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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29화 (129/193)

< 30층(4) >

고기를 구우려면 열원이 필요하다. 가스나 전기를 이용하는 가열 기구일 수도 있고, 목재를 직접 태우는 모닥불일 수도 있다.

혹은 숯가마나 용광로로도 가능한 일이다. 이 둘은 다른 방법보다 압도적인 속도로 고기를 구웠다. 단 몇 초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구이가 완성되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흙과 식물 냄새로 가득해야 할 숲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상자의 내부에는 귀한 금속을 정련하는 소형 마력용광로가 있고, 마침 그건 고온을 뽐내는 기계였다.

상자는 플로팅 왜건에서 가장 깨끗한 철판을 꺼내 집게발로 꽉 잡았고, 마력용광로에서 전달된 열이 철판 위의 고기를 빠르게 익혔다.

시바가 성수병이 들어있는 안주머니를 만지려다가 그만두길 반복했다.

“이동식 고깃집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절벽에 매달려서 샤부샤부도 먹어봤는데 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테일러는 수십 년 동안 탐험을 했기에 신기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였다. 시바는 혀 사이를 노니는 단백질과 지방의 조화를 만끽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이래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냄새 때문에 괴물들이 따라붙는 게 아닌지···.”

“그럼 오히려 좋지. 저기에 누가 있지?”

“시온 자매님이 토마호크 고기를 먹고 있군요.”

“쟤가 있으니 괜찮아. 사실 없어도 우리라면 아무 문제 없지. 파티원이 적어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더 아래로 내려가도 될 실력이야.”

베테랑의 설명에 시바도 안심하고 고기로 입안을 가득 채웠다.

삐—

“뭐야? 또 마석 채워달라고?”

상자가 비프음을 내자 테일러가 주머니에서 작은 마석을 꺼냈다. 마석을 건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 소모가 빠른데···. 너, 혹시 마석 삥땅 치는 거 아니지?”

삐―

상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비프음을 흘렸고, 테일러는 마석에서 손을 뗐다. 사람이라면 표정이나 분위기로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지만, 오토마톤에게 그런 방법을 적용하긴 어려웠다.

배부름 덕분에 생긴 여유가 워낙 커서 의심이 자리 잡을 공간이 적긴 했다.

앨런은 흔적을 따라 걷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온의 입술은 기름 때문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기에 집중하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움직였다.

“왜?”

“괴물들의 기척이 있나 해서요.”

“내 탐지 범위에는 없어.”

“신기하네요.”

“뭐가?”

“우리가 쫓는 무언가, 그냥 알파라고 부를게요. 알파의 경로나 속도를 생각하면 괴물 무리를 하나쯤은 마주쳐야 했어요. 그런데 아예 피해가네요.”

“우연 아닐까?”

“아니면 우리가 걷은 길 자체가 일종의 안전지대일 수도 있죠.”

“항상 바뀌니까 너무 믿으면 안 돼.”

시온은 말을 툭 내뱉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앨런은 그녀와 대화하며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안전지대가 있다고 말하니 바뀐다고 대답했다. 다른 층에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추적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듯했다. 헐레벌떡 뛰어가던 흔적이 매우 옅어지고 있었다.

“이 근처에 은신처가 있나 봐요.”

“어떻게 알아?”

“어미 새는 새끼가 배설하면 물어서 먼 곳에 버리거든요. 포식자에게서 은신처를 숨기려면 언제나 깔끔하게 행동해야 해요. 이 근처에 흔적을 안 남기려고 살금살금 움직였어요.”

“아···.”

앨런의 말에 시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네 말대로야. 땅 밑에 굴이 있어.”

시온이 주로 다루는 능력은 파동. 그건 고체, 액체, 기체를 가리지 않고 전달되는 성질을 지녔기에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앨런은 야트막한 동산 주변을 관찰하다가 커다란 나무 근처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지면까지 튀어나온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었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살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테일러 역시 구멍을 목격했다.

“너무 작은데. 우린 못 들어가겠다.”

“기어서 들어가다가 공격을 당해도 곤란하긴 하죠.”

