단 쉬고, 학생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앙탈과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오로스가 그런 것에 눈이나 깜빡할 사람이던가. 오히려 귀엽다는 듯 웃었다.

“즐거워하니 저도 흥이 나는군요.”

앨런은 터덜터덜 걸어가는 학생들을 보다가 렉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세요?”

“배움에는 끝이 없는데 이런 장소까지 와서 저러니 한심해서. 오히려 즐거워해야 정상 아닌가?”

“그러니까요.”

“너라면 공감할 줄 알았어.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럼 자유시간이니 교수님이나 따라갈까요? 이 유적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네요.”

“좋은 생각이야.”

탐험가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봐 천막이 있는 구역으로 황급히 걸음을 내디뎠다.

오로스는 학생들을 이끌고 어떤 건물에 들어갔다. 무너진 벽이 문의 역할을 대신해줬다.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는 계단식 좌석들과 제일 아래에 있는 단상이 보였다.

계단 중간쯤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죠?”

아무런 대답이 없자 눈을 피하려는 학생 중 하나를 콕 집었다. 안경을 쓴 학생이 더듬더듬 말을 했다.

“···국회의사당을, 닮았네요.”

“맞아요. 상원 의회와 비슷하죠.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주변을 탐사하다 보니 견해가 바뀌었어요. 여기는 학교입니다. 여러분들처럼 배움에 열정을 지닌 학생들이 언제인지도 모를 시기에 여기에 앉아있었을 거예요.”

총명한 눈의 오크가 두꺼운 손가락으로 멀쩡한 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건 낙서가 아니라 지하인들이 사용하던 글자입니다. 물론 우리는 알아볼 수 없죠. 그래도 여기가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는 알았으니, 상상 정도는 가능해요.”

오로스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여기는 교육의 장이니, 저 글귀도 그에 걸맞은 문구일 거라고.

앨런의 생각은 달랐다. 추측할 필요 없이 글자가 보였으니까.

[급식이 이게 뭐냐? 우리 집 늑대가 훨씬 잘 먹는다!]

[요즘 저학년은 기본이 안 됐어.]

[응. 니들도 똑같아.]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똑같은 것처럼, 지하인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도 한때는 괴물이 아니라 지성체라는 의미였다.

‘이 모든 것이 미궁 창조자의 속임수가 아니라면···.’

앨런은 가장 중요한 대전제를 되뇌었다. 만약 창조자의 장난이라면 지금껏 쌓아온 학술 지식은 쓸모없는 휴짓조각이 되었다.

‘그래도 마법공학은 남으니 괜찮···. 아니지.’

지식에 우열은 없었다. 쓰임새가 다를 뿐, 하나하나가 모두 귀중했다.

“재밌지?”

“네?”

앨런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미소를 살짝 머금은 렉터가 보였다.

“수업이요? 오로스 교수님의 말은 들을 때마다 흥미롭네요.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흠···.”

렉터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앨런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읽을 수 있는 글자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섞여 있었다.

‘표의문자? 표음문자?’

굳이 따지자면 표음문자에 가까우나 이상하게도 해석할 수 없었다.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게 보이고, 그렇게 느껴졌다. 미궁의 신비가 시각뿐만 아니라 뇌까지 간섭한다는 의미였다.

‘언어의 계급, 미궁의 신비.’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앨런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마법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까.

그래서 신비라고 불렀다. 상식을 벗어나고 이해할 수 없는.

지하묘지에서 얻은 지팡이 표면에 새겨진 문자 역시 앨런의 이해를 벗어났다. 묘비에 새겨진 문자가 옮겨졌으니, 분명 사람 이름일 텐데 읽을 수가 없었다.

‘내려가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앨런도 이럴진대 다른 학자들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문자를 알 수 없으니 직접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오파츠는 실전 같은 실험이 제일 중요했고, 그런 이유로 미궁에 내려와야 했다.

‘잠깐, 학교? 학교에서 생명력을 마력으로 치환하는 마도구를 만들었다고?’

앨런은 잠깐 고민했다. 지상에도 대학마다 연구실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대학은 배움의 전당이자, 학술의 발원지기도 하니까.

예전에 흑마법사를 만나며 생명을 다루는 기술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서 그렇지, 원래 기술은 사용자에 따라 선악이 갈렸다.

흉악해 보여도 세상을 평안하게 만들고, 엄청 부드러워 보여도 속에는 칼날을 숨겼을 수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폭탄을 만들다가 개발한 마력융합로, 치료마법의 공격적인 사용 예시인 암세포 생성이었다.

