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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25화 (125/193)

< 선택받은 자(5) >

적막으로 가득 찬 보관소 안, 머리가 몸 안으로 처박힌 몸뚱이, 중심에 선 절대강자.

앨런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침착함을 유지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살해를 목격하니 온갖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리를 뜨겁게 달궜다.

‘유적 탐나서? 호인이라 소문난 이유는 이런 식으로 목격자를 전부 몰살해서? 이 유적에 그만한 가치가 있나?’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신과 거미는 미약한 마력 신호로 연결되어있고, 제이크 마셜 정도의 실력자라면 못 알아채는 게 이상했다.

앨런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제이크가 앨런이 누워있는 천막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있···.”

처음의 목소리는 거미를 통해서.

“···군.”

그다음은 귓가에 직접 꽂혔다.

앨런이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나는 순간, 검지가 이마를 살짝 밀었다. 가벼운 움직임에 파워슈트를 입은 몸이 침대에 강제로 앉혀졌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낸 게 아니라, 육체의 균형과 마력의 흐름까지 고려한 수법이었다. 앨런은 몸을 휘감았던 마력이 사라졌음을 느꼈지만, 그대로 앉아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제이크 마셜이 렉터의 시체를 바닥에 던졌다.

“넌 누구지? 평범한 탐험가는 아닌 것 같은데?”

“탐험가 맞습니다.”

앨런은 저도 모르게 왼쪽 눈을 가동했다. 이런 실력자를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가까이에서 보겠는가.

<분석>

이름 : 제이크 ??

종족 : ???

몸에 마력을 두른 탓인지 깨진 문자열이 좀 보였다. 그래도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제대로 출력되긴 했다.

<분석>

이름 : 제이크 마셜

종족 : 인간

앨런이 조용히 있으니, 제이크가 팔짱을 꼈다.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지? 마력의 작용이 느껴지는데. 특히 왼쪽 눈에.”

“실력자를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래서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심도 7은 다르네요. 피부에 흐르는 미약한 마력조차 어떠한 방어막보다 튼튼해 보입니다.”

“하···?”

제이크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아직까진 적의를 안 보이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앨런이 말을 보탰다.

“프랑수아 씨나 시온 선배와 같이 다닌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자주 마주쳤네요.”

“그 둘과?”

익숙한 이름을 들은 제이크는 불투명한 바이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마치 안쪽에 숨겨진 얼굴이 보이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앨런은 살을 에는 서늘함을 느꼈다. 제이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런 분위기도 잦아들었다.

“진짜군. 흠···. 혹시 지팡이를 훔쳐 갔다던 마법공학자가 그쪽인가?”

“훔치다뇨. 저희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앨런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자, 제이크가 살짝 웃었다.

“표정이 인조인간 같더니, 이제야 사람 같군. 훔쳤으면 그 아이가 가만히 놔뒀을 리가 없지. 지팡이는 사용해 봤나?”

“아뇨. 31층 이하로 추측되는데 아직 거기까지 도달하진 못 했습니다.”

“그건 누가 알ㄹ···. 쉿.”

제이크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바닥을 가리켰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실제로 사망한, 렉터가 몸을 일으켰다.

어떤 말소리가 들렸는데, 머리가 몸속에 파묻혀 있어서 웅웅 울리기만 했다. 몇 번 그러고 나자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신호가 끊겨서 왔는데, 또 자넨가?]

“또? 네놈이 할 말은 아닐 텐데. 도대체 분신을 얼마나 뿌려놓은 거지?”

[자네와 부하들이 처리한 만큼.]

“지긋지긋해.”

[미궁의 비밀을 찾으려는 동지끼리 야박하군. 목표가 같으니 기왕이면 협력하는 게 어떻겠나?]

“미궁의 층을 넘어서 마법을 부리는 재주를 알려준다면 고려해보지.”

미궁의 층과 층은 단절된 차원이고, 그게 미궁과 지상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1층에 있는 사람은 2층에 간섭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법칙을 깨트린 존재가 최근에 나타났으니.

“수집가군요.”

[까마득한 후배도 있구나. 제이크와 함께 있는 걸 보니, 귀중한 유망주인가? 내가 눈치도 없이 방해했군.]