“땡중 너는?”

“형제님, 저는 부피가 커서 안 됩니다.”

확실히 시바의 근육 부피를 생각하면 지나갈 수 없긴 했다. 지상이라면 드워프답게 땅굴을 만들면 되지만, 여기는 미궁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죠.”

“어떻게? 아, 거미가 있구나.”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일행이 보기 좋게 거미가 보내는 영상을 바이저에 투사했다. 그래서 앨런과 일행이 보는 영상은 좌우가 바뀐 형태였다.

동그랗게 뚫린 굴 천장과 벽면에는 나무뿌리들이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보기엔 안 좋아도 저것들이 굴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지대였다.

“지상이라면 그렇겠죠. 시바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천공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앨런, 드워프라면 모두 그쪽에 정통할 거라는 생각은 선입견이야.”

“토굴이 원시림의 일부인지, 아니면 알파가 뚫어놨는지 판단부터 해야겠네요.”

“그러려면 우선 찾아야겠지.”

마침 토굴이 둘로 나뉘었다. 거미도 여러 마리를 보냈기에 반씩 나눠서 전진했고, 바이저의 영상도 2개로 분할되었다.

내부는 개미굴처럼 복잡했다. 뼈를 버리는 방을 발견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양이 적었다.

“여기도 물건을 놔두면 미궁이 흡수하나 보네요. 일단 여기에 놓인 뼈는 살점이 붙어있어요.”

“내가 버렸던 갈비 부위 같은데.”

방 내부를 관찰하는 도중, 통로를 움직이던 거미들의 연결이 끊겼다. 검은 가죽이 돌진하는 모습이 녀석들이 보낸 마지막 영상에 담겼다.

“생각보다 날쌔네요. 일단 아래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으니 어떻게 꾀어낼지 고민해봐요.”

테일러와 시바가 머리를 맞댄 사이, 시온이 의견을 냈다.

“고기로 유인하자.”

“쟤가 짐승이냐?”

“비슷하잖아.”

그건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테일러가 앨런을 쳐다봤다. 당연히 의견을 묻는 행위였다.

“넌 벌써 생각해둔 게 있지?”

“굴을 물로 채우면 되죠. 익사하기 싫으면 나올 겁니다.”

“앨런···. 그러다 못 빠져나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일단 선배 말대로 해봐요.”

앨런 일행은 룬문자를 활용해서 기척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토굴 앞에는 잘 익은 고기가 놓였고, 그 뒤에는 안으로 냄새를 보내기 위한 송풍기가 설치되었다. 시온은 알파가 나오자마자 덮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10분, 20분, 30분···. 시간이 점점 흘렀지만, 앨런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곳을 탐험하다가 다시 올 생각도 있었다.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마력 파장 탐지기가 주변을 스캔한 내용을 바이저에 표시해줬는데, 토굴 아래에서 위로 기어 나오는 알파의 모습이 보였다.

작은 곰이 머리만 슬쩍 내밀고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을 했다. 앨런이 새긴 [탈취] 덕분에 냄새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고, 알파는 그것까진 감지할 수 없었다.

안심한 알파가 조심스레 기어 나오더니 고기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훌쩍 뛰어내린 시온이 녀석을 낚아채서 앨런에게 던졌다.

“캬아아!”

작은 곰, 아니, 곰 가죽을 뒤집어쓴 작은 아이가 짐승 소리를 냈다.

“그냥 아이네요. 6살쯤?”

“그게 더 신기하지. 아이가 왜 미궁에 있냐?”

알파는 팔다리를 강하게 휘저었지만, 파워슈트의 힘을 극복할 순 없었다. 녀석은 힘이 빠졌는지 곧 축 늘어졌다.

테일러가 녀석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살짝 숙이자.

“캬악!”

“어이구. 팔팔한 것 좀 보게. 어떻게든 할퀴려고 손톱 세운 거 봐라.”

“형제님, 저도 한 번 보겠습니다. 지하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지상의 아이라면 치료해야 합니다.”

