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택받은 자(2) >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매끈하고 육중한 문은 방문객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한 형상으로 자리를 지켰다.
앨런은 문을 개방하려고 노력하는 렉터에게 말했다.
“교수님께 알리죠.”
“진심이야? 너도 나처럼 바로 들어가고 싶을 텐데···.”
그 말이 사실이긴 하지만, 문 위에 적힌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사고를 처리할 때까지 폐쇄한다는 문이 아직도 닫혀있으면, 내환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터.
며칠 동안 함께 다녔고 동질감도 느껴지지만, 자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자세히 말할 단계는 아니었다. 아무 조건 없이 수련법을 알려줬던 테일러나, 나사 빠졌지만 신실한 시바라면 몰라도.
“미로에 걸맞은 적이 나오면 우리끼리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하기 귀찮은 적이라면 필연적으로 공격의 강도가 높아지겠죠.”
“많이 부수면 연구할 거리가 없어진다는 말이지? 그렇게 하자.”
다행히 앨런의 설득이 먹혀들었다. 지하를 빠져나온 렉터는 주변에 설치한 유선 통신기로 향했다.
미궁에서는 무선 통신의 거리가 매우 짧지만, 유선은 선만 닿으면 상관없었다. 물론 통신선을 미궁이 집어삼킬 테니, 변화가 없는 유적에서나 가능한 방식이었다.
렉터가 통신기를 내려놓자마자.
쿵쿵쿵!
중장비가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은 당연히 오로스 교수. 눈이 벌게진 근육질의 덩치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왔다.
“여기입니까? 렉터 군, 앨런 탐험가. 벌써 이런 곳을 발견했군요. 두 사람의 관찰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교수님도 수업만 아니었다면 발견했을 겁니다. 오히려 발굴하랴, 수업하랴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라면 몸져누웠을 겁니다.”
오로스의 칭찬과 그에 뒤따라붙는 렉터의 아부가 하모니를 이뤘다. 앨런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낯뜨거운 장면이었다.
그런 시간도 잠시, 오로스가 눈을 빛내며 잔해 더미로 다가갔다. 그가 들어가기엔 구멍이 아주 좁았다.
“먼저 치우고 들어가죠. 위험하니 저쪽으로.”
앨런과 렉터가 자리를 피하자, 오로스가 건물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공업용 장비 같은 손으로 붙잡고 던지니, 콘트리트 덩어리들이 조약돌처럼 쉽게 날아갔다.
건물이 무너졌던 흔적은 어느새 말끔히 사라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건물이 원래는 옆에 있는 줄 알았으리라.
듬직한 오로스가 지하로 향하니 통로가 비좁게 느껴졌다. 그리고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원인을 찾던 앨런이 오로스 교수의 등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도 느꼈는지 헛기침을 했다.
“심장이 저도 모르게 흥분했군요. 이 나이를 먹었는데도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으니···.”
심도 5를 생물체의 최대 도달점이라고 부르는 만큼, 도달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장 소리만으로 통로를 울리게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그 고동은 봉쇄문을 앞에 두자 더욱 심해졌다.
“호오···.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군요. 글자를 보고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유추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니···.”
앨런은 이야기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 오로스가 저렇게 말해도 사실은 렉터와 같은 부류일 수도 있었다. 마침 눈을 마주친 렉터가 씩 웃었다.
그 사이, 오로스는 문틈에 손가락을 끼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힘을 줘서 양옆으로 벌리려는 듯했지만, 그의 손가락이 들어가기엔 틈이 너무 좁았다.
“후읍!”
그가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수십 년간의 연구로 다져진 뇌는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콰앙!
문과 주먹이 부딪치며 지하가 쩌렁쩌렁 울렸다. 놀랍게도 문은 오로스의 일격을 버텨냈다.
“우리끼리 열어보려고 했으면 구경도 못 했겠는데.”
“그러게요.”
앨런은 폐쇄 경고 문구 근처의 회로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패널 하나가 보였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굳이 패널 조작 없이도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을 찌그러트려서 강제로 틈을 벌린 오로스가 양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뒤에서 보는 등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튼튼한 탐험복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찢어진 옷 사이로 흉악한 근육이 얼굴을 내밀 때쯤, 문이 완전히 열렸다.
