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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23화 (123/193)

< 선택받은 자(3) >

근육으로 이루어진 듯한 생체 갑옷은 자의식을 지녔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밝혀졌다.

적귀(赤鬼)라는 임시 명칭을 부여받은 괴물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는 아니나, 존재하는 생명체를 숙주로 만들려는 습성을 지녔다. 혹은 생명력만 갈취하거나.

둘 다 죽음을 의미하니, 어떤 방식이든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는 달가워할 수 없었다. 죽음은 생명체의 본성과 거리가 머니까.

앨런은 불의의 습격에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끄아아!

붉은 괴물이 목구멍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는 짧은 시간 동안, 앨런은 녀석에 관한 판단을 내렸다.

‘2m 넘는 신장. 탐험가 중에 오크가 있긴 하지만, 덩치로 보면 지하인이다.’

렉터의 말대로 연구실 혹은 적귀가 잠든 장소가 추가로 있다는 뜻이었다.

‘혹은 적귀를 보관하는 천막에 문제가 생겼겠지.’

전자라면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으나, 후자라면 슬픈 이야기였다. 누군가 실수했거나, 보안 대책이 엉망이라는 결과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단은 눈앞에 나타난 적을 처리할 차례였다.

앨런은 상자와 아옹다옹하는 적귀를 보다가 옆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렉터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왜? 난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지하 연구실에서는 교수님 때문에 구경만 했잖아.”

“빨리 처리해야, 밖의 소란에 손을 보태죠.”

“교수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야.”

“···.”

렉터는 태평해도 너무 태평했다. 나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저렇게 보이나. 앨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적귀에게 집중했다.

적귀는 오로스에게 했던 것처럼 근섬유를 변형, 무기로 만들어서 상자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오크 교수님처럼 맨몸으로 받아냈다간 구멍이 숭숭 뚫릴 테니, 상자는 마력 방어막을 열심히 가동했다.

앨런은 푸른 막에 튕겨지는 촉수를 피해 빠르게 접근했다.

‘녀석의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상자를 노리던 촉수 하나가 휙 꺾이더니 앨런의 얼굴을 노렸다. 바이저가 있으니 가만둬도 되겠지만, 그보다 먼저 손이 촉수를 낚아챘다.

‘오···.’

앨런은 살짝 감탄했다. 조금 전의 움직임에는 시온의 동작이 95%, 자신의 것이 5% 포함되어 있었다.

파워슈트가 몸을 조종하지만, 그 빈도가 높아지니 자신의 몸에도 경험이 쌓임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잡힌 촉수가 찌그러지고, 고통을 느낀 적귀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파워슈트의 장갑에서 피어오른 화염이 촉수를 따라 적귀의 본체까지 번졌다.

끼에에!

녀석은 땅바닥에서 구르고 싶은지 어떻게든 상자를 뿌리치려 했지만, 프레스 기계 같은 집게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설령 그게 가능했어도, 불을 끄진 못했으리라. 마력이 가미된 불은 일반적인 현상을 뛰어넘으니까. 전신으로 옮겨붙은 불이 핵까지 파괴했는지 근육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고통···.”

“뭐라고 하셨나요?”

앨런은 적귀의 생명 반응을 확인하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퀭한 눈의 렉터가 불타는 살덩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생명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주요소지. 생체 갑옷이 왜 통증을 느끼게 설계되었을까?”

“통증은 사실 육체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감각이니까요. 아픔이 없다면 생명체는 여러모로 부주의하게 변하겠죠. 그건 생명의 연속성에 치명적입니다.”

“그래, 말이 통하니 좋네.”

“적귀도 마찬가지겠죠. 고통을 통해 적귀의 빠른 반응을 유도해서 착용자를 훨씬 안전하게 지키려고 했겠지만···.”

“실패했지. 아픔으로 인해 자의식이 깨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거야. 아니면 자신들의 기술을 맹신했거나.”

“토론은 나중에 하고 우선 움직이죠.”

이대로 두면 잿더미까지 뒤질 기세라 앨런이 먼저 천막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정해져 있었다.

끄아아!

끼이익!

적귀가 우렁차게 포효를 내지르는 장소로 가면 대학의 인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상대로였다. 탐험가와 학생이 힘을 합쳐 적귀를 밀어냈다. 진형도 없이 홀로 덤벼드는 적귀는 숫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이유는.