시바가 대신 나서자 알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르렁거림은 여전했지만, 손톱은 집어넣은 상태였다.

시바는 미소를 머금으면 하얀빛을 두른 손으로 알파를 살짝 건드렸다. 녀석은 움찔거리긴 했지만 크게 거부하진 않았다.

“역시 아이도 선한 사람은 알아보는군요. 형제님이 무서웠나 봅니다.”

“시비 걸지 마라.”

“나도 볼래.”

시온이 다가오자.

“캭!”

알파가 다시 손톱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눈빛은 초롱초롱하면서도 사나움이 감돌았다. 팔을 마구 휘둘렀지만, 시온이 어설픈 공격에 당해줄 리가 없었다.

파워슈트를 할퀴어도 소득이 없다는 걸 아는지, 그나마 앨런이 겨드랑이를 붙잡고 있으면 얌전히 있었다.

거리를 벌린 테일러가 턱을 쓰다듬었다.

“까만 머리에 붉은 눈동자라. 지상의 아이라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탐험가가 아이를 일부러 버리고 가는 경우도 있나요?”

“그런 놈들이 있긴 하지. 너도 알다시피 시온도 8살부터 들어왔잖아. 육성 명목으로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어.”

일반인이 보기에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해도 사각지대는 어디나 있었다. 권력이나 돈으로 무시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알파를 관찰하던 테일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니면 구더기가 새끼를 쳤을 수도 있지. 부모의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이미 뒤졌겠지. 살아있었으면 애가 야생화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니면 알파 자체가 특이현상일 수도 있죠.”

문을 통과해도 멀쩡하니 지하인이나 괴물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일단 지하인의 특징은 없네요. 때가 타긴 했지만 각질이 없고, 피부도 하얗긴 해도 핏줄은 안 보이고.”

앨런은 알파를 상자 뒤에 묶어놨다. 마트 카트에 있는 아이 좌석에 탑승한 듯한 모양새였다. 알파는 계속 이쪽을 경계하면서도 고기를 주면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지상에 가는 거겠죠. 특이현상이라고 해도 미궁을 빠져나가면 생명이 끊기니까요.”

살아있으면 지상의 아이, 아니면 미궁의 아이라는 의미였다.

“30층은 갈 거지?”

앨런이 테일러의 말에 주변을 둘러봤다. 현재 29층이니, 한 층만 더 내려가면 목적지였다.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보냈던가. 시온 덕분에 빠르게 내려왔는데도 2주 가까이 지난 상태였다. 다시 올라가려면 비슷한 시간이 소모되니, 왕복만 해도 한 달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평소의 앨런이라면 연구를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목적지를 눈앞에 둔 이상 복귀는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다시 올라가기엔 보낸 시간이 아깝죠. 선배도 있으니 30층은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당연히 알파가 다치는 일도 없겠죠.”

“나만 믿어.”

시온의 어깨가 높아졌다.

사실 추적 당시 알파가 보여줬던 속도를 고려하면, 위기의 순간에 밧줄만 풀어줘도 무사히 달아날 확률이 높았다.

일단 땅굴이 자연적으로 생성된 건지, 알파가 만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돌아왔다.

“땅굴은 여전하네요. 특별한 능력은 없나 봐요.”

“아니면 곰 가죽이 오파츠인가?”

“캬악!”

“형제님, 왜 아이 옷을 벗기려고 하십니까? 그러니 화를 내는 겁니다.”

“내가 언제?”

“일단 여기에 천이 있으니 몸을 가리면서 가죽을 벗겨보겠습니다.”

“캮!”

시바가 가죽에 손을 대자 똑같이 으르렁거렸다. 거의 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30층 파수꾼의 얼굴이나 보고 가죠. 31층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해도 되고요. 알파는 그다음에 판단해요.”

어차피 파수꾼을 만나려면 걸어야 했고, 앨런은 그 시간 동안 알파를 관찰할 생각이었다. 정체를 바로 밝힐 순 없어도, 판단을 위한 근거 몇 개는 발견할 수 있으리라.

< 30층(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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