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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속 천재공학자-130화 (130/193)

< 30층(5) >

상자의 몸통에 꽁꽁 묶인 알파는 포대기에 감싸진 아기 같았다. 처음에는 격렬하게 버둥거렸으나 지금은 포기했는지 몸을 축 늘어트렸다. 체념 혹은 피로 때문이리라.

그 상태로 목과 눈동자를 최대한 돌려서 앨런 일행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다가 시온과 눈이 마주치니.

“크릉!”

바로 이를 드러냈다. 야생아 같지 않은 깨끗한 치아와 선명한 잇몸이 드러났다. 알파가 으르렁거리자마자 시온도 인상을 썼다.

알파는 앨런 일행 전부를 꺼렸는데, 그중에서도 시온을 제일 싫어했다. 팔만 자유로웠다면 수차례 할퀴고도 남았으리라.

테일러가 앨런 옆으로 슬그머니 붙었다.

“쟤네 동족 혐오한다.”

“동족 혐오요?”

“외모만 다르지 어릴 때는 정말 비슷했거든. 시온도 작은 짐승이었다는 말이지. 어쩌다 저렇게 변했을까? 마력수련법과 사회화의 영향인가?”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바꾸기 힘들다지만 학습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에, 그렇게 믿고 있기에 사회가 교육에 투자했다.

마력수련법도 타당한 이유였다. 심기체, 각각 마음과 마력과 육체를 의미하는 단어는 3개의 지지대 역할을 하며 서로 영향을 줬다. 시너지를 내거나 때론 불협화음을 연주하거나.

시온의 어린 시절을 말하던 테일러가 입을 다물었다.

“쟤가 너 흘겨본다. 그만해야지.”

“저 말고 아저씨를 봤겠죠.”

시온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거나 말거나, 앨런은 상자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뭐하냐?”

“파수꾼이 울음소리로 아군을 불러온다면서요. 그에 대한 대비책이죠.”

앨런은 거미의 별문자를 변형하며 거닐었고, 덕분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거미까지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쉿. 저기에 있다.”

테일러가 가리키는 장소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곰의 새까만 털은 어두운 숲과 동화되어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감췄다.

곰은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을 따라 다녔다. 아니면 반대일 수도 있고.

계속 으르렁거리던 알파도 이때만큼은 조용했다. 곰이 있는 방향을 계속 신경 쓰는 모양새를 보니, 원시림의 생물과 적대 관계인 듯했다.

앨런은 곰과 알파를 번갈아 쳐다봤다.

“원시림에 있는 것들은 죄다 거대하네요. 지성체가 존재했으면 그들도 컸을까요?”

“꼬맹이가 대답이 되겠지.”

“알파를 6살 정도로 추측했는데, 더 어릴 수도 있겠군요.”

지하인 평균 키는 2m가 넘었으니, 알파가 그들과 유사한 종족이라면 저 모습으로 3~4살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곰과 전투를 해야 하는 시간. 호기심을 접어두고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시온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실력의 차이가 있다 보니, 구경하다가 위기의 순간에만 도와주기로 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삐―

상자의 비프음이 너무 컸던 탓일까, 털을 손질하던 곰이 이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반응이 살짝 느렸다. 녀석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물체는 나무와 불청객이 아니라 동그란 마탄이었다.

주먹 크기의 마탄이 놈과 부딪치며 불꽃을 피워올렸다. 붉은 뱀이 소리 없이 곰의 몸통을 휘감았다.

전투 개시는 무음의 포격이었다. 강력한 화력으로 전장을 쓸어버리고 나중에 병력 투입해서 남은 세력을 소탕하는 게 전투의 기본이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곰은 터프했다. 화염이 털을 태우는 도중에도 눈을 새빨갛게 빛내며 적을 포착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포효다!”

“괜찮으니 움직이세요.”

앨런이 마탄을 발사하는 사이, 주인의 명령을 받은 거미들이 나무를 타고, 지면을 질주하며 곰에게 접근했다.

코끼리 크기의 곰에게 손바닥만 한 거미는 너무 작았는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덕분에 거미들은 곰의 털 속으로 쉽게 파고들었다.

화염 내성을 지닌 거미들은 털의 바다를 헤엄쳐서 곰의 머리 부분으로 몰려들었다. 곰이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린 순간, 거미들이 자세를 바짝 낮췄다.