“으랴아아!”

제일 선두에서 날뛰는 오로스 교수 덕분이었다. 잠옷 바지만 입고 있는 그는 양손으로 적귀를 찢고 있었다. 야들야들한 게맛살처럼 근섬유가 손쉽게 뜯어졌다.

발밑에 쌓인 근육 다발을 하나로 합치면, 적귀 10 개체는 만들고도 남을 양이었다.

옆의 동료가 죽어도 계속 달려들던 적귀들은 앨런이 도착하자 슬그머니 물러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상임에도 개처럼 네발로 뛰며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붉은 오크로 변한 교수가 입을 열었다.

“둘 다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벌써 모여계셨군요.”

“제가 분명 마력을 담은 함성을 내질렀을 텐데요. 렉터 군, 못 들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둘의 텐트는 외곽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죠. 미궁의 수상함은 하루 이틀도 아니니···. 잠시, 실례.”

오로스는 사람들과 거리를 벌리더니 몸에 힘을 줬다. 근육이 순간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몸에 묻어있는 피나 이물질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저런 방법도 있구나.’

근육을 강하게 진동시키고, 그 힘을 피부에 전달해서 오물을 떨쳐내는 수법이었다. 설명은 쉽게 했지만, 막상 따라 하려고 하면 어려웠다.

‘단순히 힘을 주는 건 쉬워도, 오물을 발밑에만 뿌리는 건 어렵지. 근육의 세밀한 운용이 돋보이는 수법이야.’

본래의 피부색을 되찾은 오로스가 탐험가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탐험가들이 침을 삼키는 빈도가 높아졌다.

“여러분. 오늘 보관소 담당이 누구인가요?”

“저, 접니다.”

“저도···.”

골렘 의수를 장착한 탐험가가 소심한 동작으로 손을 들고, 대학 직원인 오크 하나도 앞으로 나섰다.

“두 분을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혹시 보관소에 문제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교수님!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적귀도 물러갔으니 확인해보죠. 다른 분은 비밀통로 쪽이 멀쩡한지 확인하세요.”

탐험가와 직원의 말대로 보관소는 멀쩡했다. 적귀를 압축해서 담았던 통과 붉은 액체를 담은 투명한 케이스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숫자도 맞고, 깨진 부분도 없군요. 두 분의 실수가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탐험가와 직원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자신들을 노려보는 것 같던 교수의 근육이 잠잠해졌다.

보관소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통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던 인원이 복귀했다.

탐험가 하나가 입술을 혀로 적셨다.

“저···.”

“괜찮으니 편히 말하세요.”

오로스가 씩 웃었지만, 오히려 탐험가의 떨림이 심해졌다. 잠시 기다려주자 말문이 트였다.

“통로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유적과 미로를 연결하는 길이 없어졌다는 말에 교수가 이마를 짚었다. 도드라진 목 근육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사실 오로스 혼자라면 괜찮았다. 그랬다면 벌써 유적을 돌파하고, 비밀을 손에 넣어서 통로의 문을 열어젖혔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이 있었다. 어미 새를 바라보는 새끼들이 솜털 돋은 날개를 부르르 떨었다.

오로스가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제가 뭐라고 했죠?”

“미궁에는 탈출구가 항상 있다고 하셨습니다.”

“칼슨 학생, 대답 고마워요.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한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문이 있음을 명심하며 침착함을 되찾으세요.”

오로스가 탐험가의 임시 대장과 선임 직원을 불렀다.

“캠프의 위치를 벽 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천막을 최대한 붙이고, 어떤 재료든 사용해서 벽을 쌓으세요. 그리고 렉터 군과 앨런 탐험가는 잠시 저 좀 봅시다.”

탐험가들은 혼자만 쏙 빠지는 앨런에 대해 별말 없었다. 처음에는 쟤는 뭐냐는 생각을 지녔지만, 연구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로스는 철거 전인 천막 안으로 두 사람을 들였다.

“두 사람은 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어요.”

“저희가 통로를 열길 바라시는군요.”

“앨런 탐험가의 말대로예요. 사실 제가 나서고 싶지만, 학생들이 있어서···.”