“초면입니다. 두 분 다 처음이네요.”

[그럼 됐다.]

수집가는 앨런에게서 금방 흥미를 잃고, 제이크에게 말했다.

[오늘 인사는 이쯤 하겠네. 자꾸 내 일을 방해하면 나도 발끈한다는 것만 알아두게.]

“나와 협상을 하자는 건가? 목을 잘라오면 고려는 하겠다.”

[재미없는 친구 같으니···.]

대화가 끝나려는 분위기를 느낀 앨런이 질문을 던졌다.

“저···. 렉터는 무엇인가요?”

[우리 둘을 눈앞에 두고도 호기심이 먼저인가? 재밌는 후배일세. 그건 어리숙한 시기의 나다. 욕심은 많은데 숨길 능력이 부족했지.]

“그때의 정신만 분리했다는 뜻이군요. 그럼 렉터가 이상행동을 보인 이유는 미궁에 들어왔기 때문인가요? 지상에서 미궁에 간섭할 수 있어도, 마법의 열화는 피할 수 없군요.”

지금 수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대화뿐이었다. 그것마저 신기하지만, 말로는 어떤 피해도 줄 수 없었다.

[갑자기 아픈 부분을 찌르다니. 생각보다 당돌한 후배일세.]

“그 이유 때문이면 예전에도 이상행동을 보였어야 했는데, 렉터는 미궁을 수차례 들어왔습니다.”

수집가는 제이크를 신경 쓰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마법공학자 같은데, 오토마톤의 수명이 영원하나?]

“아뇨.”

[육체도 마찬가지로 적정 사용 기간이 있다. 사람도 소모품이란 말이지.]

“심지어 미궁까지 드나드니 소모 속도가 빨라졌군요.”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수집가가 꾸준히 정비를 해줘야 하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좋구나. 혹시 제자가 될 생각이 있나?]

앨런은 수집가의 제자라고 칭했던 흑마법사를 떠올렸다. 온갖 시술을 받아서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명령만 따라야 하는 존재를 제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연히 거절하려 했으나, 그전에 제이크가 나섰다. 손을 휘젓자 렉터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다.”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우선 이곳의 책임자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

주변의 마력이 약하게 출렁이더니, 잠시 후, 노란 잠옷을 입은 오로스가 등장했다. 그는 렉터의 시신을 목격하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마셜 회장, 이게 도대체 무슨? 렉터 군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나요?”

“수집가의 분신이다. 그동안 교수를 따라다니며 연구 결과를 빼돌렸겠지.”

“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내가 교수를 속일 필요가 있나? 정 필요하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신이나 회사 혹은 가족도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내밀었다. 자부심 혹은 오만으로도 느껴질 당당함이었으나,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오로스 교수는 머리를 감싸더니, 비틀거리며 빈 침대에 앉았다. 처음으로 내비치는 약한 모습이었다. 근육도 슬퍼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한동안 천막을 채웠다. 제이크와 앨런은 말없이 교수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후···. 그나저나 빨리 오셨군요.”

“새로운 유적이 궁금해서. 그런데 놈이 있을 줄 몰랐군.”

“그 이야기는 그만 해요. 앨런 군, 혹시 같이 일할 생각 없나요? 저번에 신분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지만, 앨런 군의 실력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거예요.”

“오로스 교수, 지금은 스카우트하기 적절한 시기가 아닌 듯하군.”

“그것도 그렇군요.”

슬퍼했던 모습이 거짓말이었건 것처럼 렉터를 벌써 없는 사람 취급했다. 오로스 교수의 성격도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앨런 군?”

제이크의 만류에도 오로스가 다시 물었으나, 당연히 앨런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입맛을 다신 교수가 렉터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마침 기상 시간이니, 학생과 탐험가에게 설명하면 되겠군요.”

“그에 따른 혼란은?”

“이런 일로 미궁 탐험을 관둘 학생이 미궁학과에 들어올까요? 저쪽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야기나 나누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이크는 렉터가 사용하던 오파츠와 생명력을 담던 반지를 관찰했다. 앨런은 반지에 새겨진 문구를 발견하고 읽었다.

‘생명력을 채워서 제물로 사용하는 물건이구나.’