오로스가 탐험복을 툭툭 두드리며 안타까워했다.
“튼튼하면 신축성이 떨어지고, 신축성이 좋으면 약하고. 이게 참 딜레마예요.”
앨런의 눈에는 매우 튼튼해 보였지만, 오로스의 기준에는 미달인 듯했다.
‘마탄 한두 발로는 뚫리지도 않겠는데.’
그런 상념도 잠시, 이제는 새로이 나타난 통로에 집중할 때였다.
폐쇄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풍경이 보였다.
앨런은 무릎을 굽혀서 해골을 만졌다. 연구 가운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은 해골은 문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살점이 온전했다면 2.2m 정도의 신장으로 추정됩니다. 지하인 남성의 평균 신장입니다.”
“흥미롭군요. 앨런 탐험가는 그 해골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죠?”
“해골은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자세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연구 가운도 입고 있죠. 그러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안에서 문제가 생겼고, 탈출하지 못한 겁니다.”
척추에 생긴 상흔도 그가 뒤에서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이런 경우는 보통 둘 중 하나였다. 배신을 당했거나, 무언가에게 쫓겼거나.
“벌써 사람을 무섭게 하는군요. 흥미진진합니다.”
오히려 안에 있을 존재가 무서워해야 정상 아닐까. 앨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로스의 뒤를 따랐다.
문 앞에서 봤던 해골과 비슷한 형상의 유해가 통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출입구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나 척수 같은 치명적인 부위만 노렸군요. 해골이 비교적 멀쩡한 이유가 있습니다. 앨런 탐험가.”
“말씀하세요.”
“저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로스가 가리킨 장소에는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토마톤이 뭉개지고, 찢어진 흔적이었다.
“경비 오토마톤이군요.”
앨런은 지팡이로 잔해를 헤집었다. 배치 장소가 학교여서 그런지 비살상 무기를 장비했다. 동물 형태라면 송곳니가 뭉툭했고, 사람 형태라면 기절총이나 몽둥이를 들었다.
그렇다고 인도적인 녀석들은 아니었다. 영혼석에 입력된 가장 낮은 수준의 제압이 사지 분쇄였으니까.
“오토마톤의 급소는 생명체와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 망가트린 것 같습니다.”
“단순한 화풀이일 가능성은요?”
“그랬다면 해골이 멀쩡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곳에 도사린 무언가는 움직임에 유달리 예민할 수도 있겠군요. 지금처럼요.”
앨런은 오로스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어두운 통로가 더욱 짙어지더니 사람의 형상이 두드러졌다.
“렉터 군. 조명 마법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렉터가 팔찌 형태의 에비를 두드리자 하얀 구체들이 퐁퐁 솟아올랐다. 새하얀 광원이 천장에 줄줄이 달라붙으며 사방을 밝혔다.
“흥미롭게 생겼군요.”
복도 저편에 나타난 존재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무언가였다. 마치 해부도의 근육이 스스로 걷는 듯한 모습이었다.
녀석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근육이 수축하고 이완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신장 2m를 가뿐히 넘는 두 존재가 서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들의 덩치처럼 긴장감도 통로를 가득 채웠다.
“혹시 음성 언어를 사용할 줄 아시나요? 아무 소리나 내도 상관없습니다.”
오로스가 적의가 없다는 듯 손바닥을 보이며 양손을 어깨까지 올렸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문자 그대로 녀석의 손에 위치한 근섬유들이 꼬이더니 송곳처럼 변했다.
송곳의 목적지는 오로스의 심장. 첨단이 닿기 전 오로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흡!”
끄르르?
거대한 등 근육 때문에 보이진 않았지만, 생명체의 당황했을 얼굴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이런. 손버릇이 나쁜 아이군요.”
동시에 생명체의 다른 손이 위로 치솟았다. 이번에 노리는 위치는 오로스의 목인 줄 알았으나, 한 번 반동을 주더니 눈동자를 찔렀다.