오로스의 수업은 계속됐다. 그는 실전에서 배운다는 지론을 지닌 만큼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무언가를 계속 지시했다.

초반에 모험을 같이했던 금발의 칼슨에게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룬문자를 찾아서 전부 기록해오세요.”

곱슬머리 밀리엄에게는.

“이곳에서 출몰하는 오토마톤을 조사하세요. 학생들만으로 버겁다면 탐험가분들에게 요청해서 도움을 받으세요.”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다른 탐험가들은 지루해했지만, 앨런에게 여긴 천국이었다.

“지식이 최고죠.”

“생각이 똑같구나. 아주 좋아. 더 많은 지식, 더 큰 힘!”

렉터는 앨런과 비슷한 부류였다. 가끔 나사 빠진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식의 대악마가 있으면 영혼이라도 팔았을 거야.”

“그런 악마도 있나요?”

“없지. 그러니 내 영혼이 무사한 거고.”

“사실 가능하면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는 게 좋죠. 내 영혼의 주인이 바뀌면 지식의 소유권도 넘어가니까요.”

“다른 방법이야 많지.”

“그래요?”

“흑마법에서 보통 그런 걸 다뤄. 근데 그건 알아야 해.”

렉터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음영이 드리웠다. 퀭한 얼굴에 그림자까지 더해지니 음모를 꾸미는 악당 같았다.

“흑마법 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사람을 상대로 사용하면 바로 수배가 걸려.”

“다른 마법으로도 사람을 해칠 수 있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래도 사회의 통념상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흑마법을 사용하려면 주의해.”

“배우지도 않았는데요.”

“며칠 지켜봤는데 너라면 뭐든 빠르게 배우겠지. 그게 흑마법이든, 마법이든, 정령술이든.”

앨런과 렉터는 매일 붙어 다녔다. 렉터가 아예 오로스 교수에게 요청해서 전담 호위로 변경하기도 했다.

“경쟁자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해자도 중요하죠.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오로스는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줬다.

승인까지 받은 렉터의 조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로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아직 탐험이 덜 된 장소만 골라서 다녔다.

앨런은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잔해 밑에서 계단을 발견했다. 탐험가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소였다.

“가자. 사람 기다릴 필요 있어?”

렉터가 팔찌를 매만지자 푸른 빛이 흘렀다. 그의 존재감은 옅고 얼굴은 피곤으로 찌들었지만, 알고 보면 심도 3의 실력자였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웬 문이 보였다. 앨런이 다가서자 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두 사람이 내부로 들어가자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설마?”

화들짝 놀란 렉터가 가까이 다가가자 문이 다시 열렸다. 일종의 자동문이었다. 렉터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 사이, 앨런이 표지판을 보고 있는데 렉터의 콧소리가 들렸다.

“흠···.”

“또, 왜 그렇게요?”

버릇인지 가끔 저런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가늘게 뜨고 앨런을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지만, 밝힐 의사가 없는 듯했다.

두 사람은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앨런은 마주치는 표지판을 눈에 담았다.

‘휴게실, 보관소, 통제실···.’

그러다가 육중한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문은 출입구와 달리 가까이 접근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앨런이 문 위에 쓰여 있는 글자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렉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보이는구나?”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 척하려고? 저기에 적힌 글자는 ‘생물 연구시설’이라는 뜻이잖아.”

앨런은 갑작스러운 발언에 할 말을 잃었다. 렉터도 유적에서 지식을 부여받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

“내가 며칠 동안 지켜봤는데 확실해.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마. 알고도 숨기는 사람은 의외로 있어. 한 줌에 불과하지만 나도 그중 하나고. 이른바 선택받은 자들이지.”

“선택이요?”

“그래, 미궁의 선택. 미궁은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아. 너도 그렇게 느끼지 않아?”

앨런이 여전히 모르는 척하자, 렉터가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동류끼리 고충을 나누자는 의도였으니 너무 경계하지마. 지금 말하기 싫으면 나중에 해도 되고. 우리 같은 자들에겐 사명이 있어. 미궁의 비밀을 파헤치고 끝에 도착해서 무엇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찬 공기가 괜히 덥게 느껴지기도 했다.

“렉터 씨. 저기에 뭐라고 적혀있다고 했죠?”

“생물 연구시설. 간단한 단어잖아. 혹시 내가 모르면서 떠보나 시험하는 거야?”

이로써 확실해졌다. 미궁의 문자는 계급을 지녔고, 어떤 지식을 얻었냐에 따라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정해져 있었다.

앨런은 렉터와 달리 그 밑의 글도 보였다.

‘사고 수습까지 폐쇄.’

< 선택받은 자(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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