거미의 몸통이 마력의 실로 연결되며 반투명한 구체를 만들었다. 곰의 머리가 비눗방울을 뒤집어쓴 것처럼 변했다.

······!

덩치에 걸맞게 우렁찬 포효가 들려야 하는데, 어떠한 소리도 주변에 전달되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리던 녀석은 이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곰이 무음 영역을 만든 거미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처리할 일이 생겼다. 가까이 접근한 테일러, 시바 그리고 표범이 문제였다.

뒷다리로 몸을 일으킨 곰은 그야말로 산처럼 보였다. 녀석은 입가에 붙은 거미를 떼어내려던 앞발로 지면을 내리쳤다.

쿵!

둔중한 울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거미줄처럼 쩍쩍 갈라진 균열이 앞발에 담긴 힘을 증명했다.

첫 공격을 피한 테일러가 마나소드의 불을 밝혔다. 푸른 섬광이 손잡이에서 길쭉하게 빠져나왔다.

“덩치가 약점이다! 등 뒤로 올라타!”

앞으로 내달린 셋은 근접전에 일가견이 있어서, 올라타는 것쯤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긴 했다. 달라붙는 적들을 처리하려고 몸을 굴리는 곰을 어떻게 막냐가 골자이나, 앨런에겐 그에 대한 대비도 있었다.

테일러 몰래 피를 조금 먹인 형상변환합금이 대비의 첫 단추였다. 그것은 마력 구조체 역할을 대신하며, 앨런이 마법을 부리기 위한 주춧돌로 활약했다.

[속박], [강화], [둔화], [약화]. 합금이 빗어낸 4가지의 룬문자가 머릿속에 담긴 심상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허공이 일렁거리고, 파랗게 생긴 사슬들이 튀어나와 곰의 사지를 결박했다. 붉은 불꽃과 푸른 사슬이 어우러져 화려한 색감을 뽐냈다.

육체의 자유를 잃은 곰이 분노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고통이 찾아왔다.

가슴과 머리 주변의 화염이 지독한 통증을 선사했고, 등과 하체 쪽에 달라붙은 조그마한 것들은 따끔한 아픔을 피워냈다.

소리라도 제대로 들린다면 곰의 처절한 울음이 탐험가들의 심금을 울리겠지만, 거미가 남아있는 한 그럴 기회는 없었다.

앨런은 마력으로 빚어낸 쇠사슬을 유지하며 셋의 분투를 구경했다. 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험자가 함께하니 좋네요.”

“왜?”

“미리 대비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있으니까요. 아저씨가 없었다면 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차례 가늠해야 했겠죠.”

“그냥 부딪치면 안 돼?”

“사람마다 방식은 다르니까요. 이제 돌아오세요!”

하체가 너덜너덜해진 곰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화염이 여전히 털을 태우고 있으니 그 이상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미궁에서는 강대한 적을 쓰러트린다고 모든 게 끝이 아니다. 다른 괴물이나 구더기를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으니, 지상으로 복귀할 힘을 남겨놔야 했다.

탐험에는 위험이 따르지만, 무언가를 얻으려면 탐험을 해야 했다. 미궁 탐험은 모순적이면서도, 그걸 극복할 만큼 매력적인 행위기도 했다.

사슬에 묶인 곰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녀석의 주위에 만들어진 붉은 웅덩이에 불이 비치며 더욱 새빨갛게 변했다. 사슬과 불꽃은 곰이 머리를 아래로 처박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앨런이 만들어낸 화염은 주변에만 머물렀다. 살아있는 나무는 생각보다 안 타는데, 원시림의 나무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했다.

쓰러진 곰은 고기 굽는 냄새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누린내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 상당히 좋은 냄새였다.

시바가 코를 킁킁거렸다.

“열심히 움직였더니 오히려 배가 안 고프군요. 냄새는 좋은데 아쉽게 됐습니다.”

적당한 운동은 식욕을 촉진하지만, 너무 과하면 억제하기도 했다. 전투를 운동으로 따지면 제일 힘든 부류니 당연한 결과였다.

“챙겨놨다가 식으면 맛 없어질 테니 어쩔 수 없지. 저거 보여?”

“아이는 아이군요.”