과정은 좋았으나, 결과는 영 아니었다. 오로스에게 손목을 붙잡힌 녀석은 천천히 무릎 꿇려지고 있었다.
끼이이!
“고통을 느낍니까? 보아하니 신진대사도 존재할 것 같은데, 유적에서의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참 궁금합니다.”
“동면에 준하는 방법이 있겠죠.”
“앨런 탐험가 말이 맞습니다. 우선 이 아이를···.”
갑자기 생물체의 형상이 일그러졌다. 뙤약볕 아래에서 녹아내리는 눈사람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힘내세요. 이렇게 사라지면···.”
오로스가 당황했지만, 그것 또한 생물체의 노림 수였다. 근섬유로 꼬아 만든 그물이 오로스를 덮쳤다. 오크의 녹색 피부 위로 붉은 옷감이 걸쳐졌다.
렉터는 그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생 타입이구나. 지하인 숙주는 미라로 변했고.”
“교수님은요?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그냥 놔둬도 알아서 하실 분이셔. 보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로스의 손이 몸을 덮은 근육을 뜯어냈다. 생물체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악을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재밌는 아이군요. 연구할 보람이 있겠어요.”
상반신을 노출한 오로스가 껄껄 웃었다. 탐험복 상의와 함께 구겨진 생물체는 그가 챙겨온 원통 안에 압축되고 있었다.
“그럼 계속 가볼까요?”
바지만 멀쩡한 오로스가 다시 한번 앞장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노인답지 않게 비대한 근육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오로스에게 재롱을 부렸던 생물체가 몇 번 등장하긴 했지만, 전부 통에 담긴 신세가 되었다. 수레의 빈틈이 채워질 때마다 오로스의 휘파람 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연구실 가장 안쪽에서, 앨런은 붉은 보석 몇 개를 발견했다. 정확히 말하면 투명한 보관함 안에 빨간색 무언가가 가득 차 있었다.
“근육 생명체의 본래 모습인가 봅니다.”
“생체 갑옷을 연구하던 시설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사고에 휩쓸렸군요. 혐오체를 연상케 합니다.”
“혐오체요?”
“제가 도달했던 다음 단계에 나타나는 괴물들입니다. 앨런 탐험가라면 언제가 그곳에 닿을 겁니다.”
오로스는 심도 5. 그가 도달하지 못한 층이라고 했으니 51층 이후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오로스의 말에 집중했다.
“어쩌면 생체 갑옷일 수도 있겠어요. 사용자의 의지에 반응할 최소한의 사고만 남겨놔야 하는데, 실수가 있었던 것 같군요.”
금속 같은 단단한 물질로만 강화복을 만들어야 하나. 그런 의문에서 시작된 장비가 생체 갑옷이었다. 주로 유전공학, 키메라공학 등 생물을 다루는 학문에서 태어났다.
캠프로 돌아간 오로스는 가져온 샘플을 엄중히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이야 웃으면서 떼어낼 수 있지만, 혹시라도 학생에게 들러붙으면 곤란하니까.
“렉터 군과 앨런 탐험가는 쉬셔도 좋습니다.”
물론 그 말을 그대로 따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
앨런은 밤늦게까지 연구를 하다가 잠들었다. 평소라면 테일러가 강제로 자게 만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슨 소리지?’
피곤함에 절은 몸이 저절로 깨어날 정도의 소음이 들렸다. 동시에 상자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일어났어.”
삐―
고개를 돌리니 옆 침상에 있어야 할 렉터가 자리에 없었다.
“일어났구나?”
그는 천막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소란과 달리 침착한 모습이 돋보였다.
그건 앨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파워슈트의 헬멧을 착용했다.
“비명도 들리는데, 무슨 일인가요?”
“그건···.”
끄아아!
천막을 찢으며 나타난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렉터의 말을 지워냈다. 불청객은 지하에서 봤던 생명체였다. 렉터의 퀭한 눈빛이 생명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무래도 연구실은 하나가 아니었나 보네. 재밌게 됐어.”
< 선택받은 자(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