오로스가 그렇게 말하며 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들리나요? 적귀 무리가 여전히 이 근처에 숨어있습니다. 연구실 지하에서 봤던 저돌성을 숨기고, 이상하게도 때를 기다리고 있군요.”

“저들을 조종하는 존재가 있다는 뜻입니까?”

“맞아요. 지음 같아서 편하군요.”

오로스가 앨런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 존재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제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팔근육을 쓸어내렸다. 팔근육은 그에 반응해서 꿈틀거렸고. 오로스가 그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그것까지 처리해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위치를 확인하고 복귀하면, 제가 나서서 단숨에 처리하겠어요.”

“조교로서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앨런, 서두르자.”

“잠시만요. 다른 방법이 있으면요?”

앨런의 말에 두 사람이 주의를 기울였다.

“교수님이 무언가를 발견할 동안 캠프가 버틸지 몰라서 불안하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공세를 막아낼 힘이 있다면, 교수님이 직접 탐색에 나서는 편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방법이죠?”

교수의 물음에 앨런이 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가만히 있던 상자가 갑작스레 쏠린 시선에 반응해서 집게발을 딱딱거렸다.

“저는 마법공학자입니다. 그리고 오토마톤은 혹시 모를 감염의 위험도 없습니다. 생명체도 아니라 적귀가 몸으로 덮어봐야 아무 소용 없고요.”

“저도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만, 오토마톤을 그렇게 빨리 일으킬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마침 대학을 지키던 오토마톤도 한곳에 모아뒀으니, 재료는 충분합니다.”

“일단 확인해보고 논의를 이어가도록 해요.”

벌떡 일어난 오로스가 오토마톤의 잔해를 쌓아둔 장소로 움직였다. 가끔 적귀의 괴성이 들리면 그쪽으로 돌을 던져서 조용히 만들었다.

“앨런, 가능하겠어?”

“가능합니다.”

“오토마톤이 그렇게 쉽게 만들 수 있었나? 차라리 우리가 적귀의 대장을 찾는 게 어때?”

“지적 욕구의 해소도 중요하지만, 일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적귀의 모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아?”

“1순위는 학생들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흠···.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앨런은 렉터의 말을 뿌리치며 오토마톤을 확인했다. 심하게 망가진 아이가 많았지만, 어차피 평생 가동할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영혼석.”

주인의 명령을 받은 상자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고이 잠든 영혼석들이 보였다.

“앨런 탐험가, 미리 준비해둔 겁니까? 탐험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군요.”

“네, 뭐···.”

사실 약간 달랐다. 설원에서 상대했던 매머드는 오토마톤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앨런은 그것을 상자에게 일부 적용했다.

상자가 뱉은 영혼석은 녀석이 임시로 별문자를 새긴 물건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동작에 대한 별문자만 입력해서. 나머지는 앨런이 해결해야 했다.

앨런은 영혼석을 바닥에 놓고 고개를 숙였다. 마력 운용이 깊어지자, 언제나 그렇듯 3개의 원이 얼굴에 그려졌다. 미간이 뿜는 빛이 제일 강해진 순간, 앨런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다중 해킹.’

방화벽도 없고, 애초에 앨런이 만든 물건이라 마력을 쉽게 받아들였다. 영혼석 내부의 별문자가 빠르게 변화했다.

앨런은 고개를 들었다. 바이저 덕분에 빛이 외부로 빠져나가진 않았다.

“이제 영혼석을 끼우고 마력로를 켜면 됩니다.”

모든 작업을 혼자 할 필요는 없었다. 학생들이 오토마톤의 몸통을 대충 맞추면, 앨런이 붙어서 뚝딱뚝딱 수리를 마쳤다.

“대단하군요. 오토마톤의 형태마다 영혼석의 내용이 다를 텐데···.”

오로스는 몸을 일으키는 기계 병사를 보며 감탄했다. 미리 준비했다는 말로 덮을 만한 현상이 아니었다.

오크 교수의 눈이 맹금류처럼 변했다.

“앨런 군···.”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하하. 그럼 맡기겠습니다.”

탐험복을 제대로 입은 오로스가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가는 길에 적귀 몇을 해치웠는지 비명이 연속적으로 들렸다.

앨런은 오토마톤을 통솔해서 탐험가들 앞에 세웠고, 렉터는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 선택받은 자(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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