제이크는 주먹을 말아쥐며 반지의 모습을 감추고, 앨런을 지긋이 바라봤다.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었다.

“너도 선택받은 자구나.”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제이크의 눈동자에는 이미 확신이 깃들어있었다.

“이 반지에 적힌 글귀는 평범한 탐험가 눈에는 보이지도 않아. 그런데 너의 눈동자는 문자를 따라 움직이더군.”

불투명한 바이저를 쓰고 있는데도 제이크는 바로 알아차렸다.

‘시온 선배도 홀로스킨을 들켰을 때 비슷한 기분이었나? 앞으로는 룬문자로 보강해서 이런 일이 아예 없게 해야지.’

역지사지에 의한 반성보다는 기술 개선을 먼저 떠올렸다.

앨런은 분위기가 부드러워졌음을 느꼈다. 찬 바람이 쌩쌩 불던 제이크의 얼굴에도 따뜻함이 조금은 감돌았다.

“가능성 있는 후배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즐겁지.”

갑자기 목소리에서 친절함이 느껴졌다.

“아까는 그놈 앞에서도 당당히 말하더니 왜 이리 얼어있나?”

“할 말이 없어서요?”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할 말이 없긴. 내 밑의 아이 중에도 선택받은 자는 별로 없지.”

“수집가는요?”

“그놈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어째서 그런 놈에게 은총이 내려졌는지 모를 일이야. 마음 같아선 없애버리고 싶지만···.”

“회장님 같은 실력자들이 힘을 합치면 가능할 텐데요.”

“전부 목이 뻣뻣한 녀석들뿐이라 쉽지 않아. 자리를 비웠다가 수집가 같은 놈들이 난리를 피우면 막을 방법도 없고, 찾는다는 보장도 적고.”

세상에는 이름난 범죄자가 너무 많았다. 악명 자체가 뒤 세계에서는 명성이라 대놓고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수집가는 솔도스 연방 어딘가에 숨어있고, 재봉사는 저 아래 밀림에 똬리를 틀었고, 북쪽의 파괴자는 잠잠해 보여도 방심할 순 없지.”

거물 범죄자의 이명이 줄줄이 나왔다. 사실 더 많지만, 이쪽 대륙에서 제이크와 급이 맞는 범죄자는 일단 그들뿐이었다.

“악당들 이야기는 이쯤 하고 건설적인 주제로 넘어가지.”

“하실 말씀이 있나요?”

“교수가 신분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니 불법 체류자 같은데, 브레이커에 정식으로 들어올 생각이 있나?”

“스카우트하기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면서요.”

“몇 분이라도 시간이 흘렀잖나.”

실력만큼 뻔뻔함도 수준급이었다. 앨런은 제이크의 태도가 왜 바뀌었나 잠시 고민했다.

‘미궁의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그 능력 자체가 귀중하다는 증거였다. 아니면 남들에게 주기 싫다는 마음일 수도 있었다.

“정식으로 소속되면 어떤 장점이 있나요?”

“보안 권한에 따라 미궁 정보 열람이 가능해지지.”

“오···.”

앨런이 눈을 반짝였다. 귀중한 정보를 얻으려면 위로 올라가야겠지만, 가장 낮은 단계의 정보도 쓸모가 많을 테니까. 지원이 어떠니, 복지가 어떠니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회장이 이런 내용을 어떻게 전부 알고 있지?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탐험가를 스카우트하나?’

회장의 말에 잠깐 홀렸던 앨런이 정신을 차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 혼자만 고용되나요?”

“당연하지. 지금 함께 다니는 파티원에겐 아쉽지만 작별한다고 전해야지. 뛰어난 직원이 많으니 예전 파티원은 금방 잊을 거다.”

렉터였으면 두말하지 않고 바로 손을 잡았을 테지만, 앨런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아쉽게 됐네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제이크는 예상외로 덤덤했다. 까마득한 높이에 있으니, 앨런 하나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리라.

그는 천막을 나서기 전에 한마디를 남겼다.

“지팡이는 33층에서 사용할 수 있다. 위치는 알아서 찾아봐라.”

명색이 커다란 조직을 이끄는 회장인데 왜 알려주는 것일까.

‘조직의 이익이 우선 아닌가?’

앨런은 그의 속내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선택받은 자(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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