알파는 고기 냄새를 맡고 침을 줄줄 흘렸다. 앨런이 잘 익은 고기를 골라서 건네주니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입가에 기름을 묻힌 알파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전리품 수확이 끝나고, 이제는 문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탐험까지는 아니고 발만 디디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시온과 테일러가 앞장서고, 시바와 앨런이 그 뒤를 따랐다.

검은 문을 가운데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푸르른 녹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통 새하얀 설원이 펼쳐졌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형제님, 저번에···.”

“무슨 말 하는지 알지.”

테일러와 시바는 광산 유적에서 봤던 풍경을 떠올리고 자신들만 아는 소리로 숙덕거렸다.

“극지방 또는 빙하기의 한복판 같습니다.”

“벌써 춥네. 다음에는 보온 장비도 잘 챙겨와야겠어.”

“앨런 형제님이 있으니 이것저것 준비할 필요는 없···. 어? 앨런 형제님이 안 보입니다.”

시바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자는 있으나, 앨런과 표범이 없었다.

“알파도 없습니다.”

앨런이 상자의 몸통에 만들어놨던 강철 포대기가 텅 비어있었다. 고민할 시간도 필요 없이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다시 원시림에 발을 디디자 앨런과 표범이 있었다. 테일러가 물었다.

“앨런, 왜 그러···.”

질문을 던지다가 앨런의 시선을 쫓아 나무 위를 쳐다봤다. 목을 크게 꺾어야 볼 수 있는 높이에 알파가 매미처럼 매달려있었다.

“무슨 일이야? 쟤는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고?”

“상자가 문을 통과하는 순간에 알파가 풀려났습니다. 마치 유령처럼 구속구를 빠져나오더군요. 무슨 현상인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에 저 위로 올라갔습니다.”

“일단 내려오게 해야지.”

“기왕이면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앨런이 말을 꺼내자마자 시온이 앞으로 나섰다.

휘익!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휘파람을 불었고, 아주 많은 마력도 담겨있었다.

마력의 파도에 휩쓸린 알파의 몸이 굳더니 추락했다. 시온이 다시 나서서 알파가 몸에 두른 곰 가죽을 붙잡았다. 녀석은 어미에게 목덜미를 물린 새끼 동물처럼 대롱대롱 흔들렸다.

“얌전하니 좋네. 계속 이러고 다닐까?”

“일단 저한테 주세요. 다시 문을 통과해보죠.”

앨런이 알파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문을 통과하려고 해도, 처음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룬문자에 의한 구속도, 물리적인 속박도 소용이 없었다.

몇 차례의 실험 후에 앨런이 결론을 내렸다.

“미궁, 정확히 말하면 원시림에 종속된 아이군요.”

“그럼 괴물이야.”

시온이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평소와 같은 맹함은 사라지고 한줄기 칼바람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선배.”

“난 미궁의 괴물은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 배웠어.”

“어째서죠?”

“그것들은 우리를 보면 살의를 느끼니까. 저 아이를 봐. 눈에 담긴 적대감이 보여? 가엾다고 동정을 보이면 동료들의 목을 물어뜯을 거야.”

시온이 어느 때보다 길게 말했다.

앨런도 그녀의 의견에는 찬성하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알파가 다른 사람을 볼 때면 몰라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동공이 흔들렸다.

별문자 개조를 거듭하며 강화된 인공 안구는 모든 움직임 포착했다. 아무리 봐도 알파가 자신에게 보이는 행태는 살의보다 혼란에 가까웠다.

‘마력수련법, 아니면 미지의 언어가 각인되며 무언가가 바뀌었나?’

오토마톤이나 원시림의 다른 생물은 여전히 앨런을 보자마자 공격하니, 알파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테일러도 그렇게 가르쳤어. 다 찢어 죽이라고.”

“어,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내가 너한테 그렇게 과격한 단어를 사용했니?”

“응.”

“어린 애 앞이라고 최대한 자제했건만···.”

날카로운 바람이 가라앉고, 시온이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간 알파를 보며 물었다.

“그래도 너를 따라왔으니 참을게. 어떻게 할 거야?”

“풀어주죠.”

“왜?”

“어차피 말도 안 통합니다. 몰래 따라붙어서 무엇을 하는지 관찰하죠.”

< 30층(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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