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층(3) >
평야, 늪, 산을 지나 도달한 장소는 끝없이 펼쳐진 숲이었다. 나무들은 빌딩이라도 되는 듯 컸고, 나뭇잎은 햇빛을 차단했다.
하늘에 해가 항상 존재해도, 숲에는 어둠이 만연했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간신히 내려오는 빛줄기를 의지해 앞을 보다 보면, 무언가가 나무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앨런이 주변을 슥 둘러봤다. 깜깜한 어둠이 목을 조를 듯 다가왔고, 저 멀리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음이 들려왔다.
“음침한 곳이네요.”
“28층부터는 계속 이래. 오래 있으면 미칠 것 같다는 탐험가가 태반이지. 그래서 대부분의 파티는 이곳을 최대한 빨리 지나가려고 해.”
“탐험가들이 대충 훑어본다고 했으니 의외의 발견을 할 수도 있겠네요.”
“당연히 너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그런 목적을 지닌 파티는 여기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어.”
앨런은 잠시 대화를 중지하고 나무 위를 쳐다봤다. 키가 워낙 커서 목을 크게 꺾어야 꼭대기가 어디에 있는지 추측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정찰을 보냈던 거미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앨런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입력된 알고리즘에 의해서.
“연결이 끊겨서 스스로 복귀하네요. 이러면 공중정찰이 어렵겠어요.”
“골렘이나 드론이 있어도 굳이 뚜벅뚜벅 걸어서 문을 찾는 이유가 있다. 저 나무들을 휘감은 덩굴이 보이니?”
“마력신호를 차단하는 파장을 뿜어내는군요.”
마나펄스처럼 마력회로와 마력로를 망가트리진 않지만, 주인과 골렘의 거리가 조금만 멀어져도 연결을 차단해버렸다.
이러면 사전정찰의 의미가 퇴색되니, 남은 건 육안에 의한 관찰이나 마력을 사용한 감지뿐이었다.
“안 그래도 짧은 통신 거리가 훨씬 줄어들겠군요.”
“바로 알아보네. 그래도 우리는 사정이 괜찮아.”
테일러가 그리 말하며 시온을 가리켰다.
“쟤가 알아서 해줄 거야.”
“내가?”
“네 감지 범위가 제일 넓잖아. 이럴 때는 능력 있는 사람이 활약해야 해. 그게 탐험가가 파티를 이루는 이유다.”
“내가 믿음직하긴 해.”
“그런 말까진 안 했는데···.”
시온은 테일러의 마지막 말을 무시하고 앞장섰다. 주로 혼자 다녀서 협동 절차에 대해 무지했지만, 그것도 점점 개선하고 있었다.
나침반을 가동하려면 그 층에 서식하는 괴물을 잡아야 해서, 일행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기묘한 울음을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도 마주치는 괴물이 없자, 테일러가 툴툴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불이라도 지르고 싶네.”
사실 테일러도 알면서 하는 말이다. 이곳은 살아 숨 쉬는 숲이고, 생명력이 가득한 만큼 물도 많이 품고 있었다.
파괴해도 어차피 금방 재생하니 불을 질러봐야 힘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오히려 연기 때문에 탐험가만 손해기도 했고.
천천히 걷던 시온이 아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앨런의 왼쪽 어깨에 삐죽 솟은 안테나도 그녀가 보는 장소를 가리켰다.
끄에엑!
목에 끓는 물을 부은 듯한 비명이 들렸다. 분노와 짜증의 농도가 매우 높은 울음이었다.
테일러는 그것의 정체를 아는지 혀를 찼다.
“돼지 새끼네.”
“예전에 말씀해주신 괴물이요?”
“그래, 직접 보면 훨씬 이해가 빠르겠지.”
시온의 몸에서 파동이 뿜어졌다. 평소처럼 몸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면서도, 울음소리가 들려온 장소에는 유독 진하게 방출했다.
괴물을 도발하는 행위였다. 미궁의 수호자들은 탐험가의 머리카락만 보여도 끝까지 쫓아오니, 필요할 때는 이런 식으로 광역 어그로를 끌 수 있었다.
잠시 후, 앨런의 바이저에 변화가 생겼다. 마력 파장 탐지기기 감지한 생물의 형태가 폴리곤 형태로 바이저에 투사되었다.
기괴한 울음을 내뱉었던 괴물의 형태는 처음에는 단순한 사각형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뚜렷해졌다.
<분석>
이름 : 다에오돈
특징 : 장갑차 같은 육체, 흉악한 이빨, 포악한 성질
녀석의 정체는 거대한 돼지였다. 멧돼지 바로 옆에 놓으면, 멧돼지를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로 살벌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어깨높이만 거의 2m에 달하니, 가만히 서 있어도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참고로 일반 호랑이가 1m쯤 됐다.
어쨌든 그렇게 거대한 놈이, 그것도 무리를 이뤄서 달려왔다. 지면이 둥둥둥 울리며 중장비나 탱크가 근처를 지나가는 느낌을 줬다.
이번에도 시온이 앞으로 나서려 하자, 테일러가 만류했다.
“지금까지 네가 처리했으니 좀 쉬어. 우리도 손맛을 봐야지.”
“맞습니다. 우리는 탐험을 위해 왔지, 보호받으려고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매님은 편히 계시면 됩니다.”
시온은 검을 집어넣으며 뒤로 물러났다. 괴물을 눈앞에 두고 구경만 한다는 행위가 어색한지 손잡이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는 앨런을 지긋이 쳐다봤다. 맑고 투명한 눈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엿보였다.
“너는?”
“저는 화력지원이라 원래 후방을 지킵니다. 선배는 계속 혼자 다녀서 지금 당장은 어색할 수도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예요.”
“···.”
시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를 구경했고, 앨런은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 분명 회장의 입김이 작용했을 텐데,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감시나 정보습득이 목적이었다면 그에 적합한 사람을 보냈을 텐데, 정작 합류시킨 사람은 검밖에 모르는 시온이었다.
‘아저씨 말대로 순수하게 전도유망한 탐험가를 육성하려는 의도인가?’
지금 고민해도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라 일단 뇌 구석에 가만히 보관해놓고 정면을 바라봤다.
표범은 테일러와 대련할 때와 달리 모든 무기를 사용했다. 바람의 마력에 휘감긴 동체가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녀석은 자신보다 거의 2배는 큰 괴물 멧돼지에게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공포, 머뭇거림 등 전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감정은 오토마톤의 덕목이 아니었다.
앨런이 입력한 별문자에 따라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표범이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다에오돈 무리의 등을 밟고 달리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등가죽을 죽죽 긁었다. 고통에 눈이 먼 녀석들이 표범을 노려봤고, 덕분에 진형이 많이 흐트러졌다.
지금까지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다에오돈의 등을 밟고 다녔지만, 놈들이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니 그것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원시림의 생물은 오토마톤의 단단함과 교활함을 동시에 갖췄다. 표범을 못 본 척하던 녀석은 발이 등에 닿는 시기에 맞춰 몸을 크게 비틀었다.
표범이 로데오에 실패한 카우보이처럼 튕겨 나갔다. 근처에 나무도 없었기에 발을 디딜만한 장소는 지면뿐이었고, 다에오돈 몇 마리가 예측이라도 한 듯 그쪽으로 몸통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적들의 어깨에 치이고, 발굽에 짓밟힐 미래가 훤히 보였다.
“안 도와줘?”
“일단 지켜보죠. 그렇게 약하게 개조하진 않았습니다.”
앨런은 튀어 나가려는 시온을 제지했다.
그 말대로 표범은 돼지의 돌진에 당하지 않았다. 착지하기도 전에 다에오돈이 그 밑을 지나간 것이다.
사실 다에오돈의 본능적인 판단은 옳았다. 표범이 바람의 마력을 다루기 전이라면 십중팔구 당했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외장갑의 틈에서 뿜어지는 바람이 표범의 체공 시간을 길게 늘렸다.
학살이 아닌 전투는 서로의 공방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다에오돈의 차례가 끝났으니, 이번에는 표범의 순서였다.
녀석의 몸이 활공하듯 대각선으로 미끄러졌다. 경로 끝에 있는 나무를 강하게 박차고, 돌진을 끝내고 몸을 돌리려는 돼지들의 발밑을 스쳐 지나갔다.
표범이 남긴 바람을 따라 핏방울이 흩날렸다. 장갑차 같은 몸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다리가 썩둑 잘리니, 돼지들의 몸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제일 중요한 기동성을 잃은 괴물 사이로 사냥꾼들이 뛰어들었다.
한 명은 요리에 쓸 부위를 최대한 피하며 숨통을 끊었고, 한 명은 머리를 주먹으로 깨부수며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했다.
테일러가 요리에 쓸 고기를 숭덩숭덩 썰고 있으니, 시바가 옆에서 구경했다.
“멧돼지는 누린내가 심하다고 들었는데, 이 녀석은 덩치도 커서 더 지독하지 않을까요?”
“냄새 맡아볼래?”
“아, 형제님!”
시바는 얼굴 앞으로 들이 밀어진 고기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코를 몇 번 킁킁거리더니 제대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신선한 돼지고기 냄새군요.”
“아직도 미궁 물이 덜 들었어. 얘네는 안 먹고도 산단 말이야. 그리고 생물이면서도 생물이 아니기도 하지. 그래서 누린내가 적어. 이상하게도 독이 있는 녀석이 가끔 있어서 잘 골라야 하지만.”
테일러는 고기를 손질하며 설명을 늘어놓다가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바빠. 도대체 왜···.”
“저기 좀 보시죠.”
시바가 계속 치근거리자 테일러가 고개를 돌렸다. 둔기로 수차례 얻어맞았는지 머리가 터진 다에오돈을 앞에 두고 앨런과 시온이 딱 붙어있었다.
“이렇게요?”
“다리와 허리를 거쳐서 힘을 제대로 전달해야 해. 그랬으면 첫 공격으로 두개골을 부쉈을 거야.”
앨런이 지팡이를 들고 자세를 잡으면, 시온이 각도를 이리저리 교정해줬다. 누구를 대할 때와 다르게 자상함이 흘러넘쳤다.
“얼씨구. 탐험하랬더니 연애를 하고 자빠졌네.”
“형제님, 왜 이리 심통이 나셨습니까? 혹시 제약 공방 사장님께 차였습니까?”
“새파랗게 어린 애가 어디서 어른들의 사정에 참견하려고···.”
테일러가 고기를 묵묵히 썰고, 시바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직 고백도 안 했다.”
“형제님···.”
“뭐! 넌 입 다물고 이 고기나 날라. 한마디만 더 하면 생고기로 식사할 줄 알아.”
좋은 고기가 보이면 이전에 썰어놨던 고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래서 테일러의 이동 경로를 따라 살덩이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오, 이거 보여? 꼭 소고기 마블링처럼 지방이 알알이 박혀···.”
고개를 들던 테일러가 입을 딱 다물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다에오돈의 시체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목격한 탓이었다.
기척을 얼마나 잘 숨기는지, 분명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유령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누구냐!”
앨런은 교습을 받다가 테일러의 고함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가죽을 두른 무언가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내가 따라갈게.”
“선배, 잠시만요. 존재를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추적하면 됩니다. 혹시라도 파티를 떼어놓으려는 수작일 수도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됩니다.”
“힝···.”
“네?”
“아무것도 아냐.”
앨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며 테일러에게 다가갔다.
“혹시 공격당하셨나요?”
“아니, 그건 아냐. 내가 떨어트린 고기를 몇 점 집어갔어.”
“혹시 도둑질하는 괴물도 있나요?”
황제도롱뇽처럼 탐험가를 보면 달아나는 변칙적인 개체도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없다.”
“나도 몰라.”
시온도 고개를 저었다.
“그럼 바로 따라가죠.”
“밥은?”
“그게 중요해요?”
호기심이 동한 앨런은 어떤 설득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시바는 벌써 체념하며 에너지 비스킷을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앨런이 녀석을 쫓으며 제일 먼저 한 말은.
“엄청 빠르네요. 벌써 감지 범위를 벗어났어요.”
“그럼 밥이나 먹을까?”
“그래도 흔적은 남아 있으니 따라가 보죠.”
원시림의 숲은 재생한다. 그 말은 인위적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누군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었다.
약간 누운 풀, 보일 듯 말 듯 미세하게 꺾인 나뭇가지, 두른 가죽에서 빠졌으리라 추정하는 엄청 가느다란 털. 모든 흔적이 앨런의 눈에 띄었다.
“아저씨, 생김새는 어땠나요?”
“새까만 가죽을 둘러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몸집을 보면 어른이라기엔 좀 작았다.”
추적을 이어가던 앨런이 발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수상한 존재 대신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문이 보였다.
“문을 통과했으면 사람 아니냐?”
“예외도 있으니 그렇게 단정할 순 없죠. 오히려 사람이 가죽만 두르고 다니는 게 더 수상하지 않나요?”
“그 말이 맞···.”
테일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앨런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표범이 테일러를 쓱 쳐다보더니 그 뒤를 따랐다.
< 